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르네지라르,『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미송 2022. 9. 13. 12:18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이 책은『폭력의 성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진 르네 지라르의 첫 번째 저서이며 많은 문학인들의 관심을 끈 문학비평서이다.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보여준 것으로도 유명한 이 책은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그 대상을 욕망하게 만든 타자가 숨어 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중요한 소설 인물들의 심리학을 분석한다. 돈키호테는 아마디스를 통하여 완전한 기사를 꿈꾸고¸ 엠마 보바리는 그녀가 탐독하던 삼류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하여 사랑의 대상을 키운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욕망은 욕망의 주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매개되고 촉발된다. 위대한 소설은 대체로 주인공의 삶과 욕망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욕망의 허위성을 깨닫게 하거나 진정한 욕망의 의미를 일깨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적인 메시지다.

 

- 추천인 : 오생근(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르네지라르 욕망의 삼각형

 

르네 지라르는 문학 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였습니다. (아도르노나 벤야민 처럼 사상가가 아닌만큼 좀 더 쉬운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는것 같아요) 그는 1961년에 그의 첫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소설 주인공들의 욕망의 체제를 통해서 인간의 욕망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소위 '욕망의 삼각형 론'을 주장합니다. 그가 이 책에서 언급한 소설은 돈키호테 ( 세르반테스 ) 보바리 부인 = 마담 보바리 ( 플로베르 ) 적과 흑 ( 쓰땅달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프루스트 ) etc.

 

이외에 도스토프예스키의 소설들을 면밀히 거론하였습니다. 지라르는 소설속의 인물들이 어떠한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통해서 어떠한 대상을 욕망한다는 (원한다는)것을 밝혀냈습니다. 지라르에 따르면 어떠한 인물의 욕망이 독창적이라는 낭만적인 믿음은 거짓, 또는 자기 기만입니다. 사실 욕망은 타자가 이미 욕망한 것을 자신도 향유하려는 바람에서 나온 것 입니다. 기사가 되고 싶은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을 읽고 전설적인 기사 아마디스의 삶을 욕망합니다. (주체 : 돈키호테, 대상 : 기사도, 중개자 : 아마디스). 파리 사교계를 동경하는 보바리 부인은 삼류 소설을 읽고 그 안에 나오는 파리 여인들의 삶을 욕망합니다. (주체 : 보바리 부인, 대상 : 파리 사교계, 중개자 : 삼류 소설 속 파리 여인들). 이처럼 욕망은 낭만주의자들이 믿는 것 처럼 자발적인것이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일어난 비자발적 욕망입니다. 주체는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것이 아니라, 타자가 욕망한 것을 통해서만 욕망할 수 있으며, 욕망의 기본 구조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욕망의 중개자가 존재합니다. (삼각형)

 

따라서 욕망이란 늘 모방의 욕망이며,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려는 욕망 모방의 결과물입니다. 이때, 욕망을 중개하는 과정은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그것이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 입니다. (외적 중개와 내적 중개 ) 외면적 간접화는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가 서로 접촉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떨어져 있는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때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외형적으로 선언하고 모방은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추구되지요.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가 뛰어넘을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돈키호테와 아마디스 처럼) 이때에는 주체의 욕망이 '모방욕구' 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내면적 간접화는 주체와 중개자가 서로 어느정도 깊이 침범할 만큼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져 있습니다. (동일세계 소속) 이때 중개자는 오히려 경쟁자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욕망이 모방 욕구라는 것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공개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부정됩니다. 욕망의 주체는 중개자를 찬탄하면서도 증오하게 되는데 이것은 두 존재가 같은 욕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타인의 욕망을 지라르는 허영심이라고 이야기 하였구요, 자신의 내부에서 생겨난 욕망을 열정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러한 삼각형의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이 지니고 있습니다. (성인 군자가 아닌 이상). 그러나 자신은 삼각형의 욕망에 대해 자각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끝없는 이야기 이네요. 욕구만을 채우고, 욕망을 버린다는것이 가능할까 생각해볼만한 문제입니다.

 

 

 르네 지라르의 삼각형의 욕망

 

이 책의 저자 르네 지라르는 1923년 남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났다. 파리 고문서학교와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과 뉴욕 주립대학, 스탠퍼드 대학등에서 정교수, 석좌교구 등을 지내며 프랑스의 역사. 문화, 문학, 사상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그의 저서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지만 문학작품의 분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폭력과 구원에 관한 주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짜 욕망과 가짜 가치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발생구조주의의 방법으로 다룬 뤼시앵 골드만은 <소설사회학을 위하여>에서 그의 이론적 출발점이 된 두 권의 책을 들고 있는데, 그 하나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다. 서사시에서는 주인공이 살고 있는 삶과 그가 소속된 집단의 이념 사이에 단절이 없는 일치현상이 있는 반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이상과 그가 살고 있는 현실 사이에 단절이 있기 때문에 모든 소설의 주인공은 그 단절을 극복하고자 한다. 소설 주인공의 모든 욕망은 중재자에 의해 암시된 가짜 욕망으로 삼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지라르의 이론을 토대로 골드만은 시장경제체제의 자본주의사회와 소설 사이에서 구조적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이론화하여 소설사회학을 정립하고자 한다.

