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기쁨

진인각 ( 陳寅恪 , 1890-1969)

미송 2012. 8. 15. 13:31


무릇 한 문화가 쇠락한 시기에 이 문화에 감화된 사람은 반드시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문화를 표현한 정도가 더욱 클수록 그가 받는 고통 역시 더욱 심하며, 그 정도가 극도에 달하면 자살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안과 의()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다. …… 대저 금일 적현신주(赤縣神州)는 수천년래의 거겁기변(鉅劫寄變)에 처하고 있는바, ()이 다하고 변()이 끝나면 이 문화의 정신으로 응취(凝聚)된 사람이 어찌 운명을 같이하여 동진(同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관당(觀堂, 왕국유) 선생께서 죽지 않을 수 없는 소이였다.”

 

1927 6 2일 중국의 대국학자 왕국유(王國維)선생이 베이징 이화원 곤명호에 투신했습니다. “50년을 살았다. 죽을 일만 남았다. 변해가는 세상에서 더 이상 의()가 욕을 보게 할 수 없다라는 유서를 품은 채로요. 위 글은 또 다른 현대 중국의 대학자 진인각(陳寅恪, 1890-1969)이 관당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만사의 서(王觀堂先生詞序)’입니다. 현재 베이징 청화대학 캠퍼스에 있는청화대학 왕관당선생기념비명(淸華大學王觀堂先生紀念碑銘)’도 그가 쓴 문장입니다.

 

진인각은 중국 근현대에서 가장 박식했던 학자로 유명합니다. 일본,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세 차례에 걸쳐 16년간 해외유학을 했습니다. 언어의 천재였던 그는 영어, 독어, 불어, 일어는 읽고 듣고 말하고 쓰는 것에 모두 능통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러시아어, 티벳어, 몽고어, 만주어, 한국어, 산스크리트어, 힌두어, 이란어, 히브리어, 돌궐어, 투르크어 등 20여종의 고금 문자를 모두 익혔습니다.

 

특히 그는 중국의 13경을 모두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隨唐制度淵源略論稿수당제도연원략논고와 같은 역사 논문을 쓸 때 원전을 찾지 않고도 일필휘지로 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 베이핑(北平, 현재 베이징)에서 호적과 같이 난징으로 내려온 이후 그를 대만으로 모셔갈 비행기가 끝까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타지 않았습니다. 대신 상하이를 거쳐 배로 광저우로 갑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기반이 닦인 1953년 마오쩌둥은 지식인 재교육과 개조에 착수합니다. 공산당 중앙은 역사연구위원회를 설립하고 상고사연구소, 중고사연구소, 근대사연구소를 세웁니다. 각 소장에 곽말약, 진인각, 범문란을 내정합니다. 진인각의 애제자가 곽말약 당시 중국과학원 원장의 친서를 들고 그를 회유하러 광저우로 갑니다. 편지를 받은 진인각이 내세운 수락 조건이 당찹니다.


하나. 연구소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또 정치 학습도 하지 않는다.

둘.  바람막이를 위해 모공(毛公,마오쩌둥) 혹은 류공(劉公,류샤오치)의 윤허증명서를 요청한다.

 

위세 등등한 창업 왕조의 '황제'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 셈이죠. 그 후 파란만장한 그의 말년이 펼쳐집니다.

문화대혁명 초기 병석에 있던 그를 모욕하는 대자보가 수없이 나부낍니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는 거죠.

 

진인각 최후 20이라는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곧 출판된다는 소식입니다. 중국에서는 1995년에 출판되어 많은 지식인들을 울게 했다고 하네요.

 

陳先生的學問近三百年來一人而已라 대만으로 건너갔던 부사년(傅斯年)이 평한 그의 마지막 인생 역정입니다.


1953년 역사연구위원회를 만들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들어간 중국공산당은 당대 최고의 학자 진인각 포섭에 나섭니다.

회유 임무를 띠고 중산대학에 파견된 왕년의 제자 왕전(王 金+箋)에게 진인각은 앞 글에 적은바와 같이 두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12 1일 왕전과 다시 만나 장시간 대화를 나눈 진인각은 그에게 한 편의 글을 받아 적게 합니다. 다음은 진인각이 스스로 밝힌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입니다.

