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상념의 자동차여행

미송 2012. 2. 15. 07:49

[기행문] 상념의 자동차여행

 

 

 

 

전조등을 켰다. 차는 톨게이트를 지나 어둠이 내려앉은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주말의 행락차량들이 불빛을 앞으로 길게 내뿜으며 운전대 옆 백미러를 스쳐 지나갔다. 가속페달을 발끝으로 지그시 누르자 차는 순식간에 80킬로를 넘어 110킬로에 육박했다. 바다로 가자. 원주에서 경포대까지는 불과 1시간 20분 거리다. 아내가 보온병을 열더니 커피를 따라 내게 건넸다.

 

 

나는 사실 보름 이상 불안감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에밀리 부론테, 도스토예프스키, 알렉상드르 뒤마, 앙드레 지드,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에리히 레마르크, 등등, 그들의 문학작품 속에 내 삶이 깨알 같은 글자로 용해되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의 문학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이렇게, 젊은 시절부터 명작들을 대할 때마다 절망에 빠졌다. 나에게 작품은 없다. 내 문학적 상상력과 공상은 추월을 일삼는 차량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아내가 CD를 켰다. <The Thrill is Gone> 흑인가수 B.B King의 굵은 목소리가 날카로우면서도 육중한 일렉트릭기타의 반주에 올라타 제 톤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 제목이 무슨 뜻일까, Thrill- 전율, 오싹함, 짜릿함, 글자 그대로 스릴, 오른쪽 멀리 스키장이 보였다. 산봉우리부터 급경사로 내리깎아 하얀 띠로 쏟아 부은 코스가 줄지은 가로등에 눈부신 빛을 발했다. 저곳에서는 스키어들이 아래로 몸을 던져 스릴을 만끽할 것이다. 차는 둔내터널을 지나 평창 휴게소를 스쳤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의 속도에 가슴을 짓누르던 우울증이 약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강릉연탄갈비집 주인은 잘 있을까? 벌써 3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강릉은 어둠 속에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 늦은 시간이지만 저녁식사를 강릉연탄갈비 식당에서 하자는 아내의 말이었다. 강원도에서 자란 아내에게는 연탄에 대한 향수가 짙었다. 담벼락 키만큼 폭설이 차오르고 냉기가 벽을 뚫는 태백이나 대관령의 겨울, 방안에 들여놓은 무쇠난로 위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는 주전자를 치우고 난로 뚜껑을 열 때, 숭숭 뚫린 눈을 밝게 내밀어 뜨거운 열기를 밖으로 내뿜는 연탄과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 얼른 화력이 붙은 위엣 연탄을 아래로 내리고 그 위에 까만 연탄을 얹어 구멍을 이리저리 맞춰 뚜껑을 닫으면 방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그러면 손바닥으로 연통을 감싸 등줄기에 달라붙은 가난과 추위를 어깨로 후들들 털어내던 추억일 것이다. 난로가 달아오르면 연통을 고정시키려 벽으로 끌어당겨 매단 철사 줄에서 아기의 기저귀가 바싹바싹 말라 하얗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강릉연탄갈비 식당에 대한 이상한 우울증이 벌써부터 가슴에 도사리고 있었다.

 

3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내 또래 식당 여주인은 병이 깊었다. 고혈압과 비만증, 그리고 지독한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매일 얼굴이 부었다 내렸다 하는 폼이 그 외에도 당사자가 알지 못하는 질병이 있고 저런 스타일은 삐끗 한번 쓰러지면 끝장이라는 내 짐작이었다. 경기도 양평에서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 식당과 술집을 오랫동안 운영했다는 여주인은 입담이 걸걸했고 유머가 넘쳤다. 그러나 말하던 눈빛 이면에는 바닥을 기어온 인생만이 갖는 애수가 깃들어 있었다. 사실 나는 강릉에 내려올 때마다 깔끔하고 후덕한 그녀의 음식 맛에도 불구하고 식당에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피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번 아내의 재촉에 좌회전하여 식당 골목길에 접어들면서 내가 중얼중얼 내뱉은 말이란, “그 식당 아주머니 혹시 죽었을지도 몰라.”였다. 차가 서서히 식당 앞으로 다가갔다. 간판을 올려다봤다. 까만 연탄처럼 불이 꺼져 있었다. 정말 여주인이 죽었을까, 아파서 병원에 입원중일 수도 있고, 오늘 하루 쉴 수도 있고, 아니면 장사를 집어치우려고 가게를 내놓았을 수도 있다. 아내와 내가 강릉을 떠나 원주로 이사 올 때 여주인은 우리를 따라 같이 떠나고 싶다고 말했었다. 나는 아쉬워하는 아내의 표정을 느끼며 핸들을 틀어 우울한 골목을 빠져나왔다. 건강하시라. 제발

