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윤동주 시인의 재평가와 민족저항시인

미송 2012. 6. 25. 10:30

 

윤동주 시인의 재평가와 민족저항시인

 

                                                                       

 

 

 

1. 평론가는 문학의 판사이며 역사가다.

 

문학평론가의 첫째 임무는 작품의 옥석(玉石)을 가리는 일이다. 상품생산의 마지막 라인에서 불량품을 골라내는 일과 같다. 특히 요즈음처럼 작품집이 범람하는 시대에는 더욱 냉철하고 공정한 시각에 의한 비평이 요구되고 이는 ‘패거리 평론’이나 ‘골목평론’이라는 우리 평단의 고질적인 병폐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또 하나의 임무를 비평가들에게 요구한다. 물론 비평이란 개인적인 주관과 기호에 좌우되기 쉽고 그런 약점을 비평가 스스로가 고백할 필요는 있다. 그렇다고 비평기준을 자의적으로 잡으면 안 된다. 엄연한 작가의 창작의도가 있고 그 작품이 내포하는 자기 기준이 있기에 비평은 이를 살펴 독자에게 작품 고유의 품질을 평가해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를 설득하는 과정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평단은 칭찬 일색의 비평문들뿐이다. 예부터 남의 단점을 감추고 장점만 부각시키는 미풍양속에 익숙한 우리 사회라서 그런지, 아니면 학연과 지연에 따른 선배와 후배 또는 스승과 제자로 얽힌 인연들이라서 그런지, 대충 비평문이 상투적인 틀에 박혀 구체적인 지적 없이 추상적인 문구의 나열로 흘러간다. 때로 가혹한 비평문을 만날 때도 있지만 그 내막이 평론가가 속한 집단의 반대 집단에서 나온 작품을 악의적으로 까 내리는 작업에 불과하다면 실망이 더 크다. 비평이라는 탈을 쓴 악의적인 비평문은 모멸감을 가져오며 올바른 작품해설과 옥석의 가림이라는 평단의 목적과 질서를 해한다. 이런 ‘패거리 평론’이나 ‘골목평론’의 풍토위에서는 올바르고 공정한 비평이 발붙이지 못한다.

 

여기에 작고한 문인을 우상화시키는 풍토가 가세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각 지방에서는 지역주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문화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해서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작고한 문인들의 문학관이나 기념관을 세우고 축제나 추모제까지 치른다. 심하게 말하면 일개 문인이 신격화되는 지경인데 이는 지방자치단체뿐만 아니라 국정교과서를 통하여 국가 전체의 작업으로까지 이어져 말하자면 한 국가를 대표하는, 정말 흠 없고 하자 없는 지고한 문인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러면 그 문인의 작품은 입석에 새겨진 율법처럼 고고하여 비평가들의 발길을 불허한다.

 

비평이 살아남으려면 비평가들이 자기의 위치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비평가는 공정하고 용기 있는 문학의 판사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평론가는 제 살을 도려내는 비정함으로 ‘평단의 비평’부터 시작하여 작품의 비평까지 사심 없이 가야 된다. 이는 독자가 골방에서 작품을 읽다가 감동을 받든지 아니면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읽다 말고 휙 구석에 던져버리는 진솔한 태도와 같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예수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평론가의 둘째 임무는 제대로 된 문학사의 정립이다. 수많은 작가와 작품은 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요구하고 있다. 옥석을 가려 작가와 작품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작업은 작게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사랑과 배려고 크게는 한국문학의 기둥과 대들보를 세우는 대업으로서, 개별 작품의 평가에도 그 기준이 엄연히 존재하듯 한 민족의 문학도 그 출발을 정확하게 잡아 큰 줄기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러야 한다. 또 이 줄기는 후대로 이어져 오늘의 문학사 정립 작업이 추호도 후대에 부끄러우면 안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문학이 남북으로 갈린 것이다. 남한의 문학은 일제시대에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온 국내 동경유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아직도 구태의 역사세우기 논란이 분분하다. 현재 정부에 의해서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되고 있으며 이것이 다 편찬되고 나면 대충 역사세우기 논란은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수치스런 식민통치 시대를 거친 우리 문학은 외국에서 보기 드문 기형적인 토론주제를 낳았다. 1930년 전후반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카프문인들에게 대대적인 일제의 검거와 탄압이 떨어지자 이데올로기와 문학과의 관계를 놓고 고민하던 그들은 순수문학이라는 반토막 문학을 만들어냈다. 일제 총독부의 시퍼런 칼날을 피해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일체 문학에서 배제하여 탐미주의에 몰두했으니, 이런 전통이 해방 후에도 이어져 독재시대에도 문학은 심산유곡을 헤매고 내면의 세계에 골똘하며 침묵했다. 이것이 4.19혁명을 전후로 서구의 실존주의 문학에 영향을 받은 문인들에 의해서 대대적인 참여문학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니, 순수문학 쪽에서는 문학이 ‘정치의 시녀’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참여문학 쪽에서는 사회문제를 도외시한 문학은 오직 ‘몸보신 문학’으로서 제 사명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사실 문학은 모든 사회문제를 안고 간다. 또한 한 시대의 총체적 그림이다. 정치를 문학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정치적인 발언이나 법적으로 보장된 정치에 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통치에 복종해야 할 의무를 지닌 정치적 동물로서 정치와 국민 개개인의 생활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국가의 헌법을 해석하는 데도 국민을 수동적인 피치자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통치기관을 좌지우지하는 적극적 주체로 내세우기도 한다. 이런 민주사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를 사회복지체제화 시킴으로서 이제는 개개인 국민이 국가에게 구체적인 생존의 수단, 즉 기초생활자금이나 국민연금을 요구하게도 한다. 사실 이런 지경이라면 이데올로기와 문학에 관한 토론은 무의미해진다. 오늘의 문학은 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발 안 닿는 곳이 없다.

