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詩를 달다

미송 2012. 6. 2. 21:02

 

 

달다

 

 

 

 

“여자 가슴에 못 박아 득 될 일이 없느니라.” 내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랫방에 세 들어 살던 외할머니 친구께서 평소의 폼대로 넋두리처럼 내뱉은 말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남편들을 향한 이 말은 무릇, 마누라 가슴에 설움 박아 득 될 일이 없다는 뜻이라,

 

삼십 대는 얼른 퇴근해서 애를 안 보면 이혼이요, 사십대는 소파에 늘어져 재떨이 가져오라면 이혼이고, 오십대는 허락 없이 티비 채널을 바꾸면 이혼이고, 육십 대는 눈치 없이 살 붙여 들어오면 이혼이며, 칠십 대는 죽지 않아서 이혼이라, 요즈음에는 꼬부라져 기운이 다 떨어진 할아버지들이 법정에 끌려나와 소싯적 기운 팔팔할 적, 아내에게 저지른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생각도 전혀 나지 않는 “여자 가슴에 못 박는 일”,

 

그러니깐 저 할망구가 기억력도 좋다. 어찌 삼십 년 전, 사십 년 전의 일을 날짜까지 싹 기억해 내, 다른 여자하고 놀아났다는 둥, 손찌검을 해서 눈가장자리가 퍼렇게 물들었다는 둥, 돈이 생기면 꽁지도 안 보이고 없어졌다가 돈 떨어지면 꼭 집에 기어들어와 밥 차려오라는 둥, 반찬이 왜 요것뿐이냐는 둥, 타박을 해대다가 불쌍한 애들만 쥐 잡듯이 잡았다는 둥, 마치 밤마다 일기장에 맺힌 한을 조목조목 날짜별로 섬세하게 박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법정에서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 나열한 후, “판사님, 저 할아범하고는 죽어도 못 사니 제발 이혼 좀 하게 해 주세요.”,

 

판사께서 처연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힐끗힐끗 내려다보다가 달래는 말투로, “할머니, 그 말씀은 잘 알겠지만 할머님 연세도 구십을 훨씬 넘겼는데, 얼마 남지도 않은 여생을 그냥 함께 사시면......” 그러자 절대 양보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할머니께서 왈, “구십이 넘은 나이니깐 이혼하자는 말이요. 전에는 애새끼들 때문에 갈라서지 못했지만, 이제 애들이 다들 늙어 저승으로 몽땅 가버렸으니, 하는 말이오.” 염라대왕도 아닌 새파란 젊은 판사 앞에서 눈시울을 석양처럼 물들인 요즈음의 할아버지들, 이것을 보고 소위 황혼이혼 당했다고 일컫는데, 다 “여자 가슴에 못 박은” 결과이니 외할머니던가, 외할머니 친구이던가, 그 분의 말씀이 백번 옳고 옳아,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연등에 붙어 나부끼는 불쌍한 중생들의 염원, 깃털 빠진 남편들의 절규가 “여보-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라던가?

 

가끔 말썽부리는 이놈의 긴 허리, 앉았다 일어서면 쭉 펴기가 뻐근하고 버거워 두 손을 지렛대처럼 허리춤에 붙여 겨우 선 자세를 유지하기 며칠 째인데, 그 아픈 허리와 사월초파일이 낀 연휴가 겹쳐버렸으니, “우리 지리산에 안 가요?” 이것이 스치듯 날아든 아내의 말이었다. 물론 이 말의 불씨는 언제 한 번 지리산에 놀러가자고 뜬금없이 던졌던 내게 있었다. 여자란 자기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을 틀림없이 기억하는 재주가 뛰어난지라, 에구, 내가 주둥이를 잘못 놀렸었구나 하는 후회에도 불구하고 이미 때가 늦은 일이었다.

허리가 아파요, 다음에 기회를 내봅시다, 하고 꿍쳐 넘어가기는 삼일이라는 연휴가 좀 지루한 것도 같고, 저렇게 명석하고 낱낱이 기억하는데 아예 여자 가슴에 못 박히기 ‘전!’, 자질구레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섭섭함이라도 모아지면 그게 바로 ‘못!’이 되고 ‘설움!’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알아서 그놈의 복잡한 여자 가슴 싹 비워내고 깨끗하게 청소해 두어 화근을 방지하는 일이 미래를 위해 중요한지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합시다.”하고 저녁 늦게 퇴근한 아내에게 말했다. 그러자 배시시 웃는 얼굴, 벌어지는 입술에서 튀어나온 아내의 당돌함, “지금 떠납시다. 내일까지 기다릴 일이 뭐 있어요?” 이렇게 해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나의 야간운전이 시작된 것이다.

 

열심히 달렸다. 뻐근한 허리를 의자에 푹 파묻고 발끝만 까딱여 여자의 기분을 업업(upup), 훨훨 날게 만들면 된다. 차는 벌써 충청도를 지나 경상북도로 들어섰다. 대구를 지나서 고령 쪽을 향해 88도로로 꺾어지니, 무슨 놈의 고속도로가 이 꼴인가, 왕복 2차선에 중앙분리대도 없고 바닥이 걸레처럼 헤지고 패어져 글자 그대로 차가 88튀니, 등골이 긴장되고 시야가 피곤하기 이루 말할 수도 없는데, 아내는 쿨쿨, 가끔 별안간 생각난 듯이 눈을 거슴츠레 뜨고는 “여기가 어디에요?” 말해줘 봐야 뭐 아나? 지도감각이란 전혀 없는 사람이라서, 자동차를 돌려 세우기만 해도 길을 잃어버리는 여자요, 놀랍기도 해라, 닦아온 지식의 균형이 제대로 맞지를 않아, 안동이 전라도에 붙은 줄 알고, 휴전선 넘어 평양을 지나 북으로 쭉 올라가면 그곳이 개성이냐고, 그래서 아이고, 런던에 잉글랜드가 있고 워싱턴의 수도가 뉴욕이라우, 그렇게 내가 놀려대기도 했지만 곧이곧대로 자기가 살아온 고장만 아는 소박한 여자라, 이쯤 되면 나는 엄청난 지식을 지닌 훌륭한 남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새벽 한 시쯤 차는 지리산을 저 앞에 둔 함양으로 접어들었다. 여관을 찾기에는 그곳의 시설이 좀 후진 것도 같고, 모텔로 들어서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불륜이 아닌 심심한 사이인지라, 돈 적게 들이고 간단하게 눈 붙일 수 있는 곳, 찜질방이라는 간판 아래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발을 디미니, 역시 혈기와 오기의 경상도인지라, 늦은 시간에도 현관이 시끌벅적하여 경찰관 서너 명이서 길길이 날뛰는 험상궂은 사내를 한 명 둘러싼 채 쩔쩔매고 있었다. 술이 꼭지까지 차올라 돌아버린 사내와 찜질방 종업원간에 시비가 붙었던 모양이었다. “정 이러시면 공무집행 방해로 체포하겠습니다.” 되풀이되는 경찰관의 으름장과 함께 사내가 옥신각신 밖으로 떠밀려 나가자, 이내 주위는 파장 후의 장터처럼 고요해지고, 여자는 1층 여탕으로 남자는 3층 남탕으로, 잠시 후 2층 찜질방에서 만납시다. 그렇게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내가 너무 다정했나? 좀 닭살이 돋는 기분이다.