 

 

경포호는 잔잔했다.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하얀 포말을 불빛에 드러내며 뭍으로 밀려들었다. 나에게 있어 바다는 옥빛 새색시이기도 하지만 이런 밤이면 우울의 늪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는 밤바다로 걸어 들어가 삶의 궤적과 흔적을 없애고 싶어 안달한 적이 있다. 검은 바다의 공포와 두려움을 새파랗게 뒤집어쓴 얼굴로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시체를 연상하다가 소스라쳐 놀라기도 했다. 뒤마는 <춘희>라는 작품에서 진정한 사랑도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아르망이라는 청년이 아르그리트라는 창녀에게 퍼부은 사랑이 결국은 고통이었다는 역설을 실감나게 그렸다. 사랑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창녀 아르그리트도 과거의 생활을 접고 어엿한 아내의 품격을 갖춘다. 그러나 따라다니던 과거의 행적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아서 하나의 순애보처럼 아르그리트는 남자를 떠나 창녀생활로 돌아가지만, 한번 변한 인간은 되돌아와 그전처럼 되지 못한다. 각혈 속에서 써내려간 그녀의 마지막 편지에는 오직 사랑하던 사람의 이야기뿐이었다. 아르망이 먼 여행에서 돌아와 그녀의 무덤을 찾았다. 꼭 다시 한 번 보고픈 얼굴, 아르그리트의 얼굴을 보고자 이장을 핑계대어 아르망은 묘지를 팠다. 그 속에서 드러난 아르그리트의 허물어진 얼굴, 반쯤은 해골로 드러난 여인의 몰골을 보고서야 아르망은 열띤 정신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아 긴 사랑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도 내 시신을 본 후에라야 내 전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삶은 너무 뜨겁다. 고독 우울 방황 절망 이런 것들도 달아오른 연탄처럼 뜨겁기만 하다.

 

다음날 차는 해변도로를 굽이돌며 정동진과 동해 삼척을 지나 죽변항으로 향했다. 강릉이나 주문진보다 회가 더 싱싱하고 값도 싼 재작년의 기억 때문이었다. 오른쪽으로 백두대간의 준령도 같이 달렸다. 곤륜산의 품질 좋은 청옥처럼 바다는 빛났다. 그리고 자를 대어 줄을 하나 쭉 그은 것과 같은 수평선으로 바다는 단순했다. 등대도 방파제도 모래밭도 해송도 그러했다. 그냥 드러난 모습. 이것이 열흘 전에 우울증 환자처럼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죄와 벌>의 주제였다. 나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떠오르면 습관처럼 열병을 앓는다. 톨스토이 작품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톨스토이 작품세계는 그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요약되어 있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걱정하는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남이 자기를 걱정해주는 것으로 산다.” 톨스토이는 이 한마디를 위해 그토록 많은 소설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밤의 수렁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읽을 때도 지금 환갑을 앞둔 나이에 읽어도 마찬가지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법대생 라스꼴리니코프는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하고 밀린 몇 달치 하숙비에 쫓기면서 다락방에서 공상에 잠긴다. 3000루블이면 학비고 하숙비고 다 해결된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법률과 규범과 도덕을 넘어설 수 있는 초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것에 구속을 당하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나폴레옹은 수십만의 사람을 죽이고도 영웅이 되었다. 바로 초인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스스로가 초인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 하잘 것 없고 버러지 같은 인간,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돈을 강탈한다.

