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이성복<그렇게 소중했던가>外 3편

미송 2012. 10. 18. 07:27

     

    그렇게 소중했던가

     

    세계 위에, 지붕과 풍경들 위에,
    내 몸을 풀어놓고 싶구나
    나의 꿈속에서는 쥐를 쫓는
    불타는 욕망과 함께. 

    - 파블로 네루다 <고양이의 꿈>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분간 쉴 때, 흘러간 뽕

    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

    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

    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을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

    던가. 꿈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 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교통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않으리라

     

    흰 풀죽 쑤어 천지에 처바르면 이 괴로움 다할까

    내가 내 생을 사랑할 수 없으니 척추없는 슬픔일랑 예서 놀지 마라

    초록 물결 찰랑이는 사량근해 햇빛은 머리맡에 손바닥 포개고

    아주 잠들었는데 난 아무 말도 않으리라 사탕 입에 문 아이처럼

    옹알이만 하리라 일렁이는 쪽배처럼 칭얼대기만 하리라.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

    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

    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

    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