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눈 / 기형도
네 속을 열면 몇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때마다
또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있어
땅에는 얼음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수없는 빛을 한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색깔로 또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있어 네 속을 열면
[시작메모]
또 겨울이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밤눈」은 그 즈음 씌어졌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삶과 존재에 지칠 때 그 지친 것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비유는 自然(자연)이라고.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 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듯 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 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자연의 무책임한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류나무 숲을 통과하면 새벽은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 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 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 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미완성의 시 「내 인생의 中世」에서
[편지 12]
1984년 6월 13일 일기
몇 개의 비극들을 떠올리고 혼자 빙그레 웃어 보았다. 쓴다. 너에게, 방금 수강신청을 끝냈다. 힉부 생활의 마지막 의무들, 혹은 향유할 수 있는 청춘의 이름들을 나는 신중하고 깨끗하게 적어 넣었다.
이상하지, 나는 언제나 마지막을 겨냥하고 무엇인가를 집어던지지만 그것은 언제나 출발에 불과했으니, 마지막이 없다면 출발 또한 무슨 소용일 것인가.
너의 편지를 읽고 아직도 나에게 감동이 남아 있음을 신에게 감사했다. 너의 그 문장들, 일부러 딱딱하게 기어가는 갑충류와 같던 너의 글씨들, 애정을 담되 그것을 객관적이고 필연적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문장의 語尾들.
도서관에 왔다. 노트를 읽고 있었다. 학생들이 모두 제각기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형광등 불빛들, 아나키즘(Anarchism)의 막스 스티르너(Max stirner)를 읽다가 갑자기 4층 로비로 나갔다. 총애하는 후배 金君 - 최근 알게 되었다 - 도 참고열람실에서 자리를 뜨고 없었다. 아름다운 굶주림의 밤!
다음 학기의 과목은 네 개뿐이라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다. 국제정치, 한국 정치사상, 문예사조, 근대철학 각 한 과목씩 적어 넣었다. 참 이상하구나. 사실상 나는 도서관에서 종종 답신을 쓰는 편이지만 ... 갑자기 말테(Malte)가 생각이 나서 해본 소리였단다. 그래, 나는 꿈꾸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도어의 손잡이 어디쯤에 붉게 녹슬어가고 있는 볼트의 그것처럼, 내가 요즘 사실들을 믿는 이유는, 내 세계관의 비극성을 의미하고 의지를 신봉하는 이유는 순발력의 공간, 곧 외계관에 대한 힘겨운 노력의 표징일 것이다.
아듀, 가스등 희미한 겨울 거리의 추억이여.
1990년 3월「기형도 산문집」(도서출판, 살림)에서
어쨌든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고 볼 일이다. 사후死後에 사자의 표호咆哮로 남겨지거나 눈물로 스며들거나, 개인사의 흔적은 보편성을 흠모하며 흘러간다.
본능이다, 새가 의미도 모르며 재잘대듯, 영원에 뿌리를 둔 인간의 생리현상이다. 지나간 작가들의 노래를 재탕해서 듣는다.
전혜린과 일엽스님과 수덕사 아래 여관에 모였던 시대의 작가들을 이야기 한다. 겨울은 치열한 시간이다. 기형도의 흔적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의 묘미 안에는 자신과 자연과 시대가 있다. 그대로 존재하므로 노파심은 무효가 된다. 그때 승화시켰던 그의 눈발들이 지금 이 땅에,
아니 최소한 내 안에 눈물로 스미고 있는 중이니. 시인은 잠들었는가, 고이고이, 서른 아홉까지만 살면 좋으리 했던 내 소원도 곁들어 듣고 있을까.
역사를 말하고 있다. 2012년 겨울 대통령 후보로 나선 미세스 Lee는 당차게 공격 발언을 흩뿌리고 있다. 홍이 봤으면 여자가 더럽게 까칠하네! 했을까(그렇게 말하면
그는 아웃!). 시대가 바뀌고 있는지, 기형도 시대 그대로인지, 내게도 중요한 건 변화의 물결이지만, 사납고도 고요한 밤에 깨어나 기도할 뿐!
……미안하다, 어쨌든 고인의 일기와 시작메모를 허락도 없이 집적거렸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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