 

그러나 이론은 끌어냈으나 결과는 평범했다. 주인공은 죄책감에 시달려 기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강탈한 돈마저 쓰지 못하고 돌멩이 아래에 묻어두고 말았다. 이론과 논리로 자신을 끌어올려 초인이 되려는 노력, 이 연약한 청년의 노력은 처절하게 실패한다. 죄책감에 몰리던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몸 팔던 수동적이고 무저항적이며 가냘픈 창녀 소냐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고, 놀란 소냐는 주인공에게 부르짖으며 말했다. “대지에 입을 맞추어 죄를 속죄하십시오.” 주인공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소냐도 그와 동행했다. 주인공은 따라온 소냐를 보고 더욱 처절한 자기 패배감과 모멸감에 사로잡히지만, 어느 날 주인공은 소냐의 사랑에 눈을 떠버리고 만다. ‘변증법과 같은 이론이 걷어지고 삶이 드러났다.’ 이것이 <죄와 벌>의 백미다. 철학이 삶의 불변한 모습에 패배하여 초췌한 몰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삶은 드러난 저 바다의 수평선처럼 단순할지도 모른다. 차는 어느새 죽변항으로 들어섰다.

 

 

<죄와 벌>은 마지막 몇 페이지로 작품 전체를 끝장낸다. 단 몇 페이지를 위해 수백 페이지를 골머리 앓으며 읽어왔는가를 생각하면 작가의 재능에 탄복할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는 좀 허무해지기도 한다. 다른 하나의 상념은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창녀라는 직업이다. 사실 몸 파는 여자의 역사는 깊고 그 유래는 지금처럼 사창굴이 아닌, 신전(神殿)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먼 길을 온 순례자의 여독을 풀어줄 겸, 신전을 유지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 물론 오늘날에 윤락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런 행위가, 쾌락이나 돈벌이를 떠나 일종의 신성한 의례에 속했으니 의미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런 신성한 직업이 어둡고 음침한 뒷골목으로 끌어내려져 내 젊은 날 창녀와 처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우울하고 슬펐다. 이는 가장 수치스럽고 모멸에 찬 직업을 남성들이 만들어놓고 스스로 즐기는 오만하고 사치스런 감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고정관념의 수혜자로 옷 벗고 누운 창녀를 불결하면서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려다봤을 것이다.

 

죽변항 수산시장에 들어섰다. 주말이라서 사람들이 북적댔다. 도다리 광어 홍치 가물치 우럭 대게 멍게 해삼 등이 싱그러운 바닷내음을 내뿜어 내 몸의 세포마저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시장이지만 두어 바퀴를 돈 다음에 회를 치던 주인에게 흥정을 붙였다. 주인은 회칼을 놓고 일어서더니 파드득 튀는 싱싱한 해물을 바구니에 담아 저울에 걸었다. “이렇게 해서 오 만원”하고 불렀다. 아내는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재작년에는 삼 만원으로 섭섭지 않게 먹었는데, 오늘은 주말이라서 가격이 비싼 모양이었다. 나는 이만 원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냥 밖으로 나서고는 횟밥 한 그릇에 만원이라고 써 붙여진 식당으로 몸을 돌렸다. 내 졸렬한 이론이지만 문학적 계산에 안 맞는 것이다. 음식 맛은 음식물에만 있지 않다. 주머니에도 맛이 존재한다. 삼 만원이라면 괜찮겠지만 오만 원이라면 주머니 맛 이만 원어치를 상실한다. 사실 아내와 나는 보통 칠팔 만원씩 달아나는 제대로 된 횟집 한 번 들어선 적이 없다. 감당키 버거운 가격이라면 맛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서울깍쟁이. 역시 내가 서울 태생이라서 그렇다고 아내는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라면 하나에 목을 놓아 만족할 줄도 안다. 오만 원이라면 어림 계산하여 라면 80봉지는 될까, 마침 주문한 횟밥에 듬뿍 회가 얹혀 나왔다. 대게 조각을 넣은 매운탕도 덤으로 곁들여졌다. 썰렁했던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음식 맛과 주머니 맛이 함께 어울려 큰 맛을 내는 문학적 계산이 맞아 떨어진 순간이었다.