 

북한은 해방 직후 일찍이 친일청산을 마무리 했고 해외를 떠돌던 망명문단의 문인들이 대거 입성하여 정말 민족 정통성을 지닌 문학이 결집된 듯했다. 거의 모든 문인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글을 썼고 독립투쟁도 했으며 최소한도 친일을 한 사람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북한 문학에 남한에서 순수문학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염려했던 ‘정치의 시녀’로서의 문학이 들어섰다. 모든 글은 국가에 봉사해야 하고 더 세밀하게 말하면 북한 노동당의 선전에 앞장 서야 했다. 이런 북한의 ‘관제문학’은 수많은 문인들을 질식시키고 붓을 꺾게 만들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문학사는 남북한을 통합한 문학사여야 한다. 그리고 출발점을 아직도 우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역사세우기의 분분한 대상들이 아닌, 생애와 문학이 일치하고 후대에 부끄러움이 없는 민족문인으로 해야 한다. 즉 민족사적인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문학사를 써나가야 한다는 말이고 일당 독재에 봉사한 관제문학이 아닌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가는 자유문학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평론가는 올바른 민족사관을 지닌 역사가여야 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민족저항시인이라는 것은 현재 평단의 통설이다. 국정교과서에 실린 <서시>를 저항시로 해석하는데 인색치 않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으로 의심되는 주사를 맞다가 죽었고, 그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독립운동에 관여한 죄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위와 같은 사실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평단의 통설에 쉽사리 수긍할 수가 없다. 민족저항시인으로서의 반열에 오르려면 첫째 그의 생애가 독립운동과 직결되어 지사적인 요소가 확실하고 둘째 그의 작품에서 조국애와 민족애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수치스런 이야기지만 해방 후에는 친일분자였던 문인들도 거의가 다 제 나름대로는 조선을 위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 피와 살과 뼈가 모두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망발을 서슴지 않던 이광수는 해방이 되자 아래와 같은 유명한 글을 남긴다.

 

“12월 8일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조선 민족이 대위기에 있음을 느끼고, 일부 인사라도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서 민족의 목전에 임박한 위기를 모면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이 경우에 스스로 희생되기를 스스로 결심하였다.”

 

나는 과거의 문인들을 되돌아 볼 때마다 슬퍼진다. 문학이란 정신의 학문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그 일관성과 태도가 분명해야 할진데, 시국의 변화에 따라 민족을 희롱하며 카멜레온의 변신을 거듭한 문약함과 교활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그들이 수십 년간 되풀이 해온 “상황이 그렇기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문학마저 매도하지 말라.”라는 논리에 최면이 걸려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것이 바로 산이 물인가 하니 물이 산이라며 뿌연 안개 속을 떠돌던 승려의 깨달음이다. 역사는 과거의 껍데기를 벗겨내는 칼날이다. 산을 산에 위치시키고 물을 물에 위치시켜 기어이 알맹이만 천하에 드러내게 하는 작업이다.

 

윤동주 시인을 재평가하는 내 작업은 윤동주의 문학과 생애를 폄하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둔다. 민족저항시인이란 후대를 두고 영원히 기억되고 잊지 말아야할 위대한 유산이기에 그 반열을 엄격히 하여, 확실하고 명쾌한 기준을 정하려는 것이다. 민족저항시인이 많을수록 우리의 정신사는 빛난다. 그러나 아무나 오를 수 없는 민족의 성역이기에, 이런 작업은 오늘의 문학평론가들에게 시대적 소명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2.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3인방

 

서울대교수 오세영 시인은 그의 비평문 <윤동주는 저항시인인가?>에서 일제시대의 민족저항시인으로서 이육사, 심훈, 한용운 3인을 꼽으며 국권이 찬탈된 식민지 시대에 이렇게 적은 숫자의 저항시인만 배출한 우리 문단의 정신사적 수치를 개탄한다. 너무도 적은 숫자가 심히 부끄럽지만 해방 후에 너도 나도 민족저항시인이라고 자처하며 시집을 낸 문인들이 거리에 넘치고 이를 면밀히 검토하여 사실의 진위를 가려준 양심적인 비평가도 드물었다는 점에 비추어 오늘이라도 냉철한 비평을 통하여 그 옥석을 가려내야 할 일이다. 나는 오세영 시인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기준을 세워서 오세영 시인이 그 많고 많은 소위 자칭 민족저항시인이라는 사람을 제치고 딱 3명만 꼽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후대에 부끄러움이 없고 엄격한 민족저항시인의 조건을 먼저 제시할 필요가 있다.