 

시장경제체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한 가치인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 진정한 가치인 교환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가짜 가치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은 소설의 주인공이 자연발생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중재자에 의해서 암시된 욕망을 품는 것과 동일한 구조이며, 작가가 처음에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여 소설을 쓰지만 그것이 시장에서 교환가치에 따라 평가됨으로써 교환가치를 추구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동일한 구조이다. 그래서 골드만은 소설이란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장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소설이 부르조아 혁명과 함께 문학의 장르로서 각광받은 것과, 시장경제체제와 구조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구조와 시장경제의 교환 구조와의 상동관계에 주목한 골드만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감추어진 구조를 밝혀낼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지라르는 욕망이라는 심리적 기제의 구조를 통해서 기독교적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삼각형의 욕망 이론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오늘날 우리의 욕망의 체계를 소설 주인공이 욕망의 체계에서 발견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성을 제시한 명저이다.

 

이 책에서 맨 먼저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이다. 그가 이 소설의 분석에서 얻어낸 결론은 <돈키호테>의 주인공들의 욕망은 간접화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이 무엇을 욕망하다는 것은 그 개인이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때 초월은 자기가 욕망하게 되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려보면 개인에 해당하는 주체가 밑에 있고 대상이 그 수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돈키호테>에서 살펴보면 주인공 돈키호테는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가 되고자 한다. 여기에서 돈키호테는 주체가 되고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그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가 되기 위하여 아미디스라는 전설의 기사를 모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돈키호테는 직접 이상적인 기사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디스를 모방함으로써 거기에 도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상적인 기사도에 도달하고자 하는 돈키호테의 욕망은 아미디스라는 중개자에 의해 간접화되고 있으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간접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주체의 욕망이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상승하여 중개자를 거쳐 대상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간접화 현상은 기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구조이다. 어느 기독교인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곧 예수라는 중개자를 모방하면 된다. 이때 기독교인과 예수와 진정한 기독교인은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의 대상과 그 욕망의 중개자가 삼각형의 구조를 갖게 되고, 이처럼 간접화한 욕망을 '삼각형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지라르는 현대인의 욕망은 이처럼 삼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면서 소설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욕망의 왜곡되고 비진정한 속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로써 시장경제체제 사회 속에서 개인은 그 욕망마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암시된 욕망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제시한 셈이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공의 욕망의 구조와 주인공을 태어나게 한 사회의 경제구조 사이에 구조적인 동질성을 발견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지라르는 따라서 돈키호테의 욕망이 돈키호테의 내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미다스라는 중개자에 의해 암시됨으로써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종래의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산초 판사를 현실주의자로 규정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진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실이 아니다. 예전에는 산초 판사의 욕망(작은 섬 하나를 소유하는 것, 딸에게 공작부인의 칭호를 갖게 하는 것)이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를 현실주의자로 보았다.

 

그러나 지라르는 산초 판사의 바로 그 두가지 욕망이 그의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욕망이 아니라 그의 주인인 돈키호테에게서 암시 받은 욕망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의 욕망의 중개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라르는 이처럼 하나의 작품이 여러 개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가 분석하고 있는 스탕달의 <적과 흑>, 플루베르의 <보바리 부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주인공들의 욕망이 여러 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지라르는 모든 삼각형의 욕망이 동일한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좀더 복합적인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더욱 복합적이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삼각형의 구조에서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분석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둘 사이의 거리이다.