 

함양의 아침, 햇살이 산 능선을 비껴내려 발아래 대각선을 긋자, 산골의 청명한 기운이 한꺼번에 몰려와 기분이 상쾌해지고 얼굴빛이 환해진다. 이것이 명산의 특징이다. 수행자 곁에만 있어도 마음이 정갈해지고 좋은 사람을 보면 그 표정만으로 가슴이 훈훈해지려니 향을 감쌌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게 마련이다. 뺨을 산기운에 부비고 초여름의 신록을 향해 몸을 흔들어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길을 멀리 던지니, 저기가 바로 머물러만 있어도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이란다.

 

금강산이 기암괴석을 세워 올린 수려한 여인이라면 지리산은 행여 자식이 다칠세라 날카로운 기암괴석을 불허하여 둥글고 넓고 포근한 흙으로 쌓아올린 어머니와 같은 산, 온통 꽃으로 능선을 뒤덮어 조금도 자식들을 지루하지 않게 배려하는 산, 그러나 어머니라는 이름은 늘 슬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뒤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따라 나왔으니, 자고로 마누라 앞에서의 엄숙한 표정은 어울리지도 않고 매력도 없는 법, 햇살을 끌어당겨 얼굴에 살짝 바른 후, 두리번두리번 아침 식사를 할 장소를 찾다가, 지나던 오십 중후반의 여자를 불러 세워, “혹시 아침 식사를 잘 해주는 식당을 아시면......”하고 말을 건넸는데,

 

이분이 정말 경상도 아지매가 분명한지라 그 언성이 천정까지 올라붙어, “식당예? 조기 행재식당이 잘해예.” 그래서 나는 ‘행재’가 뭔가 하다가 아마 장사꾼다운 ‘횡재’를 말하는 거겠지 하고는 어디냐고 재차 물었는데, 아지매가 투박한 손가락을 쭉 앞으로 뽑아 가리키며 답답한 듯이 “조기조기 행재식당예.”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 모양새라서 나는 잡아먹힐까봐 겁이 털컥 나. 가리키는 스님의 손가락을 따지기보다는 달을 보듯이 손가락과 시선을 똑바로 맞춰 일직선으로 쭉 큰길까지 정신 차려 훑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횡재식당’으로 추측되었던 식당 간판이 ‘형제식당’이라, 아하, 타향은 이렇게 색다른 말투로부터 오는가보다. 행재건 횡재건 형제건, 식당에 들어서서 맑고 뜨거운 콩나물국에 청양고추 다대기와 새우젓으로 간을 맞춰 첫 술을 뜨니, 진정 칼칼하고 속까지 뚫어 내리는 시원한 맛이란, 야단치던 경상도 아지매는 진국이었다. 독자는 함양군내의 사우나찜질방 앞에 위치한 “형제식당”을 기억할지어다.

 

 

                             노고단 입구 성삼재에서 내려다본 지리산의 모습

 

 

함양을 출발하여 십오 분 쯤 남원 쪽으로 달리자 지리산 입구랄 수 있는 인월면이었고, 좌회전하여 오 분 쯤 가니 산내면이 나왔다. 여기서 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목적지인 노고단 바로 아래의 성삼재를 향해 우측으로 핸들을 틀었지만 내 얼굴은 문득 좌측으로 뻗어 올라간 마천면 쪽을 향해 있었다. 살다보면 가끔은 예상치 못한 기괴한 사람을 만나고 그 기억이 평생을 가는 수도 있다. 물론 만남의 순간이 짧아도 말이다. 마천면에서 우측으로 뻗은 산길을 따라 오르면 지리산을 넘어가는 벽소령을 만난다.

1980년 5.18 광주사태 몇 달 후 8월 중순, 나는 산악회원들과 함께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약 30Km의 능선을 종주하고 있었다. 임걸령에서 1박하고 노루목 삼도봉 토끼봉 형제봉을 지나 벽소령에 닿으니 폭우와 함께 시야를 가로막은 짙은 안개 때문에 더 이상 행군할 수가 없었다. 벽소령 샘터 부근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준비하는데, 뿌연 안개 속에서 오십 전후로 뵈는 어떤 부인이 유령처럼 몸을 드러내 내게 다가왔다. 우비도 걸치지 않은 채 위는 얇은 스웨터 하나였고 아래는 소위 말하는 회색 몸빼바지 차림이었는데, 이런 산중에서 그런 차림과 마주친다는 것은 놀람 그 자체였다. 폭우에 끊임없이 체온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날이 어두워지면 더욱 기온이 내려가기에 아무리 여름 날씨라고 해도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런 차림으로 지리산을 넘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신고 있는 신발은 하얀 고무신이었다. 사실 그 여자는 미쳤었는지도 몰랐다.