 

민족저항시인의 첫째 요건은 항일투쟁의 족적이 분명해야 한다. 적극적 무력투쟁이든 소극적 저항이든 투쟁의 족적이 확연하여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가 되어야 저항시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이육사는 원래 문인이 아닌 독립투사였다. 이십대 초반에 무력항일단체인 의혈단에 가입했고 대구은행 폭탄투척 사건으로 일경에게 투옥되었다. 이때 그의 죄수번호 64를 따서 자기의 호를 정했다고 한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양성소인 조선군관학교에 입학해서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대륙과 국내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하던 중, 그는 일생을 통하여 무려 17번이나 왜경에게 체포 투옥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30세를 넘긴 나이에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국내에 체류할 때에 왜경은 그를 늘 밀착감시 했다. 그의 시 <자야곡>에는 그때의 답답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수만호 빛이라야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절여

바람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 막힐 가슴에 강물은 어디메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들어

수만호 빛이라야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이육사의 시다. 한 눈에 저항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시에서 ‘수만호의 빛’은 과거의 영화를 누렸던 조국이고,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은 영락해버린 조선을 말하며,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꿈’은 조국 광복의 염원을 뜻한다.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는 열렬한 조국애를 말하고 ‘들창마다 눈동자’는 그 순한 조선 백성으로 해석된다. 그 백성들이 바로 ‘바람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의 가련한 처지에 빠졌고 ‘숨 막힐 가슴에 강물’은 독립투쟁을 못하고 있는 암담한 현실로 해석된다.

 

이육사는 1943년에 중국에서 건너온 독립운동지사와 은밀히 접촉하여 국내에 항일거점기지를 마련하려다가 일경에게 체포된다. 북경으로 이송된 후 그 다음해에 한겨울의 싸늘한 감옥 바닥에서 옥사하고 만다.

 

만해 한용운은 3.1운동 선언문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후에 다 변절했어도 끝까지 혼자서 절개를 지켜 민족과 조국을 사랑했다. 또한 한일합방 후 일본의 불교 조동종이 우리의 불교계를 점령해 들어올 때 <불교유신론>을 통하여 불교개혁을 부르짖어 한국불교를 수호하려고 했다. 육당 최남선이 변절하여 창씨개명을 하자 그의 집 앞에다가 거적을 깔고 한용운은 대성통곡을 했다.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묻자 한용운은 “멀쩡한 사람이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라고 대답했으니 조선 사람이 일본 이름을 갖는 순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용운이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에 일제말의 식량배급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빠졌고, 중풍에 시달리던 한용운은 기어이 그의 거처인 심우장에서 굶어 죽게 된다. 이것이 이름을 팔아먹고 살기보다는 제 이름을 지키다가 죽는 것이 민족과 조국 앞에 덜 부끄럽다는 그의 절개였다면, 한용운은 스스로 아사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자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려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심훈(1901~1936)은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항주에 있는 지강(之江)대학에서 수학했다. 당시 지식인들이라면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하고 돌아왔다는 점에 비춰 반대로 발길을 잡아 북경, 남경, 상해를 전전하다가 항주에 정착한 심훈 시인의 행적이 독립운동과 연관되었다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 보지만 증거나 자료가 없기에 깊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요는 그가 귀국한 후의 문필활동에서 보여준 끊임없는 저항정신이다. 사실 심훈 시인처럼 노골적인 직설화법으로 우리 민족과 광복을 노래한 문인도 없다. 그의 시는 줄곧 민족과 광복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 표현도 통렬하여 마치 피를 토하는 듯 하다. 악랄한 조선 총독부의 검열과 가위질에 굴복치 않고 그는 계속 저항시를 써나갔고 틈만 나면 지면으로 발표했으며 그가 출판한 책은 판금조치를 당하기 일쑤였다.

 

심훈은 시에서 안 되면 소설로 달려갔다. 1930년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했으나 일제의 검열에 의해 중단되었고,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상록수>를 영화로 제작하다가 일제의 방해로 또 중단되고 말았다. 이육사는 시인이기 이전에 독립투사였고 한용운은 승려였다. 그러나 심훈은 처음부터 문인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오직 문인으로서의 저항정신에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후대 문인들의 귀감이 된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서 가위질 당한 그의 작품을 보자.

 

만가(輓歌) / 심 훈

 

궂은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수의(壽衣)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뻑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3. 윤동주의 시세계와 그 해석의 문제점

 

먼 길을 달려왔다. 이제 윤동주의 시세계에 접근하여 그 민족사적 위치를 밝힐 때가 온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이육사는 윤동주와 같이 2대 민족저항시인이라는 글이 발견된다. 사실 나도 국어시간에 윤동주가 민족저항시인이라고 배웠고 또 많은 평론가와 작가들에게도 그렇게 들었다. 그의 대표작 <서시>는 저항시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아마 몇 년 전부터 일 것이다. 윤동주가 과연 저항시인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울대 교수 오세영 시인의 <윤동주는 저항시인인가?>라는 비평문을 읽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다.

 

우리는 과연 민족의 성자(聖者)인 저항시인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별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기준을 오세영 시인은 제시하지 않고 작품 해설에만 치중했지만 대충 직감할 수는 있었다. 이육사, 심훈, 한용운의 생애와 작품이 곧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을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그의 시에는 저항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몇 편의 저항시를 썼다고 해서 다 저항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는 누구라도 마음먹으면 은유를 동원하여 쓸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저항시인의 기준을 세 가지로 잡아, 첫째는 생애를 통한 투쟁의 족적이요, 둘째는 한 치의 변절도 없어야 하며, 셋째는 저항정신이 작품 속에 확연히 녹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의 정신, 생애, 작품이 하나의 강물을 이루어 흘러가게 하는 이 세 가지의 잣대로 민족저항시인의 성전을 구축하고 싶은 것이다.

