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물론 문장을 쓰는 데 있어서는 몇 가지 개인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누구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극히 자연스럽게 처음 단계에서 몸에 배게 된 것이다. 나는 문장을 쓰기 시작한 나이가 비교적 늦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경험한 여러 가지 직업에서 몸에 익은 노하우를 그대로 몽땅 문필업에 응용한 셈이다.
처음에는 임시변통 정도로 생각하고 썼지만 나 자신에게 너무 잘 맞는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신조를 하나하나 써나가기 시작하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고 그다지 의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읽을거리로서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다.
그것은 ‘작가는 비평을 비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별적인 비평이나 비평가를 비평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을 하면 무의미하고, 무익한 트러블에 말려들 뿐이며 자신만 천박해질 뿐이다.
나는 줄곧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마모시킬 기회를 상당히 교묘하게 피해올 수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세상에 다양한 종류의 내적인 지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작가의 비평이나 비평가를 비평한다고 하는 상황도 그 지옥 가운데 하나일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그것이 일이다- 비평가는 그것에 대해 비평을 쓴다-그것도 일이다-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여러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식사를 하고(혹은 혼자 식사를 하고) 잠을 잔다. 그것이 세계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세계의 과정을 신뢰하고 있다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전제 조건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적어도 트집 잡아보았자 별 볼일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트집을 잡기보다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발 닦고 식사를 끝내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자려고 노력한다. 스칼렛 오하라는 아니지만 밤이 밝으면 내일이 시작되고, 내일에는 내일의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중략>
나쁜 비평이라는 것은 말똥이 가득 차 있는 거대한 헛간과 비슷하다. 만일 우리들이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런 헛간을 본다면, 서둘러 지나쳐 가버리는 것이 최선의 대응법이다. “어째서 이렇게 고약한 냄새가 날까?” 하는 식의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 말똥이라는 것은 본래 구린내가 나는 법이고, 헛간의 창문을 열면 더욱 고약한 냄새가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중략>
칭찬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에 관계없이 개중에는 지금도 ‘정말 그렇구나!’ 하고 납득이 가는 비평도 있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나오는 엉터리 비평도 있다. 그러나 5~6년 전의 옛날 것으로 생생함이 모두 소멸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 훈훈한 기분으로 비평을 읽을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비평과 관계하는 것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지금 나의 소설에 대해서 어떤 비평이 나와 있는가는 5년쯤 뒤에 다시 천천히 숙독하면서 음미하려고 한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이런 신조로 글을 쓴다' pp229~232 일부.
타이핑 -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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