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라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그 책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바는 정확히 조르바가 되라는 것입니까?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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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생 동안 희랍인 조르바였다. 나는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 책은 곧 나의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 바가 그 책에 나와 있다.
삶을 즐겁고 편하게 대하라. 삶을 느긋하게 대하라.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어 내지 말라. 그대가 가진 문제의 99퍼센트는 삶을 심각하게 대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심각함이 모든 문제의 뿌리다.
밝고 유쾌하게 살아라. 밝게 산다고 해서 놓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삶이 곧 신이다. 하늘 어딘가에 앉아 있는 신은 잊어라. 활기차게 살아라. 생동감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라. 마치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매순간을 살아라. 그대 삶의 횃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라. 단 한순간만 그렇게 산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강렬하고 전체적인 한 순간이 그대에게 신(神)의 맛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그대는 미적지근하게, 부르주아나 중산층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수만 년 동안 질질 끌려 다니듯이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길 위의 먼지 부스러기만 긁어모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투명하고 전체적인 한순간,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한순간을 살아라. 불꽃처럼 타올라라. 단 한 순간이면 충분하다. 이 한순간이 그대를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대는 이 순간을 통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나의 산야신들에게 주는 메세지이다. 후회나 미련이 남지않도록 강렬하게 살아라.
한 친구가 이런 내용이 담긴 쪽지를 보내왔다.
한 저널리스트가 여든다섯 살이 된 노파에게 만일 다시 한 번 살게 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었다. 노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에는 훌륭한 통찰력이 담겨 있으니 귀담아 들어라.
'다음 생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를 거예요. 편하고 느긋하게 살 거예요. 이번 생보다 더 단순해 질 것이고, 만사에 덜 심각해 질 거예요. 나는 더 많은 기회와 여행을 즐기고 싶습니다. 등산과 수영도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것이고, 콩은 덜 먹고 싶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는 더 많아지겠지만 추상적인 문제는 줄어들 것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주 건전하고 정상적으로 산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만의 순간들을 더 많이 갖고 싶습니다. 사실, 그런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을 끌려 다니듯이 사느니 순간순간을 즐기고 싶습니다. 나는 보온 물병과 우산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아무데로도 가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훨씬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하고 싶습니다. 맨발로 해변가를 걷는 것도 재미있을 거예요. 춤도 더 많이 출 것이고, 회전목마도 더 많이 탈 것입니다. 또한 데이지 꽃도 더 많이 꽂아 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산야신들에 대한 나의 비젼이기도 하다. 이 순간을 가능한 한 전체적으로 살아라. 지나치게 정상적인 삶을 살지 마라. 지나친 정상은 비정상으로 달려간다. 그대 안에 어느 정도의 광기가 존재하게 하라. 그것이 삶에 향기를 가져다 준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비합리성이 존재하게 하라. 이것이 그대로 하여금 여유와 쾌할함을 갖게 한다. 이것이 그대가 릴렉스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상적인 사람은 철저하게 머리에 매달려 있다. 그는 그곳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그는 꼭대기 층에서만 살아간다. 모든 곳에 걸쳐서 살아라. 이 모든 곳이 그대의 집이다. 꼭대기 층도 좋고 아랫층도 좋다. 지하실 또한 훌륭하다. 모든 영역에 걸쳐 살아라. 이 모든 곳이 그대의 집이다.
나는 이 노인에게 다음 생을 기다리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다음 생은 결코 오지 않는다. 내 말은 그대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대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고, ABC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노인은 전에도 이 세상에 있었다. 전에도 수백만 번이나 이 세상에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매번 여든다섯 살쯤 되면 '다음 생에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다음 생이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문제이다. 전생의 모든 기억이 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 생을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누리라. 이 순간이 유일한 시간이다. 이 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없다. 그대가 여든다섯 살이라 해도 이런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여든다섯 살에 무엇을 잃겠는가? 봄에 맨발로 걷는다 해도, 데이지 꽃을 모은다 해도, 설령 그러다가 죽는다 해도 아무것도 잘못될 게 없다. 해변가를 맨발로 걷다가 죽는 것이야말로 죽기에 좋은 방법이다. 데이지 꽃을 모으다 죽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대가 여든다섯 살이든 열다섯 살이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순간을 누려라. 조르바가 되라. 그대는 묻는다.
당신은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 라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그 책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 책을 사랑하는 데 그치지 말라. 그것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조르바가 되라. 때때로 지금의 그대와 정반대되는 것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대는 지금의 자신과 정반대되는 것을 즐긴다. 이것이 그대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대에게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조르바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책을 사랑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이것이 역사 이래 사람들이 계속 해오는 일이다. 그들은 성경책을 사랑하지만 예수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반야심경을 사랑하고 날마다 몇 번씩 독송한다. 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 등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다섯 번씩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반야심경은 짧은 경전이기 때문에 몇 분이면 독송할 수 있다. 그들은 이 경전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 경전 자체가 되지 못한다.
조르바가 되라. 책을 사랑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오직 조르바로 존재하는 것만이 도움을 준다. 이것을 잊지 말고 명심하라.
저는 그 책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바는 정확히 조르바가 되라는 것입니까?
정확히는 아니다. 나는 세상에 똑같은 조르바들이 존재하는 것을 원치않는다. 그것은 단조롭고 지루하며 추한 일이다. 그대는 그대만의 방식대로 단 한 명의 조르바가 되어야 한다. 희랍인 조르바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코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말라. 그것은 자살 행위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삶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항상 복사본일 뿐, 결코 원본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진, 선, 미, 해탈, 명상, 사랑 등 가치 있는 것들은 원본에게만 일어난다. 결코 복사본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경계하라. 희랍인 조르바와 똑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단순히 조르바를 흉내내기 시작하면 그대는 문제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짓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을 보라. 힌두교인들을 보라. 그들은 똑같이 흉내내려 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시는 고타마 붓다가 될 수 없다. 신은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은 복사품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원본만을 사랑한다. 그는 고타마 붓다를 사랑했다. 그는 고타마 붓다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 사랑은 끝났다. 이제 고타마 붓다와 똑같은 사람은 필요없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관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 전에도 여러 번 읽었던 책을 또 보는 것과 같다. 신은 그렇게 둔하고 멍청하지 않다.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는 단 한 번 존재했으며, 고타마 붓다도 단 한 번 존재했다. 그대 또한 단 한 번 존재한다.
그대는 단 한 명이다. 그대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그대만이 그대이다. 이것을 나는 '삶에 대한 존중' 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 존중이다. 조르바에게서 배워라. 그의 비밀을 배워라. 그러나 절대 그를 모방하지는 말라. 조르바의 분위기와 맛을 배우고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라. 조르바와 어울려라. 그러나 그대만의 길을 가라. 그대 자신이 되라.
오쇼라즈니쉬<반야심경 237~241쪽>
20100806-20230125 타이핑 채란
" 대체 저 신비한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고 또 묻는다. …… 그는 남자나, 꽃 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르고 있는지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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