 

윤동주(1917~1945)는 북간도 명동촌의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을 전전한 후 국내로 들어와 연희전문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릿교 대학에 입학했다가 도시샤대학으로 옮긴다. 그는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초기에는 유년기의 평화를 지향하는 동시 형태의 시가 많고 후기 청년기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윤동주가 1939년 조선일보에 게재한 <달을 쏘다>를 비롯한 몇 편의 산문부터 접근하면 그의 시세계를 정확하게 짚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달을 쏘다 / 윤동주

 

번거롭던 사위(四圍)가 잠잠해지고 시계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적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 옆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양찬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는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질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 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 소리가 날 듯 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소리와 숨소리와 귀뚜라미 울음 뿐 벅적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사유(私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想華)도 좋고, 어릴 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의 향수도 좋게니와 그보다 손쉽게 표현 못할 심각한 그 무엇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H군 편지사연을 곰곰이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감상적인 그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왔나보다. 편지는 너무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중 한 토막,

“군아! 나는 지금 울며 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인간인 까닭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정의 눈물, 따듯한 예술학도였던 정의 눈물도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쫓아 버리는 것이 정직할 것이오.”

나는 이 글의 뉘앙스를 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 마디 한 일 없고 설운 글 한 쪽 보낸 일이 없지 않은가, 생각건대 이 죄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 보낼 수밖에 없다.

홍안서생(紅顔書生)으로 이런 단안을 내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낮 괴로운 존재요, 우정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놓은 물다. 이 말을 반대할 자 누구랴, 그러나 지기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 하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살을 베어내는 아픔이다.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 방문을 열고 나왔다든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이 서서 닥터 빌링스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은 민감이어서 싸늘한 달빛에도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 하여서 설운 사나이의 눈물인 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둘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고 삼경(三更)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

그 찰나 달이 원망스럽고 가을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셔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찾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고누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조선일보, 1939. 1. 23)

 

이 산문은 마치 우리로 하여금 가을 서정의 텃밭에서 별을 밟는 느낌을 준다. 시종일관 문장은 시어를 번뜩이며 달린다. 마지막 문장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는 이 산문 전체를 통합하여 똑 떨어뜨리는 백미라고 아니할 수 없다. 가을은 이 문장 하나로 다 설명되는 것이다. 또한 이 산문을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 시의 밑바닥에 흐르는 서정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산문은 윤동주가 이십대 초반에 썼고 이를 기점으로 윤동주의 작품이 본 궤도에 올라 청년기의 암울한 분위기를 토하게 된다.

 

윤동주가 문학적 재능이 풍부한 시인이라는 것은 그의 소년기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조선인의 서정과 향수, 거기에 유모감각까지 뛰어났다는 것을 시로 보여 주고 있다.

 

개 / 윤동주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호주머니 / 윤동주

 

넣을 것이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이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빨래 / 윤동주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이야기 하는 오후

 

쨍쨍한 칠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매달린다.

 

