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경주<국경꽃집>

미송 2012. 9. 5. 18:47

 

국경꽃집

      

퇴직을 하면 난 말일세

몽땅 퇴직금을 털어서 꽃집을 차릴 거네

내가 전에 몇 번 가본 적 있는 나라의 국경에 말일세

아주 조그마한 국경꽃집을 차려놓고

나는 그곳에서 천천히 잘 늙어가는 법을 배울 생각이야

아주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가끔 나는 내가 전에 살았었던 그 집들의 주소로

편지나 엽서를 써볼 생각이네 그 시절의 나에게 말일세

그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잘 보관해두고 있겠지

아니 집이 사라져버려서 도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편지가 되어도

좋겠어

아니 내가 죽은 뒤에도 그것들은 봉인된 채

여전히 이 생에 머무르고 있을 테니까

 

- ‘어느 늙은 스파이의 고백

 

 

1

내가 어렸을 적, 개나리담장을 걸을 때마다 누나 생각에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우리가 살았던 파란 대문 집에서 염색공장까지 한없이 이어지던 개나리담장, 누나는 그 길을 따라 출근했다가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서 귀가했다 누나가 앓아눕던, 어느 개나리꽃 다 진 날의 저녁 나는 누나의 검은 샛방으로 연탄가스처럼 스며들어, 노란머리핀을 훔쳤다 나는 그것을 거웃처럼 뒤엉킨 개나리 마른 가지, 그중 가장 억센 한 가지에 달아주었다.

 

2

사막으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면 어머니는 새 빨랫비누를 모조리 강판에 갈아 마당에 흩뿌리고 대청소를 했다 집 안 구석구석 비누냄새가 만개滿開했고, 편지봉투에는 항상 석 장의 편지지 말고도 아름다운 사막의 모래알갱이 몇 알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모래알갱이를 작은 유리병 속에 모으며, 모래시계를 만들었다 사진 속의 아버지가 밟고 선 인피人皮를 펼쳐놓은 듯한 사막, 식물도감에서 본 선인장 그 붉고 선연한 사막의 꽃 생각에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어느 해 장마, 나는 어두운 교실에서 물에 잠겨 개구멍같이 좁아진 파란대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몇 년에 걸쳐 모아왔던 모래의 시간이, 말없이 무뚝뚝한 검은 홍수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3

짙은 코발트블루, 파란 대문의 파랑 속에는 파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주 주인을 바꾸며 겹겹이 다른 색깔로 덧칠되어온 파란 대문의 파랑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파랑이었다 그 파랑의 바로 밑에 노을처럼 예쁜 빨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못으로 미술시간에 배운 대한민국 전도全圖를 대문에 그려넣고 휴전선 이북을 손톱으로 긁어내었다 나는 그 바보 같은 파란 대문을 사랑했다 언제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 화단의 꽃보다 많은 잡초와 진딧물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채송화, 학교에 두고 온 것이 있어 화들짝 돌아서면 파란 대문까지 내려와 숨을 고르고 있는 석양

    

 

김중일 시인의 시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의 일부이다. 나는 이 시를 프린트해서 여행 가방 구석에 넣어 왔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아주 긴 여행 중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국경에 와 있다. 그러나 국경꽃집은 보이지 않는다.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에 작은 꽃집이 하나 있다.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선 여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건너기 위해서 꽃을 한 다발 아니 단 한 송이라도 사야만 다음의 장소로 건널 수 있다. 그렇다고 하자. 어떤 시인은 꽃은 모든 경계에 다 필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금 이 경계를 건너기 위해 다른 경계가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꽃을 사지 않고 그곳을 건넌다. 아니, 꽃 없이 그곳을 건넌다. 그것은 슬픈 일이다. 모든 국경에 국경꽃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자. 하나의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내게도 그 많은 꽃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국경을 건너면서 꽃을 사야 한다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으면 한다. 꽃이 되기 위해 꽃씨가 바람의 수많은 국경을 넘어왔던 것을 생각해보고 하나의 꽃이 다른 하나의 꽃을 만나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날아가야 가능한 것인지를 느껴보았으면 한다.

 

꽃은 자신이라는 하나의 시간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우연히 자신을 지나가는 다른 시간으로 향기를 남기는 것을 생으로 받아들이고 산다. 그것을 꽃의 음악들이라 부른다고 해도 우리는 어떤 경계에서도 처벌받지 않는다.

 

나는 국경의 근처에 국경꽃집을 차려놓고 한 여자와 어떤 경계에도 머물지 않는 향기를 팔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주 오랜 시간을 다하여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