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 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 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들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 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녁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 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2
가을날에는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넓고 넓은 들을 돌아다니는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컨대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 풀들이 놀래어 노래한다 소리들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하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3
의 자
유리창 앞에 의자가 하나 있고 서너 권의 책들이 있고
난로가 바알갛게 불을 켜고 있다 벽시계도 있다
거실에는 겨울 햇빛이 들어와 의자 위에서 흘러내리고
벽시계에서는 똑. 딱. 똑. 딱. 초침 돌아가는 소리 간단없이 울린다
나는 책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난로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나는 책들과 다르고
난로와도 다르고
벽시계와도 햇빛과도 다르다
거실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용케도 어울려
굴뚝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처럼
시간 속으로 한없이 뻗어가고 있다
밤새 마당엔 눈이 내려 마당과 머위나무는 눈에 덮히고
마당과 머위나무는 지금 눈 속에 하얀 빛과 소리로 있다
하얀 시간으로 있다
오오, 나의 너인 의자여
빛이 어둠 속으로 함몰되어가듯이
나는 네 속에서 하얀, 어둠이 내리는 마당을 보고 있다
머위나무를 보고 있다.
4
겨울월광
공기를 타고 오르는
가창오리들이 날개를 치며 가는
들녘으로 여러 길들이 뻗어 있고
얼어붙은 버드나무들이 앙상히
늘어선 지방 도로로 짐차가
스노타이어를 낀 채 달린다
한 농부가 논둑을 걸어 강으로
가고 다른 농부가 담배를 피운 채
가는 농부를 본다 강에서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지난달에는 농협 빚에
시달린 농부가 빠져 죽었고 서너 달 전에는
홀로 사는 할머니가 몸을 던졌다
농부들은 죽은 이들을 생각하며 겨울을
본다 밤에는 티브이를 켠다
노동자들이 붉은 띠를 두르고
무섭게 거리를 행진한다 농부들은
채널을 돌린다 십대 가수들이
몸을 돌리며 무어라곤지
꽥,꽥,소리 지른다 농부들은
꿈결 같은 소리로 달이 어둠을 헤치고
솟아올라 금강에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농부들은 꿈결에서도 달을
기다린다.
5
별을 보면서
저 많은 별들을 하나도 소유하지 못하고,
그 많은 별들 중의 하나가 내 별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직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별들이 우리를 향하여 휘익 휘익 휘이익
휘파람 불면서, 수도 없이 달려오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 별들의 빈자리에서
빈자리는 우리를 기다리면서 향그러운 울림
울리리라 생각하면서, 나도 그대들도 그러리라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이 꿈같은 아름다움!
밤에 마당으로 나가 라일락 나무 아래서
바라보는 이 작은 아름다움!
시집『풍경 뒤의 풍경』에서
서상(書床)
시인 김해겸이 서상(書床)을 하나 선물로 가지고 왔다 헐어낸 고가에서 나온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네 귀에 나무못을 박고 가운데 서랍을 단 것이었다 도예가 이동욱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마루의 서쪽 벽면이 어울릴 것 같아 그 아래 두고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흰 그늘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어디로 갔는지 사발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검붉은 기가 도는 갈색 꽃병을 올려놓았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다 시집도 행방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서상(書床)은 저 홀로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보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다 우수도 지나가고 청명도 지나갔다 한식이 내일모레라는 날 나는 시를 쓰려고 이층 서재에서 파지를 수십 장 버리다가 작파하고 한밤에 층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나는 마루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마루에는 물과 같은 시간이 넘실거리면서 가고 있었다 서상(書床)은 시간 위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에서
호주의 사진가 캐서린 넬슨 作, '왕의 정원'
(갤러리 나우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
내 詩 화두는 克己… 사람다움 잃지 않으려 쓴다"
글쓰는 사람 치고 ‘왜 나는 쓰는가’를 자문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별 신통한 답을 얻지 못하면서도 써야 하는 숙명에 대한 의문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할 터이고 용두사미와 같은 답을 반복해서 우리는 내리게 될 터이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물음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고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 물음은 사회와 역사와 신화로 길이길이 뿌리를 뻗어 내려갈 수 있으며 바람과 나무와 강과 별과 새에게로 확산해 갈 수 있다.
