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동물 이야기 1
-유니콘
유니콘(unicorn)의 표식은 뿔에 있다 뿔이 없다면 유니
콘은 그저 백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유니콘은 이름도
그냥 한 개의 뿔이다 유니콘의 뿔은 그 귀한 백마를 비루
먹은 개와 동격에 놓는다 사실 유니콘은 흰말의 몸, 영양
의 엉덩이, 사자의 꼬리를 가진 짐승이다 그러나 뿔 앞에
서 엉덩이가 무슨 소용이며 꼬리가 무슨 소용인가
혹시 당신 주변에 길길이 날뛰는 자가 있다면
그가 단단히 뿔이 났다면 잘 보아 두시기 바란다
그는 그 뿔에 자신을 전부 걸고 있는 것이다
p73
상상동물 이야기 2
-기린
기린도 튀기다 기린은 사슴과 소 사이에서 났는데 어
느 쪽이 모계고 어느 쪽이 부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
만 몸통이 사슴, 꼬리가 소라고 하니 사슴 피가 더 많이
섞인 걸 알겠다 기린도 외뿔 짐승이다 유니콘의 뿔이 각
질인 것과 다르게 기린의 뿔은 부드럽다 찔러도 아프지
않다 그의 뿔은 그러니까 굳은살과 같은 것이다
오래 부대껴서 죽은 살을 머리에 얹고,
조심스레 다른 이의 손가락질을 피해 가며 사는 짐승
그래서 기린은 두근두근 걷는다
죽은 풀만 밟는다고 한다
p74
상상동물 이야기 6
-늑대인간
사람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늑대인간이 된다 양변기 위
에서 목을 빼고 울부짖거나 그녀의 옷 속에 함부로 스며
들고 싶은 자들 그리고 급여일을 기다리는 이들이 그렇다
첫 번째 사람들은 오래 올라앉아 울다가 결국 피를 보
고야 만다 양변기 가득 떠오르는 붉은 만월이 탈장(脫腸)
의 추억을 수식할 뿐이다 시도 때도 없는 달거리는 두 번
째 사람들에게도 있다
그녀의 옷 속에, 몸속에 둥지를 틀 때까지 그들은 온통
달뜬 상태다 개봉과 밀봉을 반복하는 봉투 운동이 세 번
째 사람들의 벌린 입과 핏발 선 눈을 설명해 줄 것이다
길에서 엉기적거리며 걷거나 한여름에 여학교 앞에서
롱 코트를 걸친 이를 본다면, 혹은 당신 옆집과 앞집과 뒷
집과 윗집과 아랫집의 가장을 본다면 이 말을 기억해 주
길 바란다 아시다시피,
늑대인간은 달과 관련되어 있다
p81
상상동물 이야기 13
-몽쌍씨
오누이가 서로를 너무 좋아해서 몰래 부부가 되었다
천제(天帝)가 분노해서 그들을 깊은 산에 가두었다 추위
와 굶주림에 지쳐 서로를 안고 죽은 오누이가 다시 살아
났는데, 몸이 한데 붙어서 머리가 둘에 팔이 넷이었다 이
들의 후손을 몽쌍씨(蒙雙氏)라 부른다
한방을 쓰면, 일가족이 나란히 한데 누우면,
순장(殉葬)이 펄펄 끓는 고대 무덤 속처럼
팔다리가 엉킨다 윗목을 들어 아랫목으로 기울인 것처럼
한곳에서 엉킨다
p86
상상동물 이야기 7
-켄타우로스
사람들은 켄타우로스를 하반신이 말인 사람이라 부르
겠지만 말들은 목 위가 사람인 말이라고 부를 것이다 켄
타우로스는 전쟁터에서 태어났다 전쟁은 모든 걸 뒤섞어
놓는다 말에서 사람으로 혹은 사람에서 말로 옮아가는
이 환유는 엉망이거나 진창인 세상을 행진곡풍으로 건너
뛴다
당신이 그에게서 말 탄 사람을 보든, 사람 머리를 얹은
말을 보든 전쟁은 상관하지 않는다 조각만 남을 뿐이다
모든 교전(交) 혹은 교접(交接)이 그렇다 그가 당신에게
서 몸을 빼어 달아난 자리엔 말 대가리만 남는다 혹은 다
른 것이, 아주 크고 흉한 그런 것이……
p88
시집<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민음사, 2008)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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