 

 

평해를 지나 백암온천 가는 길에 배롱나무 헐벗었다. 이파리 하나 붙어있지 않은 구불구불한 알몸을 길가에 줄지어 드러냈지만, 그 빛은 자못 심상치 않아 봄이 움트며 이마를 맞대 수런대는 느낌이다. 온정리 백암온천은 전국에서 제일 오지에 있고 수질도 으뜸이다. 효능이 탁월한 수질 때문에 대형 콘도가 들어섰고 행락 철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지만, 2월 중순, 겨울의 늦바람이 목덜미를 베어내는 이런 날이면 한산하기가 그지없다. 차를 구주령으로 몰았다. 해발 천 미터를 오르내리는 구주령은 천길 절벽을 끼고 돌았고 백암산과 금장산이 준령의 어깨를 맞대 주변 경관이 험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니 운전대 하나에 목숨을 부지한 셈이었다. 이 도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한 고개 중의 하나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문득 우리나라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이것은 남한만의 이야기다. 굳이 일컫는다면 반 토막 대한민국 도로 중에 하나다. 북한에 가면 산수 갑산을 비롯하여 이런 도로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렇다. 민중에게는 한반도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 오천 년 이래 오늘처럼 황당한 때가 어디 있는가.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이고 허리에는 콘크리트 방벽에 가시철망을 둘러쳐 이 좁은 바닥을 빙빙 돌아 오락가락하는, 말하자면 커다란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셈인, 반 토막의 민족이 지금까지 우리 역사 어디에 존재했다는 말인가. 삼국시대에는 윗대가리들끼리 으르렁거렸지만 민중은 신라 백제 고구려 땅을 서슴없이 건너다녔고 고려도 그렇고 조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이 땅에서 민중의 발길을 막은 역사는 없었다. 일정시대에도 남북은 자유로웠다. 이는 권력자의 욕망과 탐욕 때문이리라.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강원도 일대, 경상북도 일대, 충청북도 일대, 이곳은 조선 최후의 장군 신돌석의 발그림자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단발령과 을미사변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동해바다 영덕 출신 신돌석장군, 그는 양반이 아닌 평민이었다.

 

구주령 하룻길 백리를 달리면서 일월산 백암산 두타산 태백산 등, 백두준령을 텃밭 삼아 신출귀몰했고 일본군을 곳곳에서 습격하여 혼란에 빠뜨렸던 신돌석, 십여 년 간 태산을 넘나들어 유격전을 벌이던 그는 일본군이 아닌, 바로 같은 동포요, 고락을 함께 했던 부하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신돌석 장군의 목에 걸린 현상금에 눈이 멀어 패역의 도끼를 휘둘러 피살했다고 하니, 이는 지금의 남북만큼이나 한이 서리고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민중이 망하면 다 망한다. 조선의 혼은 30세로 떨어진 평민 신돌석장군의 운명과 함께 꺾이고 말았다. 대한민국, 외롭고 슬픈 이름이다. 가자. 가자.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우리나라 한반도로.

 

차는 위태롭게 구주령을 넘어 도로에 차선도 안 깔린 산골동네 수비면을 지났다. 산길은 계속 이어졌다. 삼거리에서 현동 태백 쪽으로 핸들을 틀어 협곡을 달렸다. 하늘 위로는 소백산 줄기가 구불구불 선을 그어 지나고 땅거미가 산그늘에 섞여 침침하게 내렸다. 차는 굉음을 내며 다시 죽령을 넘었고 어느덧 풍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루해하던 아내는 뭔가 뇌리에 설핏했는지 풍기가 뭐로 유명하더라, 하고 말을 건넸다. “그거야 문란이지.” 그러자 아내는 “아하, 풍기문란”하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단양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길은 제대로 잡은 모양이다. 단양 제천 원주 그렇게 옛사람 장돌뱅이의 길은 이어질 것이다. 전조등 불빛이 제법 멀리 뻗어 밖이 어두웠다.

 

