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작가들

옥따비오 빠스

미송 2012. 7. 20. 17:33

새벽 

 

차갑고 날렵한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베일을 벗긴다

난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도 생생한 상처의 한가운데

 

 

감촉

 

내 두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 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무수한 육체들을 벗긴다

내 두 손은

네 몸에서 또 다른 육신을 창조한다

 

 

마이투나*

 

내 두 눈이 너를 벗긴다

벌거숭이로

그리고 너를 덮는다

뜨거운 빗줄기

눈길로

 

소리가 갇힌 새장이 열린다

충만한 아침 새하얀

너의 허벅지보다 새하얀

한밤중에

너의 웃음 아니 오히려

너의 잎사귀

너의 달빛 속옷이

침대에서 뛰쳐오를 때

 

곱게 쏟아지는 달빛

노래하는 소용돌이가

흰 실타래를 감는다

산골짜기에 심은

풍차의 날개

 

나의 낮이 너의 밤에 

폭발한다 너의 외침이

파편이 되어 튄다

밤이 너의 몸을 흐뜨려 버린다

썰물 너의 몸뚱이들이 되모아진다

다시 너의 몸이 탄생한다

 

수직의 시간 가뭄이

거울 달린 바퀴들을 움직이다

칼들의 정원

협잡이 넘치는 축제

그 번뜩이는 눈초리 사이로

너는 들어선다

상처 하나 없이 

내 손의 강물로

 

신열보다 빠르게

너는 어둠 속에서 헤엄친다

너의 그림자가 더욱 밝다

애무 사이에서 

너의 몸뚱이는 더욱 검다

너는 도약한다

예견할 수 없는 강 저편으로

어떻게 언제 그렇게 탄 썰매들

 

너의 웃음이 너의 옷을 불 태운다

너의 웃음이 나의 이마

나의 눈 나의 이성을 적신다

너의 몸뚱이가 너의 그림자를 불 태운다

너는 공포의 그네를 타고서 흔들거린다

너의 어린 시절 공포가

나를 바라본다  

 

벼랑 위에 걸린 너의 눈

둥그렇게 뜬 너의 눈으로부터

사랑의 행위 속

그 높은 벼랑 위에서

너의 육체는 더욱 밝다

 

(중략)

 

네 속에 잠드는 것을 잠재워라

아니면 눈을 뜨든지

너의 한가운데에서

두 눈을 뜬다는 것

까맣고 하얗고 까만 하얀

너의 기억이 불 태우는

불면의 태양이 된다는 것

(그건 너의 기억 속에 나에 대한 기억)

 

(하략)

 

*Maithuna ; 탄드라교나 불교 성전의 벽에 새겨진 남녀상.

 

 

 

▲ 김정수    

 

 

옥따비오 빠스의 詩論

- 시는 무엇을 명명命名하는가?

 

시작활동詩作活動은 본질적으로 언어활동을 목적으로 삼는다. 자신의 신념과 확신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시인은 말이 지시하는 대상보다는 말 자체를 명명한다. 나는 시적 우주가 의미개념significado을 필요로 한다거나 의미sentido의 가장자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시에 있어서의 의미란 말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의미란 말이 나타내는 것이며 언어활동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시인의 체험은 다른 무엇보다도 구어적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기를 원하다면 모든 경험은 시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구어적인 멜로디를 획득한다. 고대의 시인들은 말의 가치를 지각함에 있어서 현대 시인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다. (중략)

 

시는 대상 혹은 외부에 대한 언급을 갖지 않는다. 하나의 말에 대한 언급은 다른 말이다. 시의 의미화signification에 관한 문제는 거의 해명되지 않고 있지만 의미는 시 바깥이 아니라 자체 속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곧 말들이 지칭하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들 사이에서 이야기 되는 속에 있다. (중략)

 

그녀가 돌아왔다 !

무엇이 ? 영원함이.

태양과 같이

떠나 버렸던 바다였다.

 

현대시의 난해함은 그 복잡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 랭보의 경우는 공고라나 던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 신비주의와 사랑과 같은 완전한 인도(완벽한 세심함도 곁들여)를 요구하는 데서 나온다. 만약 어휘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 난해함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질서인 것이다. 현대시는 - 철학적 고찰의 경우처럼 어느 정도 잠정적일 수도 있지만- 외부세계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는 어떤 체험에 대해 다룬다. 한꺼번에 이것을 말하기 위해 현대시는 모든 의미과정을 철폐한다. 그건 시 자체가 삶과 인간에 대한 마지막 의미개념으로 현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언어활동의 파괴인 동시에 창조인 것이다. 어휘들과 의미개념들의 피괴이며 침묵의 세계이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말을 찾고 있는 어휘이다. 이러한 광기앞에 어깨를 움츠리는 사람들도 적지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고독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1세기 이전부터 가장 고귀한 자들과 일찍이 보지 못했던 부를 지닌 부유한 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분별없는 기획에 전생애를 바치는 데 주저하지 않아 왔던 것이다.

 

 

 

너는 말없이, 살그머니 온다

그리고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무서운 고뇌를 불러들인다

손에 닿는 대로 불붙이고

사물마다 시커먼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이 물러서서, 불속에 집어 넣은 무쇠처럼

허물어져 녹아내린다

허물어진 내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로 일어선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침묵의 널찍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해 선

고독한 투사다

 

중략

 

너의 정신은 어떤 형태의 삶도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의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군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차로 커지고 너의 목마름이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정열의 칼 끝에

항복 않는 무리 모두를 추방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화신이여

지하의 목마름, 광기여,

 

중략

 

계속하라 승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단지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또한 나의 입, 나의 혀도

단지 네 존재를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

너의 내밀한 음절들, 닿을 수 없는

흉악한 말이

나의 영혼의 실체다

 

너는 단지 하나의 꿈

그러나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는 말없는 세상이 너의 말로 말문을 연다

너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나는

삶의 지평선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핏줄기는

사랑에 취해 버린 잔인한 입술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술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에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사들일 욕망에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타협한다

세상은 아무런 형태로도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 나를 데려다 주오

꿈속으로 나를 데려다 주어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해주오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인해 나를 찾게 해주오.