 

 

과학원에 회답함

 

 

나의 사상, 나의 주장은 내가 쓴 왕관당선생기념비명(王觀堂先生紀念碑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왕국유 사후, 학생 유절(劉節, 19011977) 등이 나에게 비문을 부탁했습니다.
당시는 마침 국민당이 통일을 완수한 때였습니다. 당시 청화교장은 나가륜(
羅家倫,1897-1969)이었습니다. 그는 CC(당시 국민당 중앙조직부장을 맡고 있던 陳果夫陳立夫 형제 일파)가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청화국학원 지도교수였습니다. 왕국유는 근세 학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비문은 천하 후세의 학문 연구자, 특히 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글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학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의지와 독립 정신을 갖추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때문에 내가 선비가 독서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릇 속된 진리(속체:
俗諦)질곡으로부터 심지(心志)를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적은 것입니다.

당시의 속체(
俗諦)’는 삼민주의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반드시 속체의 질곡을 벗어야만 진리가 발양됩니다. 속체의 질곡을 받으면 자유로운 사상이 없고, 독립 정신도 없을뿐더러 진리를 발양할 수도 없고 학술을 연구할 수도 없습니다. 학설의 착오 유무 여부는 논의할 수 있습니다. 나와 왕국유는 이런 관계였습니다. 왕국유의 학설 중에도 틀린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몽고에 관한 문제는 내가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학설에도 착오가 있을 수 있고 논의할 수 있습니다. 개인 사이의 언쟁은 응어리를 남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와 당신 모두 그러합니다.

내가 왕국유에게 쓴 글 중에서 양임공(
梁任公, 양계초, 1873-1929)을 질책했습니다. 양임공은 그것을 보고 단지 웃었을 뿐 응어리를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호적도 욕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정신, 자유사상을 나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이 독립정신, 자유사상만이 천만년이 지나도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해와 달과 별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왕국유의 죽음이 나진옥(
羅振玉, 1866-1940)과의 은원과 관계없고, 만청의 멸망과도 관계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의 죽음은 그 독립 자유의 의지로 보아야 합니다.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은 반드시 쟁취하는 것입니다. 생사의 투쟁을 통해서지요. 이런 이유로 비문에 사상이 자유롭지 않으면 죽느니만 못합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성인들이 동순(
同殉)한 의미입니다. 어찌 감히 비천한 제가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 적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작은 일이고 오직 이것만이 큰 일입니다. 비문에 적은 종지는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나는 결코 현 정권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선통(宣統) 3(1911) 스위스에서 자본론원문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먼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견해를 따르면 다음에 학술 연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요청하는 사람, 보살필 제자들 모두 자유사상, 독립 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학생이 아닙니다. 당신의 이전 생각도 나와 같지 않았습니까. 나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같지 않네요. 당신은 이미 제 학생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일량(
周一良, 1913-2001)도 좋고, 왕영흥(王永興)도 좋습니다. 내가 말하는 바를 따르면 곧 나의 학생이고, 아니면 학생이 아닙니다. 장래 내가 보살필 제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이 때문에 내가 중국사연구소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따르지 않고, 정치 학습도 않는 것을 윤허해 달라는 첫 조건을 내세운 것입니다. 그 뜻은 질곡을 원하지 않아서 입니다. 먼저 마르크스 레닌주의 견해를 갖고 학술 연구를 하거나 정치 학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나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이러하길 요구합니다. 나는 종래에 정치를 이야기 하지 않았고 정치에 결코 말려들지 않았을뿐더러 어떤 당파와도 관계 없습니다. 이는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모공(毛公) 혹은 유공(劉公)에게 윤허 증서를 요청해 방패막이로 삼겠다는 두 번째 조건을 내세운 것입니다. 그 의미는 모공은 정치상

             최고  당국자이고, 유소기는 당의 정치상 최고 책임자여서 입니다. 나는 최고 당국자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며, 나의 말을 따르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학술연구를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실제 여건을 말하면 한번 움직임은 가만히 있음만 못합니다. 내가 내건 조건을 과학원이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 것이며,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양난(兩難)입니다. 나는 광저우에서 매우 안정되게 있습니다. 내가 하는 연구작업은 이같은 양난이 없습니다. 내가 베이징에 가면 바로 양난이 생깁니다. 움직임도 곤란합니다. 나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혈압이 높고 병치레가 많습니다. 심장이 확대되어 어제는 토혈을 했습니다.