여기는 소백산맥 깊은 산중이다. 질주하는 차를 제한속도 표지판과 무인단속카메라로 달래가면서 단양군에 진입하자, 아내가 언뜻 오른쪽 언덕 위를 가리키며 저게 뭐냐고 물었다. 그곳은 단양역이었고 역 광장 앞에 쭉 늘어세운 알록달록한 폐열차를 보고 물은 것이었다. 열차카페일까? 잠깐 쉴 겸 역전에 올라서서 차를 세우니 늘어선 열차는 모두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의외의 가설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설무대는 휘황한 조명과 함께 밴드가 곡을 연주하며 들썩였고 가수로 보이는 여자가 열심히 노래하는 중이었다. 외진 산속에서의 이런 풍경,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미군첩보대의 윌라드 대위는 해군순찰선을 타고 넝강을 따라내려 캄보디아의 커츠루트로 잠입하는 중이었다. 윌라드 대위는 이상도 도덕적 권위도 명분도 잃어버린 베트남전쟁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였지만 그에게는 자신만의 군대를 조직해 은둔한 커츠대령을 암살하라는 비밀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단양역 무대 앞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장작나무를 때는 난로가 몇 개 설치되었고 그 속에서는 활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뒤로 가설시장이 들어섰는데, 단양마늘청국장이나 약초를 비롯해서 곤드레 나물, 엿과 조청, 더덕이며 도라지, 부침개, 수수주꾸미, 잡곡, 잔치국수와 장터국밥 등,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난로 주위를 둘러싼 몇몇 사람뿐이 눈에 띠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가설무대와 장판은 6시에 도착하는 열차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서울에서 아침에 행락객을 싣고 출발한 눈꽃열차가 태백의 눈꽃축제에 다녀오는 사람들을 태우고 서울로 다시 돌아가다가 단양역에서 한 시간 이십 분간 쉰다는 말이었다. 난롯가에 섰다. 어느덧 나도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내와 나는 구수한 장터국밥으로 속을 채우며 시간을 보냈다.

 

-윌라드 대위는 순찰선을 타고 가며 첩보대에서 내준 비밀파일을 열었다. 베레모 아래로 당당한 눈빛과 단단한 근육의 커츠대령 얼굴이 드러났다. 서류에는 커츠대령의 모든 경력이 담겨 있었다. 미국육군사관학교 졸업, 한국전쟁참전, 베트남전쟁에 참전, 귀국하여 특수부대로 전입, 다시 베트남 근무, 허가를 받지 않은 독자적 작전수행, 베트남스파이 임의처형, 그 후로 실종, 정글에서 원주민을 모아 국적불명의 군대조직, 원주민들로 구성된 부대원에게는 신으로 추종됨, 윌라드 대위는 화려한 커츠대령의 경력에 호감을 느꼈다. 생사를 넘나든 그의 인상에서는 뭔가 자기와 통할 것 같은,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어둠을 헤집던 순찰선이 유류보급을 받기 위해 넝강 부근에 자리 잡은 미군기지에 도착하자, 그곳은 별천지였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중심가에서나 세워 질 법한 가설무대가 수없는 조명을 받아 빛을 발했다. 윌라드 대위는 침울한 얼굴을 들어 눈부신 무대를 바라봤다. 기지내 미군들은 잠시 후에 벌어질 플레이보이 바니걸스 쇼에 들떠있었다.-

 

사람을 가득 실은 열차가 역으로 진입했다. 무대에 선 가수가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꾸역꾸역 개찰구를 나선 사람들이 불빛을 따라 무대 앞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그들을 응시했다. 내 고향 서울에서 온 사람인가, 문득 이방인의 고뇌가 느껴졌다. 알록달록한 옷들이 무대 뒤의 어둠을 뚫고 자꾸 나타났다. 아직 영하의 날씨라서 입김이 호호 불어졌다. “여러분의 단양 방문을 환영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사회자의 활기찬 음성이었다. 뒤이어 템포가 빠른 음악이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60대가 넘었을 것이다. 그 사내는 무대 앞으로 몸을 드러내자마자 손을 좌우로 펼쳐 히뜩 대며 어깨와 엉덩이를 실룩실룩 춤을 추었다. 몸을 빙빙 돌려 앞으로 뒤로 스텝을 밟기도 했고 지나는 사람을 붙드는 시늉도 해보였다.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무대 앞에 나타나자 뒤를 이어 또 다른 한 무더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든 것이다. 어느덧 무대 앞에는 춤추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자, 노래하실 분은 우측 무대 옆으로 모여주기 바랍니다. 밴드는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어서어서 오세요.”

