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라는 대기 불안정과
그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사랑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영원한 연인을 꿈꾼
다, 구름의 성분으로 이루어진 연인
나도 한때 나만의 아름다운 희랍인 노예를 꿈꾸었다
나의 사랑에 전속된 그대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의 감정으로 꿈꾸는 순간
감정의 확산은 대기의 불안정을 몰고 온다, 독점할 수 없
는 그대, 사랑에 전속될 수 없는 그대
그대 푸른 눈동자의 호수에서 가녀린 목의 해안선까지
그대에게 속한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그대 스스로도 자신을 온전히 가질 수 없으므로 사랑
은 소유와 독점이 아니라 눈부신 대지의 빛 가운데서 영
원히 공평하다
한때 나는 그대를 보며 나의 아름다운 희랍인 노예를
꿈꾸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지상의 찬란한 공기 속에서 애정 공
산주의를 생각한다
빛이 있었고 그대가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대는 빛에 노출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다
빛에 따라 그대의 표정은 변한다, 미소 짓고 침묵하다
가 다시 슬픔에 잠긴다
그대는 빛의 천사인가, 빛이 남겨둔 그림자의 유령인가
한때는 나의 아름다운 희랍인 노예라 불렸으며 또 다
른 한때는 사랑이라고 불렸던 무한의 감정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지금 창밖으로 하염없이 내
리는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구름의 성분으로 이루어진 사랑
우리는 그것에 대해 끝내 알 수 없으므로 그냥 리브카
갈첸의 말처럼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이라고 하자
그림자의 짧은 역사
몇만 년 전에도 눈은 저렇게 내렸을 거야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연거푸 커피를 마시며 새벽에 내리는 눈을 본다
눈발은 지상에 남아 있는 빛들을 적시며 소리 없이 내리고 나는 창문을 열고 기습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눈발을 본다
눈발과 나 사이에는 또 하나의 심연이 있고 내가 저 내리는 눈발에게로 건너가 함께 내릴 수 없음을 안다
사람들이 이룬 잠의 제국에도 저 눈발은 스며들어 꿈의 영토를 적실까
지상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 가장 밝은 부분까지 제 그림자를 향해 떨어지는 수많은 눈송이들을 나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라 불러본다
하늘의 어둠으로부터 생겨나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제 그림자를 찾아 새벽을 가로질러 달려온 순결한 사랑
하늘의 뿌리 같은 눈송이들을 손바닥으로 받아 손금 위에 심어본다
그림자의 짧은 묘목을 새벽 네시의 잠들지 못하는 영혼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고도 남은 수많은 눈송이들은 대지로 스며들어 또 다른 영혼이 되는 것이다
짧은 생애를 건너왔지만 제 그림자의 영원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잠들지 못하고 오래도록 깨어서 그 사랑을 다 지켜보고 있다
시집<모든 가능성의 거리><2011, 문예중앙시선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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