문학은 특정한 시대와 환경에서 성장한 작가가 세상과 접촉하면서 가지게 되는 사회적 관계와 조건들 속에서 쓰여지는 것이라 한다면 문학은, 특히 시는, 그보다도 훨씬 더 깊이 들어가고 높이 올라갈 수 있다. 시는 존재 그 자체이자 그 증거이며 물음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문학을? 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어려운 차원이 아니다. 나는 작고 사소하면서도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차원에서 문학을(시를) 이야기해보고 싶을 뿐이다.
1960년대 말 4월 혁명이 좌절되고 5ㆍ16이라는 군사문화가 저벅저벅 거리를 누비고 있을 때, 명동이나 무교동, 관철동 일대의 뒷골목에서는 밤마다 젊은이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소리들이었고 어두운 소리들이었으며 낭만적인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소리들 속에서 시를 쓰는 젊은이들도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왜 시를 쓰는가’라고 젊은 시인들에게 물었다. 젊은 시인들은 돌아가며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이 무어라고 했는지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내가 ‘극기(克己)’라고 했던 것은 희미하게 떠오른다. 내 말이고 내 문제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왜 ‘극기’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캄캄절벽이다. 아마도 60년대를 살기가 너무 힘들었고 70년대 역시 막막했기 때문에 나를 이기고 나를 추스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극기’를 떠올렸으며, 그러므로 시에 있어서도 ‘극기’가 화두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 무렵 나의 삶에는 ‘극기’가 화두로 등장할만도 했다. 해방이 된지 3년 만에 아버지는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6ㆍ25 다음해에 우리집은 폭삭 망했다. 나는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는 오거리와 해안통 거리를 날마다 배회했다. 사리 때 해안통 거리를 걸을라치면 중선배의 돛대들이 베르나르 뷔페의 직선처럼 수도 없이 하늘로 솟아 있었고,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고, 술에 취한 선부들이 배에서 서너 명씩 내려와 사창가 골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불현듯 시 같은 것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에게 시 같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은 국어 선생님도 아니었고 문예반도 아니었고 선배들도 아니었다. 사리 때의 해안통 거리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등록금도 낼 길이 없이 빈한했던, 언제나 뱃속에서 쫄쫄쫄 소리가 흐르는 굶주림이 시 같은 것을 떠올리는 풍경으로 나를 인도했고, 나는 시 같은 것에서 시로, 시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나에게 시를 가르쳐준 것도 ‘극기’를 가르쳐준 것도 굶주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무렵, 굶주림이 극기와 비등한 화두로 내게 등장했던 것은 아니다. 굶주림은 ‘극기’를 가르쳐주었을 뿐 그것 자체가 문제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굶주림은, 혹은 가난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한 문화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주위에는 굶주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청계천 다리 밑은 말할 것 없고 김승옥이나 이성부 조태일 원동석에게도 굶주림은 꼬리처럼 붙어다녔다. 나는 아침이나 혹은 저녁을 굶었다. 굶주림은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에 무릎을 꿇거나 지치지도 않았다. 그것이 나를 소외의 방으로 점점 밀어낸다는 사실을 조금 의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뜨거운 열정으로 시를 쓰고 또 썼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도 나는 나의 말들이 우리의 말이어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말이어야 하며, 고통의 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가난과 고통은 나의 굶주림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70년대 말의 민주화운동과 맞물리면서 나를 뜨겁게 달구고 폭발처럼 터져 올랐다. 매우 내성적이었던 만큼 내 안에서 몸부림치고 소용돌이쳤다. 나는 ‘나’를 접어두고 ‘우리’로 시를 썼다.