 

문득 다가온 여자는 낮은 목소리지만 봇물 터지듯,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말을 마구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광주사태에 관한 것이었고 자기의 남편이 신문기자인데, 얼마 전 보안사에서 나왔다는 군인들이 새벽에 남편을 붙잡아 갔다는 말이었다. 흡사 여인은 비극적 역사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여인은 집을 도망쳐 나왔고 지금 지리산을 넘어 진주의 친척집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그 썩어빠질 신문사나 방송국의 기만적이고 왜곡된 보도로 인하여 광주에서 어떤 일이 터졌는지 정확히 알지를 못했다. 소위 말하는 유언비어를 통하여 광주에 투입된 특수부대원들이 거리의 사람들을 마구 곤봉으로 난타해 집으로 몰아넣었고, 창문 밖으로 머리를 드러내놓지 못하게 도시 전체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후, 가가호호 수색하여 젊은 사람들을 쥐 잡듯 색출해 끌어냈다는 사실,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 그리고 전남 도청건물 안으로 도망친 시민들에게 우리의 국군 그 저격수들이 마음먹고 정조준 사격을 가해, 부지기수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갔다는 단편적이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뿐이었다. 여인은 무자비한 권력으로부터 쫓기는 게 분명했고 나는 당황했다.

 

내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무력한 인간인가를 이때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혹시 우비가 필요하십니까? 저녁은 드셨습니까? 뭣 좀 드릴 테니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이런 날씨에 하산한다는 일은 매우 위험하니 텐트 한 구석에서 좀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 가시면 어떤지? 여인은 모든 것을 거절했다. 여인에게는 오직 자기가 조급하게 말하는 진실의 내막을 알아달라는 눈빛뿐이었다. 잠시 후 여인은 안개와 어둠이 뒤섞인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돌렸다.

 

사라지던 뒷모습, 나는 그 뒤에 대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독일의 어느 방송국에서 방영한 5.18 광주실상을 비디오로 볼 수 있었다. 여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여인은 과연 무사히 하산했을까, 혹시 길을 잃어 숲속에 갇힌 채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까, 적극적으로 여인을 붙잡아 다음날 우비라도 입혀서 보내지 않았던 나의 행동, 여인의 진실되고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 하나로 모든 말을 다 믿었어야 했는데.

 

세월은 흘러 1987년, 남영동 분실에서 형사가 책상을 탕 하고 주먹으로 내리치니 그 앞에 섰던 대학생이 억하고는 쓰러져 죽었다는, 해괴하고도 망측한 일이 벌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전국은 군부독재의 잔인한 횡포에 분노의 도가니로 끓어올랐고 사람들은 명동성당으로 행진했다. 당시 삼십대 후반의 나 같은 사람들을 일컬어 넥타이부대라고 했던가, 로마병정처럼 도열한 경찰들과 대치한 최전방의 대학생들이 화염병을 들고 치달리면 최루탄이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여기저기로 날아들고, 뒤를 이어 짱돌이 날아가고 경찰들의 군홧발 소리가 달려오고 그 사이로 백골단이라는 경찰폭력대들이 곤봉을 마구 휘둘러 닥치는 대로 시민들을 까고 부수고,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고,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흩어져 도망치고, 잠시 후에 다시 몰려들어 함성을 지르고, 분노한 우리들에게는 군번도 소속도 없었다.

 

나는 머리를 또 흔들었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게 다 20여 년 전, 30여 년 전의 일이다. 성삼재에서 내려 노고단을 바라보니 산천은 그대로인데 홀로 흘러가는 강물인양 내 귀밑머리만 허옇고 허리는 구부정하여 어머니여, 포근한 지리산이여, 30키로 씩이나 나가는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씩씩 오르던 내 싱싱했던 장딴지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나뭇가지 사이를 토끼처럼 재빠르게 비껴 달리던 날렵한 몸짓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가파르지도 않은 노고단 길에 나는 몇 번 씩이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턱에 차오른 숨을 가삐 몰아쉬어야 했다. 나도 써금써금 낡을 대로 낡았나보다.

 

삼삼오오 저기 가는 경상도 아지매들, 높은 톤의 사투리로 쉼 없이 재잘대며 앞질러 가는 아지매들이 너무도 활기가 넘쳐, 저 아지매들은 지치지도 않나? 비척비척 걸음을 겨우 옮기다보면 또 한 무더기의 경상도 아지매들이 왁자지껄 뒤로 다가와 왁자지껄 앞질러 가니, 이랬노, 저랬노? 그럴낀가, 말낀가? 빨리 가뿌자, 알았다카노, 이른 아침 조깅 하듯이 팔꿈치를 가슴 위까지 번쩍번쩍 치켜 흔들어 스치는 아지매들이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배알이 뒤틀려 올라, 나도 사투리에 묻혀 한 마디 던지고 싶다. 앗따 시끄럽다카이.

 

남들은 2시간 안팎이면 오르내리는 노고단이지만 내게는 3시간은 흡족히 걸렸으리라. 후들대는 무릎을 꺾어 차에 올라 구례로 향했다. 남쪽으로 직진하면 여수엑스포 박람회장이지만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돈도 많이 들 듯도 하고, 마누라도 그다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라 하동으로 차머리를 돌리니, 우측으로 섬진강 은모래가 반짝반짝 고운 모습을 드러내 푸른 강물과 잘 어울려 부부의 자태로 누웠고 화개장터는 텅 빈 터라, 이곳에는 가락조개를 잡아 끓인 제첩국과 참게가 유명하다지, 하동 시내에 들어서 제첩국이라고 써 붙인 기사식당에 차를 대니 마침 임시휴일이라나, 조금만 더 가면 또 식당이 나오겠지, 그러겠지, 하고 슬슬 차를 몰다보니 어느덧 나는 진주로 향하는 국도에 올라서 있었고, 그곳에서부터는 식당 간판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라, 차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던 나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속으로 가늠해 둔 통영까지 달리자. 해산물이 풍부하고 싱싱하다는데, 그리고 나의 조상, 내 할아버지는 통영에서 대대로 살아왔다던데, 나는 생전 처음으로 조상의 땅을 밟는 셈이었으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나의 몇 대조일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거슬러 조선 초까지 오르면, 우리 집안 DNA에는 왜구를 무찔러 큰 공을 세우고 벼슬까지 한 할아버지가 계셨다는데,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니 그 할아버지를 높은 벼슬에 임명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왕과 대신들이 청담을 나누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엄청 술고래였을 뿐만 아니라 취했다 하면 횡설수설 쓸데없는 말이 많고 여색을 얼마나 탐했는지, 성을 쌓고 변방을 지키러 돌아다니는 곳곳마다에 첩을 들여 희희낙락했다나, 그러니깐 주색이 허물이 되어 벼슬자리를 놓칠 뻔도 했는데, 후대의 후대를 몇 십번 거슬려 내려와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입장에서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술이야 그렇다 쳐도 피임도 모르던 그 시절에 사랑과 이별의 도사였던 할아버지께서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뿌린 자식도 적지 않을 터, 도대체 몇 십 몇 백 명이나 되었는지 그게 바로 궁금하였어라.

