정문의 작품

날고 싶은 새

미송 2012. 5. 14. 11:37

 

 

날고 싶은 새

 

이정문

 

 

 

 

“마하트마 간디 비슷한데,”

거울 속에 비친 머리를 미끈미끈한 감촉으로 어루만지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카락 때문에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높은 지위를 얻은 것도 아니요 돈이 많아 재벌 회장쯤의 자리를 차지한 삶도 아닌데, 은빛을 발하는 우아한 머리카락이 무지렁이처럼 살아온 내 거무틱틱한 이마를 덮어오다니, 그래서 염색약을 사다가 머리뿌리까지 가는 빗으로 박박 문질렀다. “에잇, 개뿔도 없는 개털이 머리카락만 고급이야.” 이렇게 나는 젊음을 탐하기보다는 내 꼴이 뵈기 싫어서, 말하자면 대책없이 나이만 먹어버린 내 삶이 부끄러워서 귀찮은 염색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년쯤 지나자 염색만 하면 별안간 두피에 염증이 돋고 진물이 손에 묻어났다. 누구말로는 괜찮았던 내 체질이 변해서 그렇다나, 염색약을 다른 회사제품으로 바꾸고 두피에 약이 안 묻게 별수단을 다 동원해 염색해봤지만 염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하얀 머리카락도 안 보이고 염증도 없애려면? 방법은 딱 하나였다. 박박 문질러 깎아 버리자.

 

갸웃대는 민머리가 거울 속에 비치는 순간,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 앞 페이지에 붙었던 그의 사진이 떠올랐다. 민머리의 동그란 두상에 코에 걸친 안경까지 나를 많이 닮은 듯한데,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면 내가 영락없는 간디의 인상이 아닌가. 간디가 15살 때에 병상에 누운 아버지 앞에서 자기의 거짓말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고백을 들은 아버지는 물끄러미 간디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에 큰 충격을 받은 간디는 앞으론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고, 평생 그렇게 살았다. 요즈음 우리 사회가 어떤가, 박사학위논문이나 표절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정치가들이나 관료들이 좀 많은가 말이다. 오죽하면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이 몽땅 우범지대라고 사람들이 말하겠는가. 나는 코 끝에 걸쳐진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콧구멍을 벌름댔다. 간디의 인상을 닮았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가벼운 걸음으로 이발소를 나섰다. 집에 들어서자 거실 저쪽에서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내 목소리가 주책없이 날아들었다. “어머나, 방금 교도소에서 나온 죄수 같아.”

 

이놈의 여편네가 초를 쳐도 유분수지. 눈을 흘기고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봤다. 왠지 아내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번들대는 이런 머리가 바로 위대한 간디의 머리가 아닌가, 나는 고집스럽게 간디만 떠올렸다. 그러나 이후로 거울을 볼 때마다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민머리의 내 얼굴이 꼭 죄수를 닮아가는 듯했다. 머리카락이 잔디처럼 들쑥날쑥 돋아날수록 더 했다. 그래서 겨울의 한기도 피하고 인상도 바꿀 겸 시장에 나가서 스님들이 잘 쓰고 다니는 털모자를 하나 사왔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뒤집어쓴 검은색모자의 가장자리를 위로 접어 올려보았다. 이만하면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세상이란 좋은 일을 당하건 굿은 일을 당하건 부자로 살건 가난하게 살건 다 도량이라서, 삶이란 그저 묵묵히 지켜나가는 수행이 아닌가. 문득 법정스님을 다비할 때, 시뻘건 불구덩이 속에서 허옇게 드러난 스님의 정강이뼈 사진이 뇌리에 떠올랐다. 스님에게는 그 뼛조각마저도 제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일찍 무소유를 주장했을 것이리라. 거울 속에 비친 내 표정이 자못 경건하고 엄숙하다. 모자 가장자리를 조금 위로 치켜 올려보았다. 법정스님은 털모자로 이마의 반 정도를 가린 것 같기도 하다. 가늠하여 모자를 추스르는데 뒤로 다가온 아내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쳤다. 뒤통수에 난데없이 꽂힌 말, “어머 당신, 꼭 군밤장수 같아. 호호”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경전과 같은 환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 여편네가! 개눈에는 똥만 뵌다더니, 기분 좀 내려고 하면 꼭 딴죽을 건단 말이야. 무릎도 약간 휘청댄 느낌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아내의 면전에 댄 채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앞에 물끄러미 서있었다. 그 말을 들어서 그런지 뒤집어쓴 털모자하며 밑에 드러난 얼굴이 별안간 군밤장수처럼 변해 보였다. 여자는 남자의 기를 꺾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가 보다. 나는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았다. 예부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은 성인(聖人)이 없다. 특히 여자에게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마누라에게 천대받았고 공자가 아내에게 존경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우주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다. 어느 날 밤 탈레스는 하녀와 함께 들판을 거닐며 하늘의 별을 연구하다가 우물에 퐁당 빠지고 말았다. “제 발밑도 못 보는 주제에 우주는 뭔 우주?” 하다못해 시중이 본분인 하녀도 탈레스에게 이런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여자의 눈에는 남자들이 황당하게 보일 때도 많을 것이다. 박박 깎아버린 머리에다가 엉뚱한 마하트마 간디를 끌어다 붙여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든가, 싸구려 털모자 하나 사다가 만지작거리면서 이리저리 뒤집어쓰고는 고승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인생이 도량이고 수행이니 어쩌구저쩌구 중얼대는 나를 보면 말이다. 남자는 이상(理想)지향적이고 여자는 생명(生命)지향적이라는 말이 맞긴 맞나 보다. 남자는 탈레스처럼 제 주제도 파악 못하고 훨훨 날개를 펴려는, 그러다가 몽유병환자처럼 사방을 하릴없이 배회하고야 마는, 그저 저 산 넘어 먼 구름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족속인 줄도 모르겠다.

