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황동규<조그만 사랑>외 7편

미송 2013. 1. 5. 12:15

 

 

마르로스코 作 '화이트 센터'

 

 

 

조그만 사랑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내 어린 시절에는 태평양전쟁 탓으로, 장난감 같은 걸 갖고 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돌을 가지고 많이 살았습니다. 돌 가지고 땅 뺏기도 하고

돌치기도 했습니다. 책가방도 끈으로 엮은 가방을 메고 다녔습니다. 정말 어린 시절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있었습니다.

 

 

 

더 조그만 사랑 노래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더욱더 조그만 사랑 노래

연못 한 모퉁이

나무에서 막 벗어난 꽃잎 하나

얼마나 빨리 달려가는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금시 떨어지는지

꽃잎을 물위에 놓아주는

이 손.

 

이 시를 쓴 지가 30년 가까이 되는데 그때 일을 정확히 기억을 못 하겠습니다만, 내가 그때까지 받았던 연애시의 전통을 바꾼 것만은 사실입니다.

아직 멎지 않는 몇 편의 바람, 겨울날 바람이 마른 낙엽, 더러워진 낙엽을 휙 쓸고 가다고 멎고 그러쟎아요. 그것 하나하나가 시적 자아에게 짤막한

소설들처럼 보인 겁니다.

 

 

 

비린 사랑노래 6

 

가을 들면서 잔비가 뿌려도

무지개가 제대로 떠지지 않았습니다.

저녁 안개 가끔 낄 뿐

햇빛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는 새 마음이 조금씩 식드군요.

지하철에서 석간을 읽고

던 기사 좌석에 논 채 일어서

을버스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꽃가게의 꽃들이 풀 죽어 웃고 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람 살려!))

 

이렇게 사는 삶이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하더라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괄호 두 개 속에 갇혀 들리지 않는 ‘사람 살려’ 소리 지르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체험을 형상화시킨 겁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것이 이 시의 초점입니다.

 

 

 

기항지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이 흔들리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 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는 자유의 상징을 찾아서 항구에 갔는데 가보니 항구의 배들이 바다 쪽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항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모든 배들이 정박할 때 머리를 항구 쪽으로 하고 정박한다는 것은 후에 알았습니다. 떠날 때는 뒷걸음질쳐 나와서 가는 거지요. 그 사실을 모르는 화자는 항구에도 탈출의 기회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배들이 자유를 향해서 바다로 나갈 생각을 안 하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탈출의 공간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도 하늘을 보니까 새들이 자유롭게 날고 있었죠. 아 거기에 그나마 자유의 길이 있었구나. 그 부분이 아름답게 처리된 것은 어쩔 수 없고 그것이 초점이 되었습니다.

 

 

풍장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저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귀를 남기고 가겠다는 말은 비 맞는 저 가을나무의 소리가 있는 한 죽지 못하겠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여기가 이 시의 초점입니다.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는 구체적이지요. 그냥 추상적으로 그린 게 아닙니다. 나는 예술은 문학뿐만 아니고

음악이나 미술도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미자 술

 

오미자 한 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25도밖에 없었을 시절 처음으로 보해소주 30도를 만났을 때 참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술이 강해야 과실주가 잘 되니까. 물론 비례가 맞아야겠지만,

오미자 술을 만들면서 이처럼 이쁜 색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달 반가량 기다리는 동안 그 색깔 때문에 마음이 순화되는 겁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 잔 마실 때 맑고 떫고 신선한 맛은 기막힙니다. 한 친구에게 야단칠 일이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서 내일 만나자고 하리라 하고는 첫 잔 맛보는 순간

마음이 환해졌어요. 그러고 나서는 에라, 용서를 하자고 변해 버린 겁니다. 그 변하는 체험을 형상화시킨 겁니다. 그게 이 시의 초점입니다.

 

 

퇴원날 저녁

 

베란다 밖을 살핀다

저녁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다.

주차장에서 누군가 차 미등 켜논 채 들어갔나,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

두 등색이 다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를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감지 말라고

치운 세상에 간신히 켜든 불씨를

아주 끄지 말라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네 시간 반 걸린 큰 이비인후과 수술을 받고 퇴원했지만 이틀 지나니 입이 비뚤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재입원을 했습니다. 감겨지지 않은 오른편 눈의 눈물이 말라 눈이 나빠지기도 했습니다. 재입원 즉시 신경 검사를 하고 다음날 재보았더니 더 나빠졌습니다. 의사의 얼굴이 새파래지더군요. 참 좋은 의사라서, 자신이 수술하다가 혹시 신경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은 잠을 완전히 설쳤지요.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의사가 싱글벙글 들어오더니 ‘기계가 고장났었다’ 고 하는 걸 듣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그 당시의 체험을 담은 시입니다.

 

 

공주 대통사 터

-동행한 양애경 김백겸 김순선에게

 

왜 갈 곳 널린 공주에서

굳이 마당 한 뼘으로 남은 백제 절터에 들르자 했는지,

몇 차례나 길을 물어 그곳에 갔는지

4년 전 멋모르고 들었던 대통사(大通寺) 터

갑사 것보다 더 크고 실한 당간지주

(여기에 당간을 달면

꼭대기에선

싱싱한 금강 줄기와 푸른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었으리)

그 지주를 만나려 간 것이 아니라,

소루쟁이풀 듬성듬성 서 있는 마당을 두른

검은 돌 흰 돌 가지런히 박은 담장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냥 철책 뒤에 한 줄로 아무렇게 땅에 박혀 있는

더 우람한 주춧돌들,

섬세한 삶의 다른 뽄새를 한번 더 맛보기 위해,

구 시가지 한 구석에 숨어 밖을 내다보려 않는 소루쟁이들 곁에 가서......

 

가보면 알지만 대통사 터에 모아논 주춧돌은 상당히 우람합니다. 기둥을 세우기 위해 사각형으로 판 자리들이 있는데, 나는 기둥으로 꽝꽝 찍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제 예술품들은 참 섬세한데 대통사 터 유물들은 좀 다릅니다. 그 터에서 나온 확 비슷한 유물이 공주박물관에 두 개나 있는데, 그런 종류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걸 겁니다. 이를 통해서 보아, 백제의 예술은 섬세하기도 하지만 스케일이 크고 강인한 구석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황동규>

 

 

나의 문학이야기<2001년 문학동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