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내 육체 속에서는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데
그것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가가 내 육체 속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장모님이 한국에서 보내온 황지우의 시집을 읽었다
시집 속지에는 '모국어를 그리워하고있을 시인 사위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장모님이 나를 꽤나 진지한 태도의 시인으로 오해하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문득 무중력 상태에서 시를 읽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해져
욕조 물속에 시집을 넣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렇게 스무드할 수 없었다
어떤 시구들은 뽀골뽀골 물거품으로 올라와 수면 위에서 지독한 냄새를 터뜨리기도 했다
욕조에서 나와 목욕 가운을 걸치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 안에 아무것도 안 입어도 되는 것일까?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현 자본주의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왔다 아니, 사실은
그런 질문을 애초에 던지기라도 한 것인가?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있는데
사회운동가인 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마찬가지로 사회운동가인 애인 레슬러 집에서 동거 중이다
오늘 밤에 자기네 집에서 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 오해하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네 시인데 방 안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혁명이 일어나듯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태양 빛의 입사각에 정확하게 맞출 때
이 방은 제일 밝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 같이 게으른 인간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데모 한번 한 적 없는 아내는 의외로 나의 좌파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심지어는 오늘 또 다른 사회운동가 아라파트도 오는 거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지난 대선 때 민중 후보를 찍었다)
지난번 우리 집에서 「위 섈 오버컴」을 다 함께 합창할 때도
아내는 옆에서 녹차를 따르며 잠자코 웃기만 했다
아내는 그러나 이혼을 의식화시키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그럴듯한 열매 한번 못 맺는 나쁜 품종의 식물, 나를 가꾸며 삼 년 동안 잘 버텨왔다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 목욕 가운을 활짝 펼쳐 보이고 싶었으나
나는 그런 짓이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용납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블라인드의 각도를 고치며 아내는 투덜거렸다
더 밟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
하지만 집세를 생각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당신, 내가 한 질문에 먼저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그러나 내가 어떤 질문을 아내에게 한 것인가? 질문을 과연 하기나 한 것인가?
를 난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하려 애쓰는 동안
태양 빛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심각한 수준 이상으로 초월하였으므로
방은 속수무책 어두워져갔고 이내 모든 것이 암흑속에 잠겨버렸다
암흑 속에서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가가 암흑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내가 깨어난 것은 놀랍게도 깜박이는 불이
2 → 1로 진행 중인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레슬리 집에 와인이라도 한 병 사가야 되는 것 아니냐, 도대체
무슨 생각에 그리 깊이 빠져 있는 것이냐고 묻는 옆의 아내가 오늘따라 무척 예뻐보였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목욕 가운 펼쳐지듯 활짝 열려,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을
속물의 방
그는 곡선이 없는 방 안에 살고 있다
연보(年譜)
나는 소설책보다는 시집이 더 좋아
나는 시보다는 작가 연보가 더 좋아
나는 언제나 무덤에 가까운 쪽에 매혹되니까
물고기들은 죽으면 심해로 가라앉아
서로의 죽음을 가리키는 화살표(>---ᐉ)가 되니 좋아
물고기 뼈가 물고기 연보의 끝이야
나는 상념의 심해로 빠져들어
내 주먹은 심해 문어의 대가리처럼 부풀다 터져버려
핏물 대신 먹물을 뿜고
그러나 어떤 먹물로도
세계를 암흑시대로 되돌릴 순 없어
상념의 원환은 끝이 없어
아무도 나를 붙잡을 순 없어
우주 전체가 나의 옷깃이야
아무도 나를 비웃을 수 없어
나의 연보는 수십억 광년이야
영원으로부터 질주해오고 있어
아직 지구에 없는 내 초라한 무덤을 향해
아직 내 무덤이 없는 찬란한 지구를 향해
운명의 중력
내 눈동자는 태양을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제멋대로 하늘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시력이 있다
산책 내내 개는 쉬지 않고 짖는다
행인과 자동차를 향해
나무와 철탑을 향해
심지어는 구름과 그 너머의 창공을 향해
난리가 났구나
행인, 자동차, 나무, 철탑, 구름, 창공
하나하나 다 무서운 거겠지
이 세상에 무섭지 않은 게 뭐가 있겠니
너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앞장선 개가 짖다 말고 뒤돌아본다
나는 웃고 개는 꼬리 흔든다
나와 개 사이의 중력이 따끔따끔 눈동자를 찌를 때
나는 내 사랑을 떠올린다
내가 구원에 목말라 뒤돌아볼 때마다
키득거리며 머나먼 별의 흰 이빨을 보여주는
내 운명에 속하는 것과
내 운명에 속하지 않는 것
장난꾸러기 내 사랑은 나 몰래
둘 사이에 간지러운 중력을 숨겨놓는다
나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나에게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새장은 새가 없을 때 더 완벽하지 않은가...
문득, 莊子의 '빈 배'가 생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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