 

나이 환갑에 접어들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면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을 법도 하다. 역시 새처럼 날고 싶은 나다운 생각이었다. 한글로만 번역된 영미문학을 접하다보니 너무 답답해서, 아예 원서를 내 눈으로 직접 해독하여 읽자는 욕심에서 저지른 엉뚱한 행동이었다. 섹스피어, 헤밍웨이, 소로우, 키츠, 에머슨, 엘리엇, 등등. 영미작가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는 방법이란 뻔하다. 수능이나 토플시험용 서적을 사다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문장을 해독하기는커녕 모르는 단어가 새카맣게 줄지었고, 십리에 하나씩 어쩌다가 아는 단어를 만날 뿐이었다. 그래도 이때는 반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마치 이산가족의 눈물겨운 상봉과 같았다. 새벽 일찍 컴퓨터 앞에 앉아 열흘을 보내고 한 달을 보내고 두 달, 석 달, 이렇게 지나자 어둠 깊이 숨었던 옛날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컴퓨터로 다운받은 강사들의 강의는 무척이나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옛날에는 책을 사들고 학원에 가서 한국교사의 어정쩡한 발음으로 공부를 했지만, 컴퓨터 덕분에 방안에 앉아 교재를 펴놓고, 더구나 원어민 강사의 본토발음을 들으며 공부하니 세상이 좋아지긴 좋아진 모양이다. 하여튼 문법, 단문독해, 장문독해, 어휘, 숙어, 발음 등의 순서로 진도는 나갔고, 처음엔 혀가 얼어붙어서 따라 하기도 힘들었던 발음들이 엉터리나마 그럭저럭 터지기 시작했다. 이제 좀 영어에 맛을 들이려나, 이른 새벽에 아내는 잠자고 나는 책상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솰라댔다. 그러다 보니 내 영어발음도 그다지 떨어지는 편이 아닌 것도 같았다. 언젠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영어로 연설하는 장면을 봤는데, 반기문 사무총장의 발음이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도 같아 썩 잘하는 영어라고 보기는 힘들고, 그런 깍두기 영어발음도 세계적인 석상에서 충분히 통하니, 내가 지금 내는 이 기막힌 영어발음! 긴머리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그러니깐 미모의 원어민 여자강사가 쫑알대는 그 예쁜 입술이 길러낸 나의 발음실력은 반기문 사무총장과 맞붙어도 손색이 없을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영어공부에 열중하느냐고 아내가 물었을 때, 나는 한국말도 평생하다 보니 싫증이 나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단어마다 붙어 다니는 음의 강약인 악센트와 문장을 읽을 때 고저를 오르내리며 출렁대는 영어의 특유한 리듬감. 이런 기분은 우리말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 시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우리 시에는 운율이 없다. 말하자면 시에서 음악성이 빠져버린 것이다. 일부 문학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우리 시가 운율에서 해방된 자유시니 산문시니 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지만 역시 시란 암송하여 박자가 맞고 강약이 맞고 고저가 조화를 이루어 노래를 부르는 듯해야 제 맛이다. 언제나 내가 영미시를 척척 발걸음에 맞춰 암송하고 원래의 뜻으로 그 진국을 맛볼까, 여자 원어민 강사의 목소리도 청량하고 발음도 아름답고 쫑알대는 입술도 예쁘다. 아하, 입술의 맛이란 저런 것이구나. 저렇게 도톰하고 귀엽게 꼬물대기에 서양 남자들은 여자를 만나기만 하면 주둥이를 갖다 처박는구나. 자꾸 따라하다 보니 내가 어느덧 미국 CNN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된 기분이었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서 혀를 더욱 유연하게 꼬부리고 약간 목소리를 높이는데, 잠에서 깬 아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당신이 중얼중얼 염불하는 줄 알았어요. 지금 영어공부하고 있었어요?”

순간 내 입은 그만 딱 봉해지고 말았다. 에혀, 염불이라~

 

 

2012. 5월 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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