 

다시 말하면 돈키호테에서 주체 돈키호테와 중재자 아마다스는 동일한 세계에 있지 않다. 즉 아마다스는 전설적인 가공의 인물이어서 돈키호테와 만날 수 없는 인물이다. 이때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는 극복될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다. 그런 관점에서 주체로서의 산초 판사와 중개자로서의 돈키호테 사이의 거리는 함께 다니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때의 거리를 물리적인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돈키호테는 주인이고 산초 판사는 시종이기 때문에 둘이 함께 다닌다고 해서 그 둘 사이의 거리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초 판사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주인의 자리를 꿈꾸어 본 적이 없고 주인과 경쟁해보고자 한 적이 없다. 그것은 두 인물이 동일한 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엄연하게 구분되는 정신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 중략 > 

 

오늘날 우리 자신의 욕망이 고도 산업사회의 광고에 따라서 도발되고 간접화하는 현상을 다시 말하자면 즉 사용가치에 따라 어떤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경쟁관계, 즉 교환가치에 따라 어떤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경쟁관계라는 내면적 간접화 현상은 바로 가짜 욕망에 해당하며, 골드만의 표현에 따르면 교환가치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의 욕망마저 간접화시켜버린 오늘의 사회에서 소설 주인공의 욕망이 더욱 심한 간접화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지라르는 욕망의 간접화 현상을, 다시 말하면 삼각형의 욕망을 프루스트나 토스토예프키의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그 주인공들에게서도 발견해낸다. 가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 마르셀이 어른이 되어 속물근성을 보일 때에도 욕망의 간접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스탕달에게서의 허영심이 프루스트에게서 속물근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욕망된 대상의 변모는 스탕달에게서보다 프루스트에게서 더욱 극심하고, 질투와 선망은 더욱 빈번하여 더욱 강렬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모든 인물의 경우 사랑이 질투에, 즉 경쟁자의 존재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욕망의 발생에서 중개자가 행하는 특권적인 역할이 전보다 더욱 명백해진 것이다. 프루스트의 화자는, <적과 흑>에서 대부분 암시만으로 그쳤던 삼각형의 구조를 매순간 분명한 언어로 정의하고 있다. < 중략 >

 

1830년대 귀부인들의 신앙심, 달콤한 이타주의, 위선적인 사회 참여의 이면에서 스탕달은 실제로 자신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고귀한 돌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허영심의 궁여지책을 발견하며, 스스로 욕망을 갖기에는 무력한 자아의 원심운동을 발견한다. 소설가는 자신의 인물들이 행동하고 말하도록 한 다음 눈짓으로 우리에게 중개자를 드러내준다. 그는 비밀리에 욕망의 진짜 서열을 재확립하면서도, 정반대의 서열을 믿게 하려고 그의 작중인물이 내세우는 그릇된 이유를 믿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스탕달이 사용하는 아이러니의 항구적인 한 방식이다.

 

낭만적인 허영심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이미 있다고 언제나 확신하고 싶어하거나,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겠지만, 자신의 욕망이 평온한 주체성에서 우러나온 것, 즉 거의 신에 가까운 자아의 무(無)로부터의 창조라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대상을 보고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욕망이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따라서 사실상 타인으로부터 욕망을 취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이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자연적인 상태이다. 어린애는 외부에서 오는 모든 충동에 대해 특별한 감수성을 나타내며, 동시에 인간의 학식에 의해 획득된 지식들, 그리고 그 지식들을 전달 가능하게 만드는 개념 속에 갇혀 있는 지식들에 대해서 놀라운 갈망을 보여준다.

 

낭만적 자만심은 경쟁자의 주장을 때려 부순 잔해 위에 자신의 자율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중개자의 존재가 타인들에게 있음을 기꺼이 폭로한다. 타인들의 진실이 주인공의 진실이 될 때, 즉 소설가 자신의 진실이 될 때 소설의 재능이 발휘된다. '오이디푸스- 소설가- '는 타인들을 저주한 다음에야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자만심은 결코 자신의 중개자에게까지 미치지 못한다. <되찾은 시간>의 경험은 일종의 자만심의 죽음이고 겸손의 탄생이며 또한 진실의 탄생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겸손의 무서운 힘을 찬양할 때, 그는 소설의 창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 또한 욕망과 증오, 사랑과 질투를 말하면서도 이 모든 감정들의 동가성(同價性)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장 상퇴유>에서 그는 증오에 대해 삼각형의 훌륭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 삼각형의 정의가 또한 욕망의 정의이다.

 

증오심으로 인해 우리는 매일 적들의 삶에 대해 가장 허위의 소설을 쓰고 있다. 증오심은, 우리 내심에 측은지심을 일으킬 누구에게나 공통된 고통을 겪은 후에 느끼게 되는 인간적인 평범한 행복 대신 커다란 기쁨은 우리의 분노를 자극하게 된다. 증오심은 욕망만큼이나 변모시킨다. 그리고 욕망처럼 우리를 인간의 피에 목마르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증오심은 기쁨이 파괴되어야만 충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의 파괴를 가정하고, 그렇게 믿고, 영원히 파괴된 것으로 본다. 증오심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괘념하지 않으며, 꺽이지 않는 희망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김치수 (이화여대 불문학교수)

 

20090323-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