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심보선<좋은 일들>

미송 2012. 6. 14. 23:26

좋은 일들 / 심보선

오늘 내가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을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서너 개의 풍경이 동공에 깃든다. 같은 재료로 어떻게 그리느냐 어떻게 주물러 만드느냐 하는 건, 시인의 재능이자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나무랄 데 없는 스케치와 자신을 관조하려는 객관화의 노력과 미래에 대한 노련한 예감으로, 마치 퀼트를 엮듯 예쁘게 짰다. 눈물이 흐르지 않은 것도 장한 일이다. 하지만 더욱 더 갸륵한 건, 용기들을 제 몸 구석까지 알알이 흘려보낸 그의 붉은 심장! 그것이 비록 착란이었다 말해도, 착란일지라도.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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