 

“항구로 가는 길이 어디죠?” 도로가 온통 주차장으로 변한 통영 시내에서 택시기사에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께서는 내 물음에 눈길도 안 돌린 채 고개를 도리도리해 버렸으니, 좁은 이 바닥에서 택시운전을 해서 먹고 사는 양반이 제 동네 항구를 모르다니, 이것이 내 조상의 고향에 도착해서 처음 받은 대접이었고, 정체되어 차들이 빼곡한 틈에도 불쑥불쑥 차대가리를 앞으로 디밀어 서로 먼저 가겠다고 아우성이었으니, 아내는 깜짝깜짝 놀라 입을 딱딱 벌리고 말았다.

 

“갱상도 남쪽은 다 이러느니라.” 나는 익히 이런 일을 경험해본지라, 나도 경남운전자들처럼 앗쌀하게 차머리를 무조건 틈새로 들이박고 험악했던 상대가 신기하게도 슬글슬금 옆으로 비켜주고 그럭저럭 차량들이 제 길을 찾아가고, 연휴를 맞이해 통영은 외부에서 진입한 행락차량에 온통 점령당하는 중이었다. 조금 전 도리질을 쳤던 운전기사의 피곤한 표정은 이를 말하고 있던 것이었다. 겨우 항구에 도착해 기웃거려 보니 횟집이란 횟집은 사람들로 바글대고 일찍 잠자리를 잡으려고 모텔이나 여관에 찾아드니 다 만원사례라서 도대체 서 있을 곳도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아, 사람들 틈에 하릴없이 끼어 낯선 항구의 황망함인데 저쪽에서는 또 경찰관과 술 취한 사람과의 시빗거리니, 목청 높고 억양 드세고 행동거지가 예측할 수 없는 주변풍경에 아내는 그만 이 동네가 너무 무섭다고 중얼 댔다.

 

사람 사는 동네란 다 이러려니, 그래도 고픈 배는 채워야 되지 않겠는가, 조상의 고향이건 뭐건 얼른얼른 저녁이나 해결하고 줄행랑을 놔야겠다. 겨우 찾아든 곳이 바로 충무김밥, 서울에서는 꼬마김밥이라고 일컫는데 이 고장이 원래 충무김밥으로 유명한지, 쪼르르 김밥집이 늘어섰고 그 중에 “뚱뚱이할매 충무김밥”집에 들어서자 여기서도 목청이 왈왈왈 떠다녀, 손님과 주인이 손짓발짓해가며 다투는 중이었다.

 

나그네는 밤마다 고향에 간다. 꿈길 따라서 말이다. 통영을 빙 돌아 잠자리를 찾았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나는 부근의 군소재지 고흥으로 향했고 예상대로 이곳은 행락객들이 전혀 없어 거리가 한적하기만 한데, 모텔에 찾아드니 저녁 9시경에도 불구하고 방이 다 찼다나, 그것참 이 동네 사람들은 일찍도 잠자리에 드는구나 하고는 외곽을 돌아 어느 모텔에 또 들렸더니, 칸칸이 굴속처럼 주차시설을 만들어 놓은 천막 안에는 자동차들이 꽉 차 들어앉아 이게 참 묘한 풍경이라, 나는 모텔 정문을 들어서기 바쁘게 손사래 치는 종업원에게 딱지를 맞아 돌아섰고, 그 순간 여관이나 모텔이 밤 9시 경이면 다 차버리고, 자정을 넘으면 방이 빈다는 해괴함은 다름 아닌, 전국적으로 지금은 그 무엇을 즐기는 시간, 아마 애들 눈이 무서워 마누라를 밖으로 불러내 잠시 이곳에 들어와 바디레크레이션을 치루는 모양이지? 아하, 바로 그 시간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처량한 꼴로 다시 진주로 차를 몰았고 아내는 역시 쿨쿨, 그렇게 삼십 분 정도 가다보니 길가에 또 하나의 고독한 모텔이 서있어, 그다지 큰 기대도 않고 들어서서 물어보니, “예, 방이 있어예. 딱 두 개 남았는데, 호호” 육십 대 여주인이 카운터 조그만 창구로 눈과 코와 입을 한꺼번에 모아 삐끗 내밀어 나를 반겼다. 샤워를 하고 방금 누가 엎치락뒤치락 바디레크레이션을 즐겼다가 떠났을 법한 침대에 누워 뉴스라도 볼까, 티비를 켜니 웬 일본방송만 나오는데, 이게 다 쎅쎅 포르노라서, 다른 방송은 아예 잡히지도 않게 채널을 고정시켜 놨으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도 저것들처럼 저렇게, 기분을 좀 삼삼하게 하여, 그런 폼으로 어찌어찌, 해..... 볼까나? 어서 자라고 옆구리를 밀쳐내는 아내에게 손을 뻗었지만 파도처럼 엄습한 피곤함과 졸음, 나도 좀 저것들처럼 바디레크레이션 대회에 참가를 해야 하겠는데, 모텔비가 아까워서라도 꼭 해야 되겠는데, 생각만 가물가물, 마누라가 어디 있지? 어디 있지? 그렇게 곯아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진주성 정문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남강의 논개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먼 친척 할아버지의 독상에 올려 진 털게를 생각했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경기도 파주 부근의 외가댁에 놀러갔던 나는 개울에서 털이 복슬복슬한 커다란 게를 한 마리 잡았고, 이것이 할아버지의 밥상에 올려 진 것이었다. 물론 나는 집게발 하나도 빨지 못했지만 쩍쩍 입맛을 다셔가며 맛있게 그리고 혼자서 속살을 파 드시던 할아버지의 입술, 기껏 내가 잡은 털게를 다 드시고는 어허, 살이 통통하게 들어차 먹을 만 허구먼, 하고는 헛기침을 하셨는데, 그게 얼마나 얄밉고 분했던지, 그 후 남강의 논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털게를 떠올리며 진주 남강 부근의 논에서 사는 ‘논게’라는 게 있구나. 언젠가는 내려가서 혼자 잡아먹어야지, 그런 다짐을 했던 기억이다.