평화로운 유년기의 시에 몰두하던 윤동주는 이십대를 넘기고 문학적으로 완숙해져 감에 따라 슬픈 서정과 사유에 몰두하게 된다. <서시> <쉽게 씌여진 시> <정거장> <또 다른 고향> <자화상> 등 그 완숙기의 작품에는 시종일관 깊은 우수가 쫓아다니고 이 우수는 결벽증에 가까운 순결성을 포태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의 특징 인 이런 순결성은 어디서 유래가 된 것일까? 비평가들의 말대로 그의 기독교적인 집안의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타고난 완벽주의자와 같은 성격도 한 몫을 했다는 판단이다. 윤동주만이 가진 청년기의 순결지향주의와 암울한 분위기는 윤동주가 십대에 썼던 <초 한 대>라는 시에서 벌써 예고하고 있다.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 북간도 명동촌에는 우리 문학사에서 주목을 받을 몇 사람의 문인들이 있었다. <북간도>의 저자 안수길, 사회주의 계열의 여류소설가 강경애, 동요의 작사가로 유명한 윤극영, 등 그 외의 문인들이 있었으며 윤동주보다 한 살 위인 심연수 시인도 같은 동네에 살았다. 또한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독립지사들이 명동촌에 자주 들락댔다. 윤동주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특히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는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한 작가로서 윤동주와 같은 또래였지만 남성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송몽규는 일찍 독립운동을 하려고 독립군 황포군관학교의 전신인 남경군관학교에 입학했고, 그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대학에 다니며 윤동주와 자주 접촉했다. 둘이서는 하숙집 방에서 대화를 잘 나누었는데 이 둘의 대화를 엿들은 하숙집 여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형을 언도 받는다.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했거나 그에 관여된 것은 확실하다. 혹자는 송몽규가 남경군관학교에서 독립군의 특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왔다는 추측도 한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언제부터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을까? 이에 대한 자료는 윤동주를 조사한 일본 검찰의 조서에 기록되어 있을 테지만, 그것은 밝혀진 바가 없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재판기록은 확인된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 성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이하 6행은 총독부에서 가위질 당했고, 심훈은 이를 복구하지 못한 채 병사하고 만다.)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는지 아니면 옥사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의 ‘동지’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뜻이 바로 항일운동이었음은 시의 마지막 연 네 번째 행에 표현된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와 그 다음 행의 ‘조가도 부르지 못하는 산송장들은’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때에 심훈과 그 동지들은 일제의 밀착감시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저항시인의 둘째 요건은 변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곤란과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정신을 시종일관 고수하여 추후 누구에게라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전에 아무리 저항을 했더라도 민족의 판단은 지엄하여 단 한 번의 변절이라도 영원히 용서치 않는다. 직필이란 일필휘지와 같아서 끝마무리까지 변함이 없다. 잘 나가다가 구불구불한 시류의 강을 만났을 때 한 순간이라도 곡필을 휘둘렀다면 그간의 직필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만다. 또한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은거나 붓을 꺾어 버리는 일로 저항시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조국과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문인이 마땅히 취할 도리는 더욱 엄중하고 치열하여 조국과 민족을 대변하고 민중의 선봉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하에 절필하거나 향리에 묻혔던 염상섭, 변영로, 오상순, 김영랑, 황순원, 조지훈 같은 사람을 민족저항시인이라고 일컫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여순에서 8년간의 옥살이 끝에 죽고 말았다. 여순의 겨울은 혹독하여 영하 삼 사 십도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보통이고 감옥 안에는 아무런 난방시설도 없었다. 일경이 코앞에 내민 전향서 한 장이면 따듯한 방에서 잠도 자고 석방될 수도 있었지만 신채호 선생은 죽을 때까지 굳게 전향을 거부했다. 이육사는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고 한용운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하고 스스로 아사의 길을 택했다. 심훈은 경우가 달라서 장티푸스로 병사했지만 그의 저항정신에 하나도 훼손 가는 바가 없다.

 

민족저항시인의 셋째 요건은 문학에 저항정신이 뚜렷이 나타나야 한다는 점이다. 직설화법이건 은유건 비유건 가릴 것 없이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저항정신이 작품에 확연히 녹아들어야 한다. 어설프거나 애매모호하게 저항정신이 표현된 작품, 또는 애써 저항시라고 해석을 따로 필요로 하는 작품은 제외된다. 민족시인 3인방의 작품에서 저항정신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고 애써 저항시라는 해석을 따로 붙일 필요도 없다. 그의 인생이 저항 자체였기에 자연스럽게 그 정신이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다.

 

확연한 항일저항의 족적과 적극적으로 민중을 대변하며 지켜 나가는 절개, 그리고 맥맥이 작품 속에 흐르는 저항정신이라는 3대 요건 중에 어느 하나라도 충족치 못하는 시인이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를 민족저항시인의 반열에서 빼버려야 한다. 내가 딛고 있는 오늘의 이 땅이 내 것이 아닌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땅이고, 저 하늘도 역시 그들의 머리 위에 영원히 떠 있을 하늘이라면 내 핏줄 내 민족 역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민족 전체의 몫으로서 비평가는 민족기상 앞에 알몸으로 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문학사를 정립하는 비평가의 태도다. 내가 좋아하고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으며 내게 이득이 된다고 해서 오늘의 민중에게 뿐만 아니라 민족전체에게 던져지고야 말 작품을 제 멋대로 화장시키고 옷을 입혀 한 세대를 호도하면 이는 매춘문학으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마로 흙을 비비며 눈으로 피를 뿜는 심훈의 통렬한 저항시 <통곡>을 소개하며 윤동주를 찾아서 조심스런 발길을 명동촌으로 돌린다.

 

통곡(痛哭) / 심 훈

 

큰 길에 넘치는 백의의 물결 속에서 울음소리 일어난다

총검이 번뜩이고 군경의 말발굽소리 요란한 곳에

분격한 무리는 몰리며 짓밟히며

땅에 엎디어 마지막 비명을 지른다

외치는 소리 느껴 우는 소리 구소(九所)에 사모친다

 

검은 댕기 드린 소녀여

눈송이 같이 소복 입은 소년이여

그 무엇이 너희의 작은 가슴을

안타깝게도 설움에 떨게 하더냐

그 뉘라서 저다지도 뜨거운 눈물을

어여쁜 너희의 두 눈으로 짜내라 하더냐?

 

가지마다 신록의 아지랑이가 되어 오르고

종달새 시내를 따르는 즐거운 날에

어찌하여 너희는 벌써 기쁨의 노래를 잊어버렸는가?

천진한 너희의 행복마저 차마 어떤 사람이 빼앗아 가던가?

 

할아버지여! 할머니여!

오직 무덤 속의 안식 밖에 희망이 끊긴 노인네여!

조팝에 주름잡힌 얼굴은 누르렇고 세고(世苦)에 등 굽었거늘

창자를 쥐어짜며 애통하시는 양은 차마 뵙기 어렵소이다

 

그치시지요. 그만 눈물을 거두시지요

당신네의 쇠잔한 자골이나마 편안히 묻히고저 하던 이 땅은

남의 호미가 샅샅이 파헤친 지 이미 오래거늘

지금 피나게 우신들 한번 간 옛날이

다시 돌아올 줄 아십니까?