당신은 내 의견이 많건 적건 가지고 과학원에 가시오. 비문도 가지고 곽말약에게 보여주시오. 곽말약은 일찍이 일본에서 나의 왕국유 시를 보았습니다. 비가 아직 베이징에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비문을 가져가기 힘들다면 없애 버릴 수도 있습니다. 곽말약에게 하게끔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곽말약은 갑골문 전문가인 사당(
四堂)[왕국유(觀堂), 나진옥(雪堂), 동작빈(彦堂), 곽말약(鼎堂)]’의 한 명입니다. 아마 왕국유의 학설을 더 잘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한유(韓愈)역을 하고 곽말약은 단문창(段文昌)역을 해도 됩니다. 만일 어떤 이가 시를 짓는다면 그는 이상은(李商隱)역을 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당 헌종시기 회서(淮西) 토벌 경과를 한유가 평회서비(平淮西碑)’에 적었다. 조정에서는 이 비문이 당시 토벌대장인 이삭 장군을 지나치게 칭송했다 하여 비문을 지워버리고 단문창에게 다시 비문을 짓고 새기게 했다. 당시 시인 이상은은 사라진 한유의 비문을 시로 지어 인구에 회자시켰다는 고사]. 내 비문은 이미 세상에 전해졌으니 없앨 수 없을 겁니다.

 

 서슬퍼런 공산당 정권 초기 진인각이 대담한 요구 조건을 내건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와 독립정신은 학문의 기본이며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빠지면 학문을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상해방을 내세우는 지금의 공산당 지도부라면 진인각의 요구에 어떻게 답할까요? 바로 현대 중국의 지식인들이 답해야 할 문제라 생각됩니다.


 

 

진인각(陳寅恪, 천인커). 1890-1969년에 살았다. 중국 4대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장개석이 대륙의 학자들을 대만으로 이송할 때 대만으로 넘어가지 못해 대륙에 남게 된 진인각은 63세때(1953) 중국정부로부터 중고사(中古史) 연구소 소장을 맡으라는 상부 명령을 받았다. 그때 그는 “연구소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라고 조건을 내세웠다. 연구소는 단지 학문 연구 기관의 성격만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1957년부터 중국대륙에서는 反우파투쟁이 본격화되었다. 그때 진인각은 좌파들로부터 ‘부르주아 전문가의 대표’, ‘늙은 고집불통’, ‘가짜 권위자’와 같은 소리를 들었으며, 심지어 고음의 스피커를 진인각의 처소 안팎에 설치하여 2년 넘도록 비판하는 소리를 듣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의 세월을 견뎌내면서 진인각은 “무릇 하나의 문화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그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은 반드시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 등 고전을 읽고, 13세에 일본으로 가서 4년간 수학했다. 21세(1910)에는 국비로 독일, 프랑스로 유학했다. 베를린대, 취리히대, 파리고등정치학교 등에서 공부했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했다. 29세(1918) 다시 출국하여 미국 하버드대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31세 다시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다. 36세(1925)에 귀국했다. 그의 유학은 3번에 걸쳐 16년간이다.

 

그는 비교언어학을 공부했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모국어인 중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러시아어, 티벳어, 몽고어, 만주어, 한국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힌두어, 이란어, 히브리어, 돌궐어, 동투르크어, 회홀어, 토카르어(Tokhar), 서하어(西夏語), Kharosthi어 등 21종이다.


그는 ‘독서노트’ 64권을 남겼는데, 티벳어 독서노트가 13권, 몽고어 6권, 돌궐어 1권, 회홀어 14권, 토카르어 1권, 서하어 2권, 만주어 1권, 한국어 1권, 중앙아시아어/신강어 3권, Kharosthi어 2권, 산스크리트어 10권, 팔리어 1권, 자이나교 1권, 마니교 1권, 힌두어 2권, 러시아어 1권, 이란어 1권, 히브리어 1권, 동투르크어 1권, <법화경>1권, <천태범본> 1권이다.

 

그럼에도 진인각은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적이 없다. 그는 진짜 지식, 진짜 공부를 위해 공부했던 것이며, 여러 분야를 섭렵했다. 학위를 중시하는 사람은 학문을 경시한다. 학위따기 쉬운 논문제목을 선택하고 얕은 지식과 얕은 연구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는 타이틀이 아닌 앎을 위한 공부를 했고, 그래서 ‘전 중국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불렸다.


 

진인각은 우문태의 통솔 하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장안 부근을 중심으로 관롱(關: 섬서성,감숙성)일대에 자리 잡은 선비족 및 그들과 결합한 토착지배층을 관농집단이라고 부르고 이들이 수당의 지배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唐代政治史述論稿를 중심으로 관농집단설을 기록.

 

 

"개 한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개 열 마리가 따라서 짖어댄다(一犬태影, 十犬태影; 일견태영, 십견태영)"
두 차례의 정치운동이 전 학술계를 장악하자 진인각이 남긴 의미심장한 여덟 글자의
평가다. 진인각이 늘 주장하던 '독립정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대, 그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독립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시국에 끌려 다녔으니,

"개 열 마리가 따라서 짖어댄다"라는 표현이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육건동, <진인각, 최후의 20년>, p.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