 

 

                                진주성 촉석루에서 내려다본 남강

 

 

 

진주 남강, 그리고 논개의 전설. 아침 일찍 진주성에 도착하니 마침 ‘진주 논개제’ 행사기간이었다. 오래 전에 들렸을 때는 성루 아래로 풀숲이 우거지고 촉석루가 덩그러니 버려진 형상이었는데, 지방자치가 시행된 이후로 잘 가꾸어지고 다듬어져 자못 임진왜란 당시의 옛 위용이 드러나는 듯 했다.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논개에 대해 새삼 논할 일은 없겠지만, 촉석루 아래에 전시된 하나의 그림이 유독 눈에 띠었으니, 바로 논개가 품에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다는 왜장 게야무라 로스쿠케(毛谷村六助)의 초상화였다. 조선 초에 왜구를 물리쳤다는 우리 할아버지와 임진왜란 때에 철포부대를 이끌고 조선 땅에서 무공을 날린 왜장 로스쿠케를 같이 붙여 놓으면 누가 이길까?

 

칼싸움이야 끝까지 가봐야 알겠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기는 서로 막상막하일 것도 같지만, 적어도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여자에게 머리채 휘여 잡혀 물귀신이 되지는 않았으니, 주색에서는 로스쿠케가 한 수 위일 듯도 싶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로스쿠케는 진주성을 함락한 후, 조선 기생들을 모두 모아 놓고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였는데 기생 중에 논개의 용모가 으뜸이었는지, 제 눈에 안경이라고 죽을 자리를 제대로 찾아들어 쥐약 발라진 논개를 콕 찍어 파트너로 삼았는지 모르지만, 술이 머리꼭지까지 차올라 욧시 욧시, 하며 논개를 끌어안고 헤롱대다가, 논개의 봄바람 살랑 넘치는 눈웃음과 찡긋하는 엷은 메시지에, 뭐라고? 저기 언덕 아래 남강의 너럭바위라고? 넓으냐? 둘이 누워 마땅하더냐? 그렇게 논개에게 유혹 당하여 손잡고 룸싸롱 뒷문으로 총총 사라지듯이 촉석루 아래 조그만 문을 고개 숙여 통과하여 남강에 이른 즉, 글쎄다.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오욧, 쏘데스카, 2차? 남아의 호기를 부려 시원한 강바람 속에서 회포를 풀어 보겠쓰므니다. 그렇게 홍알대다가 품을 파고든 논개의 팔에 휘감겨 퐁당 했으니, 그 양반도 참 못 말리는 한량이긴 했던 모양이다.

 

사실 로스쿠케가 논개에게 당했는지는 검증된 바가 없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로스쿠케는 농부출신의 사무라이로서 조선정벌의 정예부대를 이끈 카토 키요마사의 부장이었고, 그 인물에 대한 기록이 진주성 싸움으로 끝나기에 논개에 의해 수장되었다는 추론만 가능할 뿐이다. 어찌되었든 지금도 남강은 흘러, 논개의 지조와 절개도 전설이 되어 흘러, 우리는 그녀의 넋을 기려 이렇게 의기(義妓)가 강물에 몸을 던진 날,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에 모여든 것이다.

 

논개 / 고 은

 

살보살에게도 나라 있나니

나라 앞에서

나라 보살 되었나니

의병 3천의 일 해내었나니

남강 흘러

 

 

                               욧시 욧시 하시던 이분, 누군지 아시죠?

 

 

지리산 내륙을 따라 북으로 방향을 잡으니 진주에서 산청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에 대선사의 발자취라, 승복자락에 반야(般若)가 휘날려 수미산을 이뤘는가, 몸속에 쌓이고 쌓인 탐욕의 독을, 커져만 가는 업장을 씻어 내고 녹여 버리려 약초가 무수하고 물이 맑은 고장을 기어이 윤회의 마침표로 삼아 이곳에서 태어났는가, 청정골 산청은 대선사 성철스님의 고향이다. 읍내로 들어섰다. 초여름 햇살이 벽산을 배경으로 노곤노곤 내려앉아 한낮임에도 거리는 한산하고, 사람들의 발걸음에 서두름이 없어 나도 음료수를 입에 물고 턱 받혀 차창 밖을 내다봐,

 

살고 죽는 것이 저렇듯 한가하거늘, 등짝 떠밀리지도 않고 멱살 붙잡혀 끌려가지도 않고, 그저 삶이란 저절로 나타났다가 저절로 사라지는 잠시의 환영이려니, 아내여, 이런 곳에서 한 번 살아보지 않으련, 명산의 약초 뜯어다가 청정한 샘물에 녹신녹신 다려서, 우리도 천만겁 쌓여온 업장을 씻어내고 녹여버려 고요한 줄 모르게 고요히 살고 사람인 줄 모르게 사람으로 살고 깨달은 줄 모르게 깨달음을 얻어, 저 산처럼 햇볕처럼, 산허리를 돌아가는 선선한 기운처럼 살지 않으련,

 

 

                                      저를 닮은 이런 유물은 아마 세계에서 단 하나 일 듯,

 

 

산청박물관에 차를 대고 하얀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어찌 깨달은 자가 성철스님만일까. 이 깊은 산골은 2만 년 전 까지 거슬러 올라 구석기인들이 머루랑 다래랑 따먹고 간간이 짐승도 붙잡아 누런 이로 귀때기 뜯어먹고 등짝도 깨물어 배가 부르면, 남자는 남자인 줄 모르게, 여자를 여자인 줄 모르고 꽁무니를 쫒아 다니다가, 얼쑤, 자식을 자식인 줄 모르게 옆구리에 꿰차,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가, 신석기시대로 접어들어 사내들은 돌창을 들고 사냥 나가고, 아낙네는 텃밭에 들어앉아 귀리 조 수수에 매달리가다가, 밤이 되면 얼쑤, 또 자식농사를 짓고 열심히 지어 그 자식들이 많아지고 동네가 커져 가야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신라로 고려로 조선으로 대한민국으로 유유히 흘러내려오는 동안에, 이 명산대천에 어찌 깨달음을 얻은 자가 성철스님만일까.

