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주요한<불놀이>

미송 2009. 5. 15. 15:31

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아아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패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시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벌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 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야 제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기름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와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언이 오늘밤 이 물속에....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녀겨줄 이나 있을까....할 적에 퉁, 탕, 불띄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열정에 살고 싶어.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4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淸流壁), 모란봉(牡丹峰)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 백이고 물결치는 뱃기슭에는 졸음 오는 '니즘'의 형상이 오락가락....얼린거리는 기름자, 닐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인제는 지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여, 즈저분한 뱃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 없은 장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리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촉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꺽거리는 배 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꺽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稜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닐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기름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화사>  (0) 2009.05.16
김현승<밤은 영양이 풍부하다>  (0) 2009.05.16
<최명희> 계절과 먼지들  (0) 2009.05.05
권정일<축제>  (0) 2009.05.02
박제영<능소화>  (0) 2009.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