70년대와 80년대 초의 모든 시들은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로 쓰여졌다. 우리는 경제적 평등이라 할까, 민주주의라 할까, 후천개벽과 같은 새 세상을, 적어도 오늘보다는 나은 세상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역사 발전을 믿었다.
레비-스트로스는 현대가 고대보다 휴머니스틱한 것은 당대적 가치와 기준 때문이라고 했다(그는 고대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보았다면 탄식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기층민들의 삶이 그제보다는 어제가 낫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나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역사는 느리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발전해 간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런 발전의 행보 속에서 5월 광주라는 끔찍한 사건을 나는 만났고, 5월 광주는 나를 어둠의 구렁텅이로 내던져 버렸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캄캄하고 캄캄했다. 나는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지옥과도 같은 암흑 속을 기어갔다.
나는 암흑의 벽에 부딪쳐 뇌졸중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했고, 한달 뒤쯤에는 다시 일어나 봄날의 햇빛과 돌담 새의 풀꽃들을 보았다. 아름다웠다. 몹시 아름다웠다. 내 두 눈에서는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이 새롭게 나를 부활시켜 주었다.
그 눈물에는 의심도 회의도 부정도 개입할 틈이 없었다. 눈물은 사랑이었다. 눈물은 시였다. 눈물은 병든 내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연민의 시선으로 물끄러미 오래오래 나를 보아주었다. 나는 눈물을 씻고 일어섰다. 나는 하늘을 보고, 나무들을 보고, 강을 건너 들로 나갔다. 새들이 날아가고 다람쥐와 청설모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리드미컬하게 벼랑을 타고 올라갔다. 해가 져 갔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산그림자가 달렸다.
나는 산 너머 하늘 너머 마을과 어머님의 둥근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 고향과 무덤에는 서남해 바다가 금빛으로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그 마을과 무덤과 바다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굶주림의 소리를 들으며 해안통의 거리를 볼 때도, 빈자들의 유랑의 시를 쓸 때도, ‘속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의 시를 쓸 때도 나의 시들은 다같이 머리를 서남해로 두고 있었다. 서남해는 내 시의 뿌리 은유이자 뿌리 상징이었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고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세월 속에서는 세상도 사물도 말들도 변해가는 모양이다. 20여 년 동안 나는 서울에서 광주로, 영동으로, 양수리로 짐을 싸들고 이동했다. 그 사이에 서남해도 색조가 변하고 모습이 바뀌어져 금강이나 북한강 정도의 강물이 되었다. 나는 아침에 또는 저녁에 햇빛을 받고 반짝이는 강물을 따라 차를 타고 달리면서 물을 생각한다.
나에게 저 물은 무엇인가? 저 아름다운 산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그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어째서 물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밤에 다르며, 어째서 어제도 흘러가고 오늘도 흘러가고 내일도 흘러가는 것인가? 이런 별 내용도 없고 쓸모도 없는 질문들을 하다가 보면 그 물 아래, 질문들 아래 물끄러미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붉은 얼굴의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는 내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같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먼 나라의 아이인 것도 같다.
나는 요즘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다. 나는 그 아이가 ‘극기’와는 어떤 연관이 있으며, 내가 보고 있으되 과연 나와 상관이 있는지, 내가 저만큼 물 속으로 밀어낸 얼굴인지, 다만 물 속에 떠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틈틈이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글쓰기에 대한 물음이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듯이 그것도 생각에 그치고 말겠지만, 그 생각을 거듭하면서 사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리라. 사람다운 위의(威儀) 같은 것이 서리리라.
•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 1963~65년 김현 김승옥 김치수 염무웅 등과 ‘산문시대’ 동인 활동
•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 당선 등단
•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겨울 깊은 물소리’ ‘작은 마을에서’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시론집 ‘시와 부정의 정신’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미술 에세이 ‘한국인의 멋’ 등
• 이산문학상(1999) 현대불교문학상(2000)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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