 

해마다 봄마다 새 주인은

인정전 벚꽃 그늘에 잔치를 베풀고

이화 이 휘장은 낡은 수레에 붙어

티끌만 날리는 폐허를 굴러다녀도

일후(日後)란 뉘 있어 길이 서러워나 하랴만은

 

오오 쫓겨 가는 무리여

쓰러져 버린 한낮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마라!

덧없는 인생 죽고야 마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어니

한 사람의 돌아오지 못함을 굳이 서러워하지 마라

 

그러나 오오 그러나

철천(徹天)의 한을 품은 청상(靑孀)의 설움이로되

이웃집 제단조차 무너져 하소연할 곳 없으니

목매쳐 울고저 하나 눈물마저 말라붙은

억색(抑塞)한 가슴을 이 한날에 두드리며 울자

이마로 흙을 비비며 눈으로 피를 뿜으며

 

 

잠시 눈을 돌려 윤동주가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던 기간으로 짐작되는, 즉 윤동주의 20대에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윤동주의 20대는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의 병참기지화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폈던 일본 미나미 총독의 재임기관과 일치한다. 당시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탈하여 대륙에 한 발 걸친 후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선을 확대시키며 중원으로 치닫는다. 한반도는 자연히 일본의 대륙진출 교두보와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은 바로 자기 나라의 턱 밑에 있는 한반도를 손아귀에 꽉 거머쥘 필요가 있었다. 이런 특명을 받고 온 총독이 바로 미나미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가차 없이 조선의 민족의식과 주체성을 말살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선내의 불령선인(不逞鮮人 : 민족사상을 지닌 조선인을 일본경찰이 일컫는 용어로서, 이는 ‘날강도 같은 조선 놈’이라는 뜻이다.)을 샅샅이 색출하여 처단함은 물론 아예 처음부터 조선인의 의식을 황민화 시켜버리는 내선일체 작업에 착수하여, 1939년 훈령을 개정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 국어(일본어)상용의 엄명, 신사참배 등, 그들의 말에 따르면 국민의식의 고취에 급급했던 것이다. 37년 4월 이후 각 중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시키는 한편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미션 계통의 학교를 폐쇄했고, 이 여파로 평양의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윤동주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다음해부터 조선교육령을 개정 시행함으로서 모든 조선인 학교는 황국신민의 양성소로서 국어(일본어)교육에 만전을 기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광수를 필두로 우리 민족의 수많은 문인들이, 그렇게 잘났고 고고하기만 했던 민족의 선각자요 지식인이요 인텔리를 자처하던 사람들이, 자유 평등 박애의 근대사상을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그 귀신과 같은 사람들이, 조상이 너 잘 되라고 작명가를 찾아 머리 조아리고 옥편을 들쳐 밤새 고심하여 지어준 이름을 하루아침에 쓰레기통에 처넣고 황금빛 찬란한 일본 이름을 보듬어, 나태와 잡담의 텃밭인 카페나 다방에 들어앉아 국적불명의 이름을 주절대며 서로 손짓하고, 우리는 조선인이 아니다, 원래 한반도에 조선인이란 없었다, 게으르고 무지몽매한 반도인들의 희망과 구원은 오직 해가 뜨는 저 동쪽에서 빛으로, 빛으로 이 땅에 도래할 지니, 어서 일어나 그 빛을 가슴에 한껏 품어 제발 위대한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나라. 자식에게는 조선의 ‘조’자도 가르쳐주지 말라. 그러다가 정오의 나른한 햇볕 아래 사이렌이 울면 홀짝대던 커피 잔을 얼른 내려놓고, 길바닥에 넙죽 엎드려 두 손을 높이 합장하고는 일본천황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대일본제국의 영원한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우리 조선인들은, 아니, 말이 헛 나왔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일본인, 바로 우리 일본인들이 간을 흙에 이겨 비옵나이다.

 

그들은 총독부까지 좇아가 애원했다. 대일본제국이 인류를 위하여 사방에서 피를 뿌리는데 우리 반도인들만 편하게 살다니요? 정말 죄송하여 얼굴 들지 못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 반도인들이 무지몽매하고 게을러서 써먹을 구석이 없다고는 하나 사지는 멀쩡하게 달려 있은 즉, 전선에 나가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삽질이나 하든지, 총알이나 나르든지, 물통이라도 지어 나르든지, 몸 바칠 기회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인간 노릇 좀 하게 해 주세요- 네? 네? 제발요. 잠에 떨어진 반도인들의 의식을 깨우고 바로 잡는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시고요. 오늘 밤에 몇 자 써서 내일 신문에 내 볼까요?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재주뿐이 없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왕이면 저도 전선에 나가서 피를 흘려야 되는데- (위와 같은 내용 자료는 그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손쉽게 확인된다.)

 

글이 글이 아니고 말이 말이 아닌, 흰 옷이 흰 옷이 아니며, 조선인이 조선인이 아닌 이 미치광이 시대에 윤동주는 국내에 들어와서 연희전문대학 문과에 다니고 있었고, 그의 대부분의 완숙된 작품이 이때에 나온다. 자, 그렇다면, 국정교과서에도 올려졌고 그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우리에게 알려진 <서시>가 과연 말 그대로인가?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세영 시인은 이 시를 평하면서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어느 구석을 봐도 저항시의 색채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시는 기독교적 순결주의에서 비롯된 결벽증에 가깝다고 했다.

