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조오현<아득한 성자>外 7편

미송 2012. 12. 14. 17:26

     

     

     

    1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2

    오늘

     

    잉어도 피라미도 다 살았던 봇도랑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기세를 잡은 미꾸라지놈들

    용트림할 만한 오늘

     

     

    3

    늘 하는 말

     

    사랑은 넝쿨손입니다

    철골 철근 콘크리크 담벼락

    그 밑으로 흐르는

    오염의 띠 죽음의 띠

    씨뻘건 쇳물

    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

    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잎덩쿨손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입니다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마음의

    잎덩쿨손입니다

    떼찔레꽃 턱잎입니다

    굴참나무 떡잎입니다

     

     

    4

    몰현금沒絃琴 한 줄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 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 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5

    시간론論

     

    여자라고 다 여자 아니여

    여자 소리 들을라면

    언제어디서 봐도

    거문고 줄 같아야

     

    그 물론

    진겁塵劫 다 하도록

    기다리는 사람 있어야

     

     

    6

    사랑의 거리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 되어야

     

     

    7

    무설설無說設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

    인 머리 풀고 상여 잡고 곡하기를 "보이소 보이소 불

    길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

    는데요 죽은 김 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옹기로 옹

    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

    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데요

     

     

    8

    일색과후一色過後*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행자

     

    한 나절은 디딜방아 찧고

    반나절은 장작 패고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20년

    40년이 지난 오늘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다

     

    * 모든 대립을 초월하고 차별을 떠난 일체 평등의 궁극의 세계. 한 뿌리의 풀,

    한 송이의 꽃 무엇을 보아도 중도中道의 이치를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엇을 보아도 부처가 아닌 것이 없는 세계. 깨달음까지도 버린 무작묘용無作

    妙用의 세계. 여기서는 오욕락으로 가득찬 현실에 젖었다가 청정한 본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 

     

    조오현 시집<아득한 성자>(2007,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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