 

그리고 또, 못난 자가 어찌 나 만일까. 나는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단경호’라고 명칭이 붙여진 항아리 앞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런 산골에서 참으로 기묘하다. 어찌 나를 그리도 딱 빼닮았는가. 도기(陶器)란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딱딱하여 그 원형이 유지되어, 천오백 년 이상 땅속에 눌려 묻힌들, 깨지기는 해도 모양이 바뀌지는 않을 터, 나처럼 태생이 원래 저러한 모양이다. 반듯하게 수평을 유지하여 동그란 모양을 갖추어야 할 항아리의 입구가 뭔가에 짓눌렸는지 짧은 목까지 주둥이가 내려앉고, 배는 살찐 여인의 허리처럼 동글동글 불룩하여 사방의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한쪽이 찌그러져 고꾸라질 것 같으니, 항아리는 항아리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유물과는 달리 유독 항아리 같지 않은 항아리라서, 손에 들린 카메라가 다정하고도 저절로 다가가, 찰칵 찰칵, 아이고 내 자식이 이런 산골에 처박혀 있었도다. 못난 아비에 못난 자식, 너는 나의 거울이려니, 국화빵이 내버려져 있었도다. 친근한 눈길로 내려다보니 예뻐지기만 했어라. 못남도 버릴 것 하나 없는 나였어라.

 

 

                                  제 뒤가 바로 산청박물관인데, 많지는 않으나 오리지날 가야 유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늦은 점심 때문에 거창읍에 들리지는 않았으리라. 또한 길을 몰라 비극의 신원리 추모비에 가지 않은 것도 아니리라. 오랜 일이라서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티비에서 6.25동란 때 인민군에게서 낙오된 16살 된 소년병과 우리 국군에게서 낙오된 동갑의 소년병이 산속에서 마주쳐 일어난 일을 드라마로 그렸는데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두 명의 소년병들은 서로가 적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힘을 합쳐 마실 물과 먹을 것을 찾고, 밤이면 바위 아래나 동굴에서 서로 끌어안고 잠을 자며 추위를 달랬다. 천진난만하게 씩 웃어가며 각자의 고향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집안 자랑도 하고, 그렇게 정이 들어서 전쟁을 잊어버리고 붙어 다녔는데, 그 후로의 스토리는 가물가물하지만, 나중에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이 사실을 알고 크게 왈가왈부했다는 기록이다. 내용이야 뻔한 것이라서, 사상교육이 잘못 되었느니 반동분자에게 물들었느니 어쩌고저쩌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흐르는 물이나 스치는 바람에 이데올로기를 갖다 붙이는 엉뚱한 일이라서 역사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크게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니, 1951년 2월, 750여 명의 노약자나 아낙네, 어린애들까지 신원리 계곡에 몰아넣고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우리 국군들이 자동소총을 마구 난사해버린 양민학살사건이, 지리산을 빙 돌아 함양 구례 하동 산청 거창에 이르는 자락에서 벌어진 벼락같은 참극이, 4.3 제주 양민학살사건이,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5.18 광주학살사건이, 그리고 역사에 묻혀버린 크고 작은 다른 양민학살사건이, 그때 흐른 핏물이 아직도 소백산맥 계곡을 적셔 마르지 않아, 남과 북이 가로막혔고 그 핏물에 발을 담그기 두려워서 내 발길은 거창읍내만 서성거려 차마 억울하게 죽어간 넋을 가까이하지 못했으리라.

 

또한 이런 증오의 드라마는 지금도 흘러내려 조정래 작가는 빨치산을 다룬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연재하는 도중에 역시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가족까지 죽이겠다는 협박을 수없이 받았으니, 왜곡된 우리의 역사는 금지된 언어를 만들어냈고 한국 문인들은 이 선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의 유희나 사사로운 감정만의 시연이 아니다. 문학은 당대의 권력자들이 설정하고 그어 놓은 금지어를 뚫고 들어가 뒤틀리고 옥죈 사회에 던지는 시대정신이며 양심의 소리기에, 예부터 글을 쓴 사람은 많았어도 문인(文人)은 드물었던 것이다.

 

읍내를 거닐며 음식점을 찾던 중 아내가 자장면이나 먹자고 하니, 이는 미국의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어느 고장에서나 맛이 거의 비슷한 즉, 특별히 먹고 싶은 것 없고 갈 곳도 없으며 그저 배나 채우려면 가장 좋은 생각이라 중국집에 불쑥 들어섰다. 마침 더운 날씨에 콩국수라. 주방에서 믹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에는 하얀 면에 하얀 콩국물이 가득한 그릇이 앞에 놓였는데, 수저로 국물을 떠 입에 넣으니 고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그 맛의 끝에는 또한 고소함의 바다가 쫙 펼쳐진 기분이라서, 이렇게 고소한 콩국수는 정말 생전처음이라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아내와 눈짓을 해가며 허겁지겁 콩국수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해치우고는 주방과 홀을 오락가락하는 할머니를 불러 콩국수 맛이 왜 이리 좋으냐고 물으니, 할머니가 손수 저 산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만들었다나, 독자는 거창읍내의 거창여자고등학교 입구 맞은편 도로 좌우 50미터를 살펴 ‘동아반점’을 확인하시라. 잠시 미각의 묘미에 죽었다 살아난 내가 맛은 보증하겠다.

 

남으로부터 치받아 문경세제를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가 나온다. 수안보에서부터 구불구불 굽이치는 도로는 월악산국립공원을 통과하여 충주호에 이르고 계속하여 제천 청풍호까지 닿으면 호수와 절경이 어울린 주변의 경관이란 수려하기 이를 데 없어 운전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지르게 된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적당한 계곡에 여장을 푸니 이곳이 바로 송계계곡이다. 내가 도착한 저녁나절에 사람들은 하나 둘씩 텐트를 걷어 철수하기 시작했다. 밤에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 때문이었다.