 

처음부터 저항시라는 목적을 두고 이 시를 해석하면,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은 민족을 위한 의무와 행동에 충실한 태도고, 그런 의무와 행동 앞에 서면 “바람 앞에도 괴로웠했다”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이란 억울하게 죽어가는 우리 민족이고 수탈당하던 조선 땅의 모든 사물이고, “나한테 주어진 길”은 독립운동의 길이란 뜻이다. 즉 민족의 수난에 괴로워하며 독립을 위해서 몸 바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은유를 동원한 시라도 그 해석에는 사용된 시어 자체와 그것이 암시하는 바를 좇아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 자체가 창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이 시에서 민족적인 저항의 흔적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저항시에서 흔히 등장하는 조선이나 절개의 상징적인 시어, 즉 흰 옷, 봄, 강산, 소년, 어머니 품, 진달래, 압록강 등등이나 이와 비슷한 것이 하나쯤 들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굳이 저항시라는 전제하에 해석을 이리저리 갖다 붙이지 않아도 될 법도 하다. 산문 <화원에 꽃이 피다>에서 윤동주는 소소한 주변사를 근심하며 그 특유의 시어와 같은 문장을 갖다 붙인다. 이 산문에서도 민족이나 저항정신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 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나의 역설이나 나 자신을 흐리는데 지날 뿐일까요.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 모른다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허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 버려야 하나요. 우리의 아픈 곳을 알아주는 스승, 우리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듯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잡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 (화원에 꽃이 피다에서)

 

이 산문 마지막 문장에 들어있는 “원수를 만나면”을 가지고 한참 고심했다. 혹시 이 단어가 우리를 짓밟고 있는 일본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러나 저항시인을 만들기에 급급해서 아전인수로 해석하면 안 된다. 써 있는 그대로의 정신을 추적해야 한다. 산문 전체의 맥과 기독교적인 박애정신과 순결이라는 윤동주의 정신세계로 미루어 성경구절의 일반적인 원수, 즉 원수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씀이 더 가깝다는 판단이다. 저항시라면 이 시보다는 그의 다른 작품 <또 다른 고향>이 더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는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위 시에서 눈에 번쩍 띄는 시어가 바로 “지조 높은 개”다. 지조 높은 개가 “어둠을 짖는다” 그렇다면 “지조 높은 개”는 사철 푸른 나무인 우리 민족일 것이며 “어둠”은 민족의 암담한 현실인가? 민족을 위해서 앞장서라고 지조 높은 개가 짖는다면 윤동주는 당연히 “쫓기우는 사람처럼” 어디로 가야 한다.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말이다. 그곳이 민족저항의 정신을 뜻하는 곳일까? 그러나 이 시 앞에 두 연을 살피면 인간 실존 깊숙이 자리 잡은 고독을 느끼게 한다. 이는 신경질이 많아서 애인에게 잘렸다는 보헤미아 출신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를 연상케 한다. 릴케의 시에는 생명이 자기 생명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범신론적 사고가 깔려있다.

 

당시 우리 시단에 큰 영향을 미친 외국 시인으로서는 타고르와 릴케이다. 저항시를 많이 썼던 한용운이나 심연수 같은 시인은 주로 타고르에 심취했었고, 인간실존에 고민하던 시인들은 주로 릴케의 시를 많이 읽었다. 윤동주도 릴케에 심취했고 그의 시의 뿌리를 쫓아 올라가다 보면 인간실존에 대한 고민과 봉착하게 된다. 윤동주의 산문 <별똥이 떨어진 데>를 잠시 살펴보자.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 갈 곳을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중략)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없을 듯 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순도순 이야기 할 수 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든 탄생시켜 준 자리를 지켜 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을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느냐.

이 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여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 듯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뼈저리듯 하나 나의 선배의 웅변에 왈 선배도 믿지 못할 것이라 하니 그러면 영리한 나무에게 나의 방향을 물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앗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별똥이 떨어진 데에서)

 

윤동주가 옥사 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으면 과연 어떤 시를 썼을까? 살아생전에 윤동주는 끝없는 문학여행 중이었고 우리 모두가 그렇다. 유

