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면
너를 만나면 우선 타버린 심장을 꺼내 보여야지 다음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해야지 잘 익은 빵을 한 바구니 사야지 너를 만나면 우선 웃어야지 그럼 나는 두배나 커지겠지 너를 만나면 가을이 오겠지 세상은 온통 가을이겠지 너를 만나면 나는 세배나 커지겠지 식사를 하고 거리를 걸으면 백 개나 해가 뜨겠지 다신 병들지 않겠지 너를 만나면 기쁘고 한없이 고요한 마음이 되겠지 아아 너를 만나면 감기로 시달리던 밤들에 대해 전쟁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말아야지 너를 만나면 이렇게 비만 내리는 밤도 사랑해야지
난 달팽이가 좋아
난 달팽이가 좋아 난 무우도 좋아 하얀 무우 버석 버석 베어먹는 너의 입이 좋아 너의 코도 좋아 웃지 않는 너의 눈도 좋아 난 기차가 좋아 가을 기차는 더욱 좋아 난 철늦은 여행도 좋아 너하고 떠나면 더욱 좋아 난 룸펜이니까 난 알콜 중독자니까 난 너의 파아란 쟈켓이 좋아 난 저녁에 피곤한 네가 말없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좋아 해골같은 인생도 그때는 따뜻해 한번 타면 다시는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좋아 난 가을 닭장 앞에 머리를 숙이고 모이를 주는 네가 좋아 난 가을 바닷가에 모자를 쓰고 갈매기 밥을 주는 네가 좋아 난 달팽이가 좋아 그런데 달팽이는 밤에 어떻게 사랑을 할까?
시집<너라는 환상>(세계사, 1989) 中
빨래
나는 빨래를 하며/나는 나를 빨아 널며/나는 봄날 햇살 속에/하얀 빨래를 하며/나는 빨래에게 말한다/나는 물고기가 그립다/나는 굴 속은 질색이다/나는 굴 속에서 살았다/나는 눈부신 여자가 그립다/나는 그만큼 지쳤다/나는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나의 삶의 원칙은 피로였다/나는 화를 참았다/나는 곤충을 길렀다/나는 곤충이 흘리는 피를 보았다/나는 하늘에서 새가 흘리는/피도 보았다/어제 보았고 오늘 보고/ 벌써 내일 보았다/나는 굴 속에서 마침내/벌떡 일어났다 그러자/네가 나를 뚫고 달렸다/나를 뚫고 달리던/너는 나였는지 모른다/나는 욕을 했다/나는 전화를 걸었다/나는 술을 마셨다/망할 놈은 나였다/나의 손은 떨렸다/나는 한번도/맑은 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나는 흐린 정신으로 살았다/나는 살기가 어렵다는데/나는 흐리게나마 살았으니/나는 행복했다/나는 한번도/하얀 빨래가 될 수 없었다/나는 오늘도 빨래를 하며/나는 오늘도 나를 빨아 널며/나는 빨래에게 미안하다//
당신의 방
당신의 방엔/천개의 의자와/천개의 들판과/천개의 벼락과 기쁨과/천개의 태양이 있습니다/당신의 방엘 가려면/바람을 타고/가야 합니다/나는 죽을 때까지/아마 당신의 방엔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나는 바람을 타고/날아가는 새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방에 가면
그 방에 가면/병이 나을 줄 알고/그 방에 가면/이 마음 나을 줄 알고/정신없이/그 방에 갔더니/웬걸 그 방엔/못난 그리움/철없는 매춘부 애들/고달픈 마음만 가득하고/그 방엔 커튼이 있는데/그 방엔 커튼이 있는데/발가락에 때가 낀/맨발을 감추고/썩어가는 내 횡경막에서/문득 새가 날고/나는 더럭 겁이 나고/나는 병이 도지고/나는 병이 도지고/휴식커녕 위안커녕/ 혹시 누가 시인이라고/할까봐 더럭 겁이 나고/그 방에서 시인은/아름다운 몽상가라는데/몽상커녕 나는/악몽에만 시달리고/악몽의 시나 쓰고/그것도 제대로 못 쓰고/악몽을 다스리지도 못하니/그러니 누가 나를 시인이라고 할까봐/모자를 푹 눌러쓰고/뻑뻑 담배를 피우면서/그 방을 나오려고 했더니/갑자기 그 방에선/커단 손이 돋아나/와락 나를 잡았다/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 방에 가면/그래서 병이 나았던가?//
시집<당신의 방>(문학과 지성사, 1986) 中
사물 A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의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길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결국 나는 너이다
결국 나는 너이다/네가 있기 때문이다/네가 죽어가기 때문이다/나는 내가 죽어가기 때문이다/나는 있다 네가 죽어가기 때문이다/나는 있다 네가 죽어가기 때문에/나는 네 속에 박힌 돌이기 때문에/나는 너의 입/천당 같은 꽃잎/아니 나는 너의 배꼽/나는 너의 발/너의 발은 눈물이다/너의 발은 너의 손이다/너의 발은 뛴다/공기 속을 첨벙대며/멈추지 않는 것/비로소 눈을 뜨는 것/비로소 너의 눈 속에/타오르는 것/너의 눈 속에/타오르는 언덕과/타오르는 강물과/너의 눈 속에/타오르는 새와/웃음과 느낌/결국 나는 너이다
시집<사물들>(고려원, 1983) 中
당신의 초상
당신은 예수 같고
바다에서 돌아온 아침 같고 버림받은 애인 같고
수염만 자란 꽃잎 같고
사랑한 꽃잎 같고 피아골 같고
하늘이 버린 바다 같고
거대한 사랑 같고 무한히 작은 사랑 같고
아니 어려운 도시에서 수월한 도시로 떠나는
형편없는 천재 같고
예수 같고 목 마르고
아아 나이 서른 셋 비쩍 마른 당신은
바람 부는 저녁 바람 부는 저녁 같고
아침 같고
이승훈(李昇薰, 1942~ )
강원도 춘천 출생이며, 1962년《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하였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연세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초기 시들은 언어 자체를 대상화하는 작업에 집중하여 개념화를 거부하는 시세계를 주로 보여주었다. 시집으로 《사물들》,《당신들의 초상》,《당신의 방》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 《이상시 연구》,《반인간》,《시론》 등이 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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