 

덕분에 냇물을 바로 앞에 둔 언덕에 자리를 잡았고 둘만의 거처를 쫙 펼쳐, 비에 대비하여 차양 막으로 텐트를 또 한 번 감쌌으니 믿음직한 남편이란 자고로 어디에서든지 포근한 보금자리를 썩 마련해 아내를 숲속의 잠자는 공주로 잘 모셔야 한 즉, 손도 발도 바빠져 씻어온 쌀에 적당히 밥물을 채워 버너에 올려놓고, 찌개거리를 앞에 놓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왜 자꾸 아무데나 털썩털썩 주저앉아요?”라는 아내의 날 선 목소리였으니, 즐거운 숲속의 캠핑은 느닷없이 날아든 여자의 타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분이 실쭉하여 “아무데나 앉으면 어때? 어차피 놀러 나온 것인데,” 그렇게 대꾸하자 이에 질 새라, “바지 엉덩이가 더럽잖아요. 좀 가려서 앉지 나이가 몇인데 애들처럼......” 이게 은근히 성질나는 장면이라서, 그저께부터 아픈 허리 곧추 세우고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허리춤이 뻐근해 자꾸 주저앉게 되어서 그런 거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당신 기분 풀어주려고 그런 게 아니야? 안 그래? 이렇게 논리가 형성되어 가면서 성질이 슬며시 가슴팍을 헤집고 돋아나는 순간, 문득 스친 생각이란, 내가 원래 아내와 싸워서 지금까지 이겨본 역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남에게는 몰라도 특히 남편에게 성깔 없는 여자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마는, 내가 여기서 끓어오르는 저항감을 인내하지 못해 한마디 톡 쏴줄라치면, 아내도 역시 발끈 성질머리가 뿌옇게 떠올라 마치 땡비 수천 마리가 머리통에 달려드는 형상이라서 여기 따끔 저기 따끔, 따갑다고 손을 머리위로 마구 휘저어 내쫓아내려면 땡비들은 더욱 웅웅 소리를 내며 기세가 등등해져 사납게 달려들고야 마니, 이럴 때는 아파도 꾹 참고 가만 가만히 돌부처처럼 앉아 있어, 왼쪽 따끔이면 왼쪽 눈썹만 찡긋, 오른쪽 따끔이면 오른쪽 눈썹만 찡긋, 몇 번 쏘인 것이 억울하지만 그래야 땡비들이 웅웅 머리통을 몇 바퀴 돈 후에 재미없다는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목을 외로 꼬고 턱을 삐쭉 앞으로 내민 삭은 표정으로, 감자나 썰고 호박이나 썰고, 파나 썰어 넣고, 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여 “여자 가슴에 못 박아 득 될 일이 없느니라.”는 옛 할머니의 위대한 교훈을 떠올려 측은하려니, 장단을 맞춘 뻐꾸기가 산기슭에서 뻐꾹뻐꾹 처량한 목청을 놓아, 이 또한 성질 돋우어 그곳에 눈을 흘겨 주었음이라. 그리하여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고 아무데나 머리만 붙이면 금방 쿨쿨 떨어지는 편안한 아내여, 후둑후둑 빗소리에 몸을 일으켜 보금자리를 빙 돌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자리에 눕는 남편이여, 밤은 이렇게 깊어만 가는구나.

 

새소리가 개울물과 함께 재잘재잘 계곡을 흘러내리고 나뭇잎 윤기가 반짝반짝 앞뒤로 팔랑여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개울물에 손 담가 까르르 웃음 터뜨리는 아내의 안색 투명하다. 2556년 전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태어난 통쾌하고 명석한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석가모니라, 기존의 모든 종교와 우상과 관념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스스로를 해방시켜 절대자유의 경지에 이른 자. 나는 이 사내만 떠올리면 살맛이 나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온해져, 조석으로의 예불은커녕 대웅전에 엎드려 108배 한 번 안 해보고 참회나 마음 한 번 챙겨본 일도 없고 불사에 기왓장 한 장 얹은 적도 없지만, 멀리 넋을 놓아도 번뇌의 강에 발을 담가도 불어오는 향내가 코끝을 감돌아 가슴 속에 단정한 암자 하나 들어앉아 있으려니, 부처님은 순간순간 오시는지라, 따로 날 잡지 않고 번뇌의 찰나마다 오시는지라, 암자의 툇마루에는 오시지도 않고 가시지도 않는 불생불멸의 진여(眞如)만이 고요해, 나는 샘물에 목을 축인 후 그 자리에 앉아 나를 지워봤음이라.

 

산문(山門)이 열렸다. 고독한 수행자가 입을 떼었다. 월악산 영봉 아래 깃든 보광암은 가파랗다.

 

평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어 푸른 산에 걸렸다

 

성철스님이 임종의 자리에서 읊은 열반송이다. 일생을 수행에 몸 바치고 8년간 허리 한 번 눕힌 적도 없는 장좌불와(長左不臥)로 타의 모범이 되었던 대선사의 마지막 노래가 이렇다니, 참말로 독설이다. 이 독설이 다른 승려들에게 향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손가락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의 수행이라도 갈 길에 비하면 얼마나 볼품이 없다는, 무명의 업장이 바다와 같아서 일생의 노력도 바닷물을 한 바가지 퍼내는 일에 불과하다는, 막막한 법문으로 해석되어 눈앞이 아찔하고 다리가 휘청해, 보광암에 오르는 길은 멀고멀기만 했다.

