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방민호의 시편들

미송 2012. 6. 16. 06:05

 

 

 

1

행복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

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

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

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 속에 누웠다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

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상한 간과 후회뿐

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

 

 

2

빙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과 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당신은 내 아픈 눈동자 속으로 내 안에 들어와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당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당신이 가라는 곳으로 가

당신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오

사랑이 깊으면 아픔도 깊어

나는 당신이 아픈 곳에 손을 대고

당신과 함께 웃지.

 

 

3

어떤 가입신청서

 

살아서는 콩팥 하나를 떼어낼 수 있다

사후에는 각막을 기증할 수 있고 뼈만 가려내 기증할 수 있고 갈비뼈 아래 숨겨온 내장까지 기증할 수 있고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해부용으로 바칠 수도 있다

깊고 깊은 잠에 빠졌을 때는 숨이 멎기 전에 심장, 간, 폐 따위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

빚을 얻으러 은행에 들어갔다 죽으면 육신을 불에 태우겠다는 서약이 든 입회원서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바다는 내 몸 안에 뼈가 되어 들어와 있다는 생명의 신비 다큐멘터리 본다

중력을 견디느라 말라버린 나의 뼈를 곱게 빻아 수심 깊은 바다 물고기 밥으로나 줄까

바다는 먼데 몸은 이미 깊은 물 속

뜬 눈으로 아가미 숨 쉬며 깊은 잠 청한다.

 

 

4

나의 벤야민

 

는 벤야민을 닮은 사내

어깨 위에는 그를 괴롭히던 곱사등이가 앉아

내 길을 환하게 굽어본다

나찌 피해 피레네 산맥 넘다 자살해버린

그이처럼 살고 싶지 않아

규격에 맞는 논문을 쓰려 한다

염소처럼 종잇장만 삼키며 연명해야 했던

그이처럼 되고 싶지 않아

금화 주는 직업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나는 벤야민을 닮은 사내

남 몰래 모르핀을 사 모은다

그이의 곱사등이가 손가락을 아래로 구부려

바로 이 자리야,

갑작스레 선언해버릴지도 모를

단 하룻날의 행복 위해

긴 불행 즐긴다.

 

 

5

괭이 1

 

남모르는

내 작은 반지하방에

괭이 한 마리 살고 있었네

나 외롭고

괭이도 외로워

우리 서로 정 깊은 동무였네

외출에서 돌아오면

이는 내 품에 안겨들어

야웅, 소리 내고

제 볼을 내 가슴에 부비고

장난 그리운 아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네

나밖에 모르고

하루 종일 나 없는 빈 방 지키며

나만 기다린 내 괭이,

나도 녀석의 목덜미 만져주고, 등허리 쓸어주고, 여린 발톱마저 애무해 주다 보면

시간은 나와 내 괭이 옆에 영원히 멈춰 서 있을 줄 알았는데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나만 알던 내 반지하방은

나만 기다리던 내 괭이는

내 괭이 위해 노란 수선화 안고 돌아와

내 괭이와 같이 그 긴 여름 장마 빗소리 밤새 듣던 나는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을까.

 

 

6

사랑

 

잘라도 다시 자라는

머리카락이지요

아플 때도

까맣게 빛나는 머리카락

마음 어지럽히는 긴 머리가 싫어

끊어버리려 해도

끊어낼 수 없는 머리카락

깊은 물에 몸 던져 죽어버려도

자라나 수초 되어

물의 꽃을 피워 올리는 머리카락

왜 제 허파 속에

당신 머리카락 심으셨나요

밤에는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실 것을

왜 꼭 한 번

큰 발 벗어 제게 내미셨나요

허파에서 자라나

목을 타고 넘어와

긴 오월의 밤 가득

술렁이고 있는 이 수초들은

머리카락이지요

당신이 심으셔서 제가 길러야 했던

아파서 더 까맣게 빛나는

머리카락이지요.

 

 

7

나의 가네코 후미코

 

밤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13층에서 나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강을 멈추지 않는다 텅, 하는 파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산산조각이 난다 날카로운 철골 조각이 내 심장을 찌른다 나는 찌그

러진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방문을 열면

어둠 속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은박으로 처리된 그녀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다 나는 푸른빛이 감도는 가네코 후미코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당신이 그리웠어 가네코 후미코

당신의 차가운 눈, 꿈결처럼 퍼지는 검은 머리칼, 가늘고 흰 목덜미……

당신처럼 나도

투명한 물에 뿌리 내릴 수 있을까

형체 없는 물을 디디고 푸르게 솟아오를 수 있을까

흙을 버릴 수 있을까

꿈속인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당신 가네코 후미코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어, 피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조국을 버리고 싶어

스물세 살에 목숨을 버린 가네코 후미코가 독방에 앉아서 수기를 쓰다 말고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바다를 건너왔다 바다를 건너간 내 아름다운 가네코 후미코가 이 밤에도 내게

무정부주의를 타전한다

밤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13층에서 나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자이로 드롭처럼 시속 94km의 속도로 수직 하강한다

나는 두개골이 파열되고 척추가 바스라진다 찌그러진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돌

아오는 나에게 가네코 후미코는 무슨 꽃일까.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방민호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비평》신인평론상 수상, 2001년 《현대시》로 시 등단. 저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등.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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