 

 

 

-기지에 설치된 무대 위로 헬기에서 비치는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무대 옆의 강물이 헬기의 프로펠러 바람에 요동쳤고 모여든 병사들은 날아가려는 모자를 움켜쥐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무대에 내린 헬기에서 사회자가 뛰쳐나왔다. “모두 안녕하십니까, 군복무에 열중하시는 병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플레이보이 바니걸스를 소개합니다.” 헬기 양쪽 문으로 허리가 잘록한 반라의 여체가 비스듬히 드러났다. 사회자는 손을 치켜들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러분 저기 오월의 여왕입니다.” 리듬이 출렁대는 음악과 함께 헬기 위에는 어느새 핑크색 브래지어 아래로 배꼽을 드러내고 그 밑으로는 핫팬티로 겨우 앞부분만 가린 여성이 관능적인 몸짓을 연출하며 서 있었다. 후덥지근한 정글 속에서 적과의 전투에 시달리던 병사들에게 여자란 섹스 그 자체였다. 바니걸스의 흔들어대는 가슴과 엉덩이도 역시 성행위를 묘사로 연속되었다. 병사들은 무대 아래서 몸부림을 쳤다. 절규하듯이 고독하게 소리를 질렀다.-

 

 

 

사실 나는 그런 병사일지도 모른다. 승리가 요원한 베트남 전쟁처럼 열매를 맺지도 못할 문학에 머리를 처박아 몰두하는 행위, 나는 그저 환호하고 부러워하고 그러다가 실망만 일삼는 문학 이등병으로 무명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중일 수도 있다. 이 소백산 산중에 별안간 밀어닥친 사람들, 그들은 무대에 뛰어올랐고 아래서는 춤을 추었다. ‘오빠는 잘 있단다’에 이어 ‘고장 난 벽시계’가 울려 퍼지고, ‘번지 없는 주막’이어 ‘용두산 에레지’가 쿵짝거리고, 노래는 열차가 간이역 스치듯 넘어가고 또 넘어가 ‘여기서도 너뿐이고, 저기서도 너뿐이고 어디서나 너뿐이고’라는 노래가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고, 나도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러대고. 지금 이 장면은 글이 아니다. 문학이 아니다. 드러난 삶일 뿐이다. 얼마나 나는 삶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있었는가, 문학은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현재의 삶에서 멀리 가는 행위다. 그런데 어둠의 바다에서 사라지듯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서 내가 혹시 실종되었을지도 모른다. 커츠대령이 전쟁에 지치다 못해 미쳐버리듯, 그를 암살한 윌라드 대위가 커츠대령의 판박이가 되어 똑같은 미치광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듯, 나는 아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를 닮아 광인의 사색을 즐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 사람들, 눈꽃축제에 다녀오다가 잠시 역에 내려 온갖 삶의 시름을 싸늘한 소백산 공기에 토해내는 사람들, 원고지 위의 군상들.

 

 

 

열차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개찰구로 향했다. 아내는 몰려드는 사람들에 넋을 놓아 별안간 살아나는 내 표정을 봤던 모양이다. 도라지를 사서 차에 오르며 말했다. “당신 정말 외로웠던 모양이네요. 사람구경에 정신이 없던데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활자에 보름 이상을 머리박아 침울했고 그러다가 인간구경을 모처럼 했던 것이다. 머릿속에 하나의 씨가 뿌려졌다. 눈꽃열차를 배경으로 러브스토리를 쓰면 어떨까. 주인공 캐릭터도 눈여겨 봐두었다. 이는 언제부터인가 내게 형성된 본능적인 센스였다. 삼십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 혼자서 난롯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무대와 사람들을 번갈아 보는 그녀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즐겁기는커녕 뭔가 애수에 젖어 있었다. 퍼뜩 출연시킬 여배우를 발견해낸 영화감독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이지만 그 캐릭터가 우울한 모습으로 머리에 박혀들었다. 물론 이것도 내 습관처럼 문학적 상상과 공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작가건 하나씩 품는 소원이 있다면 멋진 러브스토리를 남기는 일이다. 하지만 그처럼 쓰기 어려운 장르도 없다. 차는 단양을 떠나 제천으로 향했다. 왼쪽 언덕 위로는 눈꽃열차가 환한 불빛을 차창 밖으로 토하며 능선을 돌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아내는 집에 도착하여 한 바퀴 도니 속이 후련하다고 말했다. 저 사람에게도 뭔가의 응어리가 가슴에 고여 있었는가, 나는 다음 여행지로 지리산을 약속했다.

2012. 이월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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