년기의 동심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다가 스무 살을 넘겨 윤동주가 만난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시정신 중심에 선다. 내 생각엔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냐 아니냐를 넘어 우주론적 방법으로 절대자에게 접근하려는 대담함, 삶과 생명의 긍정과 부정 사이를 헤매는 방랑자와 같은 인상, 그리고 시창작 기법을 통하여 동원하는 우주의 거대함과 곧 발견되려는 그 뒤에 숨은 절대자 앞에 질려버린 연약한 싹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는 그의 완벽주의자와 같은 성향과 맞물려 순결주의로 흐르고, 자기의 존재조차 그 앞에서 수줍고 부끄러워하게 만든다. 릴케는 우리 현대시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백석, 김춘수, 김현승, 전봉건, 김수영, 박양준, 박진희, 허만화, 김기택 등의 시인들이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 윤동주는 41년 도쿄 쇼신사에서 <릴케의 사상과 죽음>이라는 책을 본 후 그해 11월에 <별 헤는 밤>을 쓴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릴케를 떠올린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세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내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어머니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루, 프란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이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찾으려면 <서시>보다는 이 시에서 찾아야 되지 않을까? 고향에 대한 향수와 옛 친구들과 어머니, 그리고 ‘부끄러운 이름’과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과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와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라는 시어 전체를 통하여 저항시라고 해석되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해석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이 시 속에서는 저항정신보다 윤동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인간실존의 고독과 방랑, 사색과 자기성찰이 더 깊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보면 위의 시에서 등장하는 전원시인 프란시스 쟘과 소녀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베를레에느는 아니다. 파리에 살고 있는 시인은 아니다. 그런 시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나의 시인은 산 속에 조용한 집을 한 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시인은 대기 속에서 울리는 맑은 종소리와도 같다. 자기 집 창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정답고 먼 들이 비치는 책상의 유리문에 대해서 행복한 이야기를 한 시인이다. 나는 사실 이런 시인이 되고 싶다. (릴케가 언급한 이 시인은 프랑스의 전원시인 프란시스 쟘을 의미한다고 한다. 사실 프란시스 쟘은 집안의 소소한 가구와 창문과 전원과의 대화를 통하여 시를 썼고, 이는 릴케뿐만 아니라 윤동주와 백석 시인에게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녀들에 대해 그렇게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처녀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많다... (중략) 그는 그 처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볼 것이다. 길게 고풍의 장식적인 문자로 슬쩍 날씬하게 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는 처녀들의 옛 동무들이 시집 간 후에 갖게 된 이름도 소리 내어 불러볼 것이다. 그런 이름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련히 운명이 깃들어 함께 울리고 슬픈 환멸과 죽음도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 중에서>

 

 

4. 윤동주는 과연 저항시인인가?

 

비평은 객관적인 자료와 판단을 토대로 시대의 풍조와 영향을 초월해야 한다. 또한 기존의 비평마저 비평해가며 새로운 비평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나는 저항시라는 윤동주의 시에 입혀진 선입관을 버리고 그 자체의 문학적 뿌리를 쫓아 액면 그대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생애와 문학을 일치시키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이라는 탈이 늘 우리 문학사에서 문제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많은 문인들이 민족저항시인의 대열에 끼려고 했다. 해방 직전에 그토록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고 침묵하다가 별안간 너도 나도 저항시를 썼다며 시대의 역사를 등에 업고 설쳐댔다. 얼마 전에 만해 한용운 생가를 빙 둘러서 민족시인의 비를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려 스무 명이 넘는 시인들이 민족의 성지에 올려질 판이었으니 그 시인들의 명단을 보던 나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저항이 무슨 유행인가? 한용운 생가가 무슨 패션쇼라도 벌이는 난장판이란 말인가? 문인들이 너무도 욕심이 많다는 판단이었다. 문학은 이름을 길이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누가 기억해준다는 보상을 노리는 작업도 아니다. 문학은 글 자체로서 이미 작가에게 충분한 보상을 치러주는 정직하고 계산이 빠른 장사꾼으로서 더 이상의 욕심은 심하게 말하여 시종잡배들의 너스레에 불과한 것이다.

 

명예는 늘 죽은 자의 몫으로 긴 역사에 남는 법이다. 그 명예가 민족적 명예든 문학적 명예든 아니면 자기 핏줄에게만 통하는 족보의 명예든 상관없이 오랜 세월과 시대의 변화라는 터널을 거쳐 알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문인에 대한 판단은 먼 미래로 보류하게 마련이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당대 작가의 생애와 업적과 작품이 확연히 드러나 검증조차 필요 없어야 한다.

 

윤동주의 작품을 통하여 나는 시대의 저항정신보다는 내면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실존과 생명에의 의지를 더 많이 느낀다. 혹자는 윤동주의 재판기록에 나타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명을 들어 그가 저항시인이라고 하지만, 사실 재판기록을 떠나서 윤동주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독립운동을 했다는 족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체포될 당시에 윤동주가 독립운동을 했을 수도 있다. 당시의 독립운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잠행하는 일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혹시 생체실험으로 죽었다는 근거를 들이댈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후쿠오카 감옥에는 그런 실험으로 죽어나간 조선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고, 그들이 나는 그렇게 죽었기에 굳이 독립운동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가 체포되기 이전에 쓴 시를 놓고 이것이 저항시라고 단정 지을 근거도 없다. 위에서 내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말이다.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습작을 포함하여 약 육백 편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습작시를 뺀 완성도 높은 시가 백 여 편 정도라고 하는데 그 시를 다 훑어봐도 저항시라고 손꼽을 만한 시가 전혀 없다. 몇 편 남아있는 그의 산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글의 서두에서 비평가는 작품과 작가를 문학사의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작가의 생애와 그 정신 그리고 작품이라는 잣대로 민족시인을 평가한다. 이런 명제 앞에서 나는 단호히 윤동주를 저항시인의 자리에서 빼내어 인간실존을 탐구한 생명시인이라는 자리에 위치시킨다. 저항시라는 색채로 윤동주의 시를 해석하면 오히려 그 문학적 진실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고한 윤동주 시인을 올바르게 기리는 일이요 그의 문학세계에 반하지 않는 후대의 대접이 아닐까 한다. (끝)

 

2007,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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