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잠의 철학

미송 2022. 12. 23. 12:31

 

사람들은 어둠과 잠의 아들인 꿈의 작은 신을 모르페라고 부른다. 흔히 그 신은 나비 날개를 달고 손에 양귀비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에게는 사생아인 딸이 하나 있는데 좋은 일 나쁜 일을 다 같이 할 수 있는 그 딸의 이름이 바로 모르핀(Morphine)이다. 꿈의 신은 우리 삶의 삼분의 일을 지배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당연히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1962년 미셸 주베 교수는 '역설적인 잠'과 각성 상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혁신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역설적인 잠은 꿈의 상태에 해당된다. '역설'이란 심장 박동의 증가와 빠른 안구 운동을 동반하면서 피실험자를 마비시키는 근육이완 상태를 말한다. 몸은 그 어떤 기계적이거나 화학적인 덫에 걸려 있는 반면 두뇌는 그 살과 뼈의 감옥 속에서 온갖 환영들에 시달리면서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는 인간의 형국이다.

 

꿈은 수미일관하지 못하다는 점에서만 깨어 있는 상태와 구별된다. 그렇게까지 터무니없는 세계라면 분명 환상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당신이 저녁에 잠들 때마다 그날 아침에 잠을 깨면서 떠나왔던 매우 수미일관한 또 하나의 삶을 다시 살게 된다고 가정해보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양쪽 다 똑같은 현실성을 지닌 두 가지의 평형된 삶을 갖게 되는 셈이다. 사실 이런 이중의 삶을 사는 인간의 경우를 이야기로 만들어볼 생각을 한 소설가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잠은 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기야 인간은 잠을 자면서 항상 꿈을 꾸지만 잠에서 깨면 오직 가장 피상적인 꿈들만 기억하게 된다고 앙리 베르그송은 말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한 번도 증명된 바가 없다. 아무런 환영도 나타나지 않는 순수한 잠은 아마도 역설적인 잠보다 더 나은 휴식이 될 것이다. 그 잠은 어찌나 완벽한 휴식이 되는지 작은 죽음 같아 보인다. '산다는 것은 일종의 질병인데 잠이 16시간마다 한 번씩 고통을 덜어준다. 그것은 일시적 치료에 불과하다. 죽음만이 진정한 약이다.' (샹포르) 랭보의 유명한 시는 저 가짜의 '골짜기에서 잠자는 사람'에게서 진정한 죽음을 찾도록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어둡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사실은 잠자는 사람도 나름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엔 아주 잘 살고 있다. 잠은 행복의 한 형태다. 밤에 잠자고 있는 사람이 자세를 바꾸는 모습에서는 근육 운동의 강렬한 관능이 느껴진다. 과연 잠자는 사람들은 대부분 많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들은 차례로 네 가지 자세를 취한다. 그 네 가지는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등을 깔고 자는 사람은 얼굴을 하늘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믿음과 희망 속에서 경건하게 휴식하는 와상(臥像)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있느냐 아니면 왼쪽, 다시 말해서 가슴 쪽으로 돌아누워 있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측면자세가 있다. 두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긴 '웅크린' 자세는 출생전의 태아 자세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그 자세로 잠자는 사람은 침상을 어머니 뱃속의 환영으로 삼는 것이다. 잠이 깨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은 거친 세상 속으로 태어나는 일이다.

 

배를 깔고 엎드려 자는 사람은 대지의 보호를 구하는 것 같다. 그것은 마구 퍼부어대는 포탄 속에서 병사가 취하는 자세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유아를 등 쪽으로 눕혀(대륙식) 재워야 하느냐 아니면 배 쪽으로 엎어(미국식) 재워야 하느냐에 대하여 논란이 분분하다. 통계에 따르면 엎드려 재운 경우에 급사하는 유아의 사례가 더 잦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끝으로 유아의 두개골(短頭)이 만들어지고 배 쪽으로 엎어놓아 머리를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리고 있게 하면 타원형 두개골(長頭)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해두자.

 

키레네의 철학자 아리스티포스는 눕는 자세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폭군들의 환심을 사는 기술에 능하다 하여 디오게네스는 그를 '왕의 개' 라고 불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폭군들은 귀가 발바닥에 붙어 있는데 난들 어쩌겠는가?"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그대가 일어나는 것이 과연 신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대 자신에게 요긴한 것인가를 일곱번 자문해보라."

 

미셸 투르니에 산문집 <예찬> (2000, 현대문학) P84~86  

 

 

한 번도 깨지 않고 여덟 시간 이상 잠들어 있었다. 지난 밤 자연스럽게 잠이 다가왔던 것, 아침에 기지개를 펼 때 어깨가 저릿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였나, 또또는 달려들어 핥지 않고 오도카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신기하여 또또 하며  일어나 앉았다. 오래전 기록해 둔 잠에 대한 산문 일부를 다시 읽는다. 산문집 제목이 예찬이라니.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그대가 일어나는 것이 과연 신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대 자신에게 요긴한 것인가를 일곱 번 자문해보라. 이 구절에 새삼 미소 짓게 된다. 꿀잠 덕분이다. <오>

 

20120610-202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