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2
오늘
잉어도 피라미도 다 살았던 봇도랑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기세를 잡은 미꾸라지놈들
용트림할 만한 오늘
3
늘 하는 말
사랑은 넝쿨손입니다
철골 철근 콘크리크 담벼락
그 밑으로 흐르는
오염의 띠 죽음의 띠
씨뻘건 쇳물
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
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잎덩쿨손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입니다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마음의
잎덩쿨손입니다
떼찔레꽃 턱잎입니다
굴참나무 떡잎입니다
4
몰현금沒絃琴 한 줄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 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 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5
시간론論
여자라고 다 여자 아니여
여자 소리 들을라면
언제어디서 봐도
거문고 줄 같아야
그 물론
진겁塵劫 다 하도록
기다리는 사람 있어야
6
사랑의 거리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 되어야
7
무설설無說設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
인 머리 풀고 상여 잡고 곡하기를 "보이소 보이소 불
길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
는데요 죽은 김 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옹기로 옹
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
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데요
8
일색과후一色過後*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행자
한 나절은 디딜방아 찧고
반나절은 장작 패고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20년
40년이 지난 오늘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다
* 모든 대립을 초월하고 차별을 떠난 일체 평등의 궁극의 세계. 한 뿌리의 풀,
한 송이의 꽃 무엇을 보아도 중도中道의 이치를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엇을 보아도 부처가 아닌 것이 없는 세계. 깨달음까지도 버린 무작묘용無作
妙用의 세계. 여기서는 오욕락으로 가득찬 현실에 젖었다가 청정한 본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
조오현 시집<아득한 성자>(2007,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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