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김행숙
저녁이면 손을 모으는 일을 했다
어느 날은 손이 뜨거웠다
권총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총의 환상이 사라지자
총에 맞은
한 마리 검은 새처럼 손만 남았다
밤에 서 있는 오뚝이는 항상
무용하게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오뚝이는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아닌가?
누구나 어린아이였지, 옛날부터
위험하게
어느 날은 손이 버려진 물건처럼 여겨졌다
길에서 주워 온 손을
저녁에 호주머니에서 꺼내는데, 몹시 배가 고팠다
그래서 까만 눈동자가 서서히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저녁에 손을 모으면
누구의 손이라도 모두 닮았다
계간 『시작』 2012년 여름호 발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 김경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 안의 빨간 나무 지붕이 있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극중의 한 기혼 중년 여인과 한 중년 독신 남자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네 그리고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헤어졌다네 불륜의 사랑이었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생(生)의 첫 번째 진정한 사랑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네 일생 중에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 남자는 늙어 죽기 전에 그 여인에게 일생중에 진정한 첫사랑이었노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품에 고이 안던, 이젠 백발이 성성해진 그 여인도 죽고 나서야 남겨둔 편지로 자녀들에게 고백했다네 아름다운 불륜을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진실한 사랑을 위해 죽기 전까지 가슴 깊숙이에 간직하고만 살았던 그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내가 서 있네 일생 단 한 번의 진실한 사랑을 위해 우리 사랑을 방해하던 검은 운명과 대결하러 가네 하지만 거대한 힘의 운명에 형편없이 매만 맞고서 내 사랑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헤어지고 함께한 시간들만 추억하며 한없이 쪼그라드네 그런 사랑은 끄기 위해 켜둔 촛불 밝지만 서러운 그 빛 안에서 피었다 지는 수선화였네 사랑했던 마음들이 땅으로 추락한 여름 과육처럼 멍이 드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일생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진실한 사랑을 만나기 위해 서 있네 그러나 단지 나무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 때문에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썩어가고 있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아프고 그 남자와 여자가 아프고 내가 아프고 내 애인이 아프고 그 사랑이 범인이고 세월이 공범이고 삶이 방관자였네 영화 안에서나 영화 밖의 세계 속에서도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나와 내 애인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숨겨진 투명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네 그러나 나는 아직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가 본적이 없네. 시집 『하얀 욕망이 눈부시다』(문학세계사, 1998) 중에서
산 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 김경수
산 속에 있는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그 안개는 물고기 모양을 하였다가 밤새 혼자서 불을 밝히고 논다 찻집 카페가 있는 그 밤의 산 속 어두컴컴한 안개 공원에 나무들이 흑백 영화관을 열었다 빛과 어둠만이 있는 그 공간에서는 소리와 감촉만이 진정한 시민이다 소리들과 차가운 감촉이 뛰어다니며 놀았고 모든 생물들이 관객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는 낙엽들도 저희들끼리 모여서 몸을 부딪혀 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위치를 알린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비가 일순간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지상을 강타할 때 안개 속에 묻혀 있던 산 속의 새가 공포에 질려 울었고 안개를 밀고 다니던 눈먼 바람은 새의 깃털을 흔들며 위로했다 산 속 찻집 카페에 사는 안개를 구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떼구름이 되기도 했다가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가늘고 길게 늘어선 비행운飛行雲이 되기도 했다가 자기가 원하는 모든 모습으로 바꾸며 노는 새털구름이 되기도 하였다 산 속 찻집 카페 출입문 앞에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시간동안 자유를 얻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늙은 구름이 정지했다 단 한 번의 자유로운 변신이 유일한 꿈이었다 일기예보보다 먼저 폭풍이 몰려왔다 미처 준비가 안 된 산 속 카페의 창문을 강풍이 무섭게 흔들었고 산 속 카페 내부에는 마음껏 변형을 즐기던 구름들이 공포에 떨었다 폭우 속에서 항상 우리는 죽음보다 무서운 불확실성을 먼저 만나며 우리는 만난 적이 없지만 헤어졌다 무서운 적막감이 해일이 되어 덮쳤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살아남기를 간절히 기도하였고 하루가 25시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지만 인생이라는 불확실성의 제국인 산 속 찻집 카페에서는 늙음은 오히려 축복이다. 시집 『산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시와사상사, 2012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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