 

 

                                  암자란 원래 수행승들이 수행하는 거처라서 문을 닫아두지만, 부처님 오신 날 산문이 열렸네요

 

 

 

“MB 정권을 비판하고 입 바른 소리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 설법을 듣기 위해 수백 명씩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우쭐해졌다. 다 깨우친 도인마냥 말하고 행동한 적도 있다.” (2012. 5. 25. 중앙일보 인터뷰)

 

기골이 드센 성철스님 밑에서 행자승 노릇을 하다가, 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대갈통을 깨부수겠다고 성철스님 면전에 일갈을 날린 후, 스스로 깨닫겠다고 산천이란 산천을 온통 헤매고 다녔던 수행자. 바로 명진스님의 고백이다. 이 분도 역시 스승을 닮아서인지 독설에 능숙해, 현 최고의 권력자가 파렴치 후안무치 몰염치, 삼치를 두루 갖춘 뻔뻔스런 자이며 전과자이며 거짓을 일삼는 사기꾼이고 절대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는 안 되었을 자라고, 그런 독설과 함께 봉은사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가 월악산 기슭에 둥지를 틀어, 부처님 오신 날, 오늘 산문을 연 것이다. 하기야 대한민국 권력자라면 나도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지긋지긋 다 겪어봤지만 권력자란 늘 그러하고 정치란 ‘국민속이기 게임’이라서, 별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머리 박박 문댄 스님이 대낮에 이렇게 나서서 노발대발 홀로 맞선 장면은 처음이라, 도올 김용옥 교수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불교역사 1700년래 권력자와 불길 같이 맞선 스님은 이 분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일 것이라, 짧은 지식이나마 나도 곰곰이 들추어 가늠해본 즉 김용옥 교수의 말이 틀림없는지라, 엷은 갈색 선글라스를 걸치고 암자 툇마루에 좌정한 스님 앞에서 옷깃을 가다듬으니, 세상에, 정말 세상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명진스님과 선용스님이 기거하시는 보광암 암자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법문을 시작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여러분께 참회합니다. 라며 깊게 깊게 엎드려 신도들을 향해 삼배를 올리더니, 침울한 어조로 마이크를 잡아 오늘은 부처님이 ‘우신’ 날. 망령된 제자들의 온갖 난장판에 부처님이 눈물을 흘리신 날이라고, 이에 술렁대는 신도들 틈에 끼어 앉아 마뜩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나는 천막 사이로 조각난 하늘을 올려다봐야 했다. 스님이라 일컫기는 어설프고 땡초라고 부르기는 좀 모질 것도 같아, 그냥 중이라고 표현하겠지만, 권력의 자리란 속세에 있건 산속에 있건 다 자만과 오만과 방종의 텃밭인지, 최고 자리를 꿰찬 중들이 밤새워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벼슬살이를 했다는 나의 먼 할아버지나, 논개의 팔에 휘감겨 남강의 물귀신이 된 왜장 게야무라 로스쿠케처럼, 또한 불쌍한 중생인 내가 놀아났던 일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여자를 불러들여 띵까띵까 돌아가는 조명등에 중머리 달덩이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굳샷! 관세음- 내기 골프나 치고 강남의 ‘신밧드’라나, 고급 룸싸롱 명당이라는데,

 

12년 전, 그러니깐 명진스님이 50줄에 들어섰을 때, 저녁을 먹은 후 노래나 부르러 가자는 도반의 말에 촐랑촐랑 나섰다나, 그래서 혹시...... 여자를? 돈 주고 여자를 사지는 않았는지요? 제가 그렇게 놀 때는 꼭 아가씨와 2차를, 그래야 제대로 논 것 같아서, 헤헤, 명진스님 왈, 그 안에서 노래를 부르다보니 이게 영 아니다 싶어서, 잠시 후에 그냥 나왔습니다. 계율은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이고 그렇다고 룸싸롱에 간 짓이 수행자로서 잘 한 일은 아니기에, 비난을 백 번 천 번 달게 받아 마땅한 일이고......하셨는데, 물론 변명처럼 들리는 이 말이 사실이겠지만 내 생각에는 계율이란, 살생이나 망언이나 주색잡기처럼 따로 정해진바 보다도, 스스로 수행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느껴지면 홀로 걷는 발걸음조차 그것이 다 쇠사슬 계율로 변하는 즉,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성철스님의 열반송이 그토록 독했는가 보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왜 사는 줄 모르니 산다, 고 말씀하신 명진스님과

                                                                            내가 뭔가하는 물음에 시달려 문학을 선택한 오정자 시인

 

 

 

밤이 가시밭 같아 뒤척이다가 예불 드리려 가사를 걸쳐 입으면, 영락없는 땡초의 모습이라 새벽달도 고개 돌려 부끄럽고 부끄러워라. 명진스님의 참회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내가 중생에게 베푼 공덕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수행자에게 회향하여 잠시의 곁눈질을 없던 것으로 해주련만 가진 것도 쌓인 것도 업장 하나뿐이라서, 들려오는 법문을 귓등으로 흘린 채 바닥만 내려 봤음이라. 월악산 계곡을 굽어보며 비빔밥을 한 술 뜨니, 쌀과 도라지와 고사리와 오이와 버섯과 김치가 다 귀한 생명이었을 것을, 그래서 내 생명이 남의 생명으로 이뤄졌을 것을, 암자 마당에서 아내와 명진스님은 손을 잡고 포즈를 취했다.

 

종교라면 내가 집사람보다 한 수 아래일 것이다. 모태 신자로서 기독교 신학을 전공했고 20년간 선교활동을 했음에도 집사람은 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시달렸고, 신앙이 일종의 대중 퍼포먼스라든가 획일화된 연출로 눈에 비쳐지자 진저리를 내고 문학에 달려들어, 그곳에서 구원을 찾다가 불교교리에 딱 부딪치는 순간 손바닥을 쳤던 것이다. 밀린다 왕은 수행자 나가세나에게 물었다. “네가 나가세나인가?” 수행자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여기 나가세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내는 무아(無我)의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늘 활달하고 유모가 넘치는 명진스님은 카메라 앞에 서자 왼발을 옆으로 쭉 내밀고 왼손을 허리춤에 걸쳤으니, 사진을 본 아내의 말이 스님이 꼭 개구쟁이 같다나, 천진스런 표정과 폼에 깔깔댔으니 어린애란 고해를 건너고 건너 묵은 때를 다 벗겨낸 선재동자와 같은 것을,

 

염원을 날려라, 등에 걸어 염원을 날려라. 거적때기 가여운 중생들의 손에는 오로지 염원 하나 뿐이려니, 그것마저 없다면 어찌 중생이랄 수 있겠는가. 하여 월악산 중턱 보광암에는 연등이 주르르 걸려 밤하늘을 가르니, 내가 좀 아첨인 것도 같고 연등에 닭살이 돋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자 가슴에 못을 박아 득 될 일이 없다는 옛말을 상기한 후, 눈을 딱 감고 준비했던 염원 하나를 아내의 등에 걸어주었다.

 

“詩를 달다.”

 

 

 2012년, 5월 하순 부처님 오신 날에 / 이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