 

 

 

옥따비오 빠스 詩論

-이미지

 

시는 반대요소들의 역동적이고도 필요한 공존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최후의 자기주체를 역설한다. 또한 이런 조정은 각각의 요소에 대한 독창성의 축소나 변형을 의미하지 않는데, 오늘날까지 서구사상이 도약하거나 내면화되기를 거부해 왔던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이후부터 이 세계는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너무나도 분명한 구분이 지어졌다.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이런 최초의 뿌리뽑음-왜냐하면 이것은 근원적인 혼돈으로부터 존재를 뽑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에-이 우리 사고의 토대를 구성한다. 이 개념 위에 밝고도 명백한 사상들의 건물이 지어져 서양 역사를 가능케 했던 반면에, 그런 원칙들이 아닌 실로 존재를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에 위법의 판결을 내려왔던 것이다. 신비주의와 시는 이렇게 보조적이며 축소된 비밀스런 삶을 살아왔다. 쓰라린 박해는 줄곧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시 추방의 결과는 나날이 더욱 뚜렷하고 아연실색케 한다. 인간은 우주의 흐름과 그 자신으로부터 추방된 존재이다. (중략)

 

동양사상은 다른 것, 곧 실재하면서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혐오를 저지르지 않았다. 서양은 이것 아니면 저것인 세계이지만, 동양은 이것과 저것 심지어는 이것이 저것인 세계이다. 이미 아주 오랜 시절에 우파니샤드는 상반요소들에 대한 자기주체의 법칙을 어김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중략)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불교철학자들과 힌두교의 경전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추구해 온 사색의 주체인 것이다. 도교도 동일한 경향을 보여준다. 도교의 모든 교리는 동시에 진행되는 이것과 저것 사이의 대립이 상대적이며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일순간 우리에게 배척된 듯 보였던 요소들 사이의 적대감이 중단되기도 한다. 

 

현대적인 사색에 관해 진술할 때처럼 장자(莊子)는 상반요소들의 기능과 상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저것의 작용 속에서 실재한다. 그것이 곧 이것과 저것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교리이다. 삶은 죽음 앞에서의 삶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긍정은 부정앞에서의 긍정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똑같다. 그 결과 만일 무엇인가가 이것에 의존하면 저것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의 긍정과 부정을 갖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이것과 저것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참진리는 이것과 저것을 뿌리치고 도(道)를 도피하는 것이다. (중략)

 

교리는 침묵 속으로 용해된다. 도道는 정의할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 (이름이 붙여진 존재일 수 있는 도는 절대적인 도가 아니다. 발음되어질 수 있는 이름은 절대적인 이름이 아니다.)  장자는 언어란 그 속성상 절대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그 어려움은 상징적인 논리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애태우게 하는 것과 조금은 닮아 있다고 단언한다 ; (도는 정의된 존재일 수 없다....인식하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자는 말없이 교리를 설교한다.) 의미는 사물을 겨누고 표시하기는 하지만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물체는 말에서 멀리 떠나 있다.

 

 

 

말, 정확한 소리

하지만 틀린 말

어둡게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빛인 것

빛이면서 칼인 것,

사랑스럽게 살아 있는 칼

이제 칼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보드라운 손, 과실

 

나를 자극하는 불길

조용한 잔인의 눈동자

현기증의 극점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싸늘한 빛살이

나의 심연을 꿰뚫는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도망하는 투명한 실체들

분주한 움직임에 내 발길을 건넨다

 

이제는 나를 벗어난 말 하지만 나의 말

나의 죽음 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없는, 가여운 내 육신의 자취

나의 어두운 눈물 어린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

 

말, 한 마디 말, 버림받고

웃으며, 순수한, 자유로운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사방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한 마디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무덤인 것. 

 

 

 

 

옥따비오 빠스

1914년 멕시코시티에서 스페인계 어머니와 법률가인 아메리카인디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

17세에 첫번째 시집을 냈고, 멕시코국립대학에 입학, 법학을 전공하면서도 시와 에세이를 왕성하게 발표했다.

1945년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968년 학생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것에 항의,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詩作에 전념하고 있다.

시집으로 <야생의 달>(1933), <돌과 꽃 사이로>(1941), <세계의 기슭에서>(1942), <말 아래서의 자유>(1949>

<태양의 돌>(1958>, <격렬한 계절>(1958), <불도마뱀>(1962), <완전한 바람>(1965), <공백>(1967), <동쪽 산기슭>(1969)

<선회>(1976),

산문집으로 <침묵의 미로>(1950), <활과 칠현금>(1956), <십자로>(1965), <교류>(1967), <결합과 해체>(1969)가 있다.

 

 

마지막 새벽

 

네 머리칼이 숲으로 사라진다

네 발이 내 발을 만진다

자고 있으면 너는 밤보다 더욱 크고

하지만 네 꿈은 이 방에 가득 찬다

그렇게도 작으면서 그렇게도 커다란 우리 !

바깥에 택시 한 대가 지나간다

도깨비들을 한 짐 가득 싣고

흘러가는 강물은 항상

다시금 돌아온다

내일은 다른 날이 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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