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동리 <밀다원시대>中

미송 2013. 4. 16. 07:05

밀다원시대 (密茶苑時代)

 

 

부산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차는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몸을 뒤로 뻗대었다. 초량역에서 본역까지는 거의 한 걸음 한 걸음 재듯 늑장을 부렸다. 이중구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여섯시 이십분. 어저께 세시 십오분 전에 탔으니까 꼭 스물일곱 시간하고 삼십오 분이 걸린 셈이다. 스물일곱 시간하고 삼십오 분. 그렇다 그동안 중구의 머릿속은 줄곧 어떤 '땅끝'이라는 상념으로만 차 있는 듯했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허무한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點) 같은 것에 중구의 의식은 완전히 사로잡혀 있은 듯 했다. 그것은 승객의 거의 전부가 종착역인 부산을 목적하고 간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산이 이 선로의 종점인 동시, 바다와 맞닿은 육지의 끝이라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다.

 

또, 그 열차가 자유의 수도 서울을 출발지로 하고, 항도 부산을 도착점으로 하는 마지막 열차라는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를 다 합틴 그 위에 또 다른 이유가, 무언지 더 근본적이며 더 절실한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중구는 그것을 알 수도 없었을뿐더러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런 채 그는 다만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에서 내리는 것까지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서울을 떠날 때 이미 예정되었던 행동이었고, 또, 기차는 이 예정에서 벗어나거나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부산진에서부터 목이 쉬도록 울며 조심조심 기어온 것이 아닌가.

 

플렛폼에 내렸을 때까지는 아직도 약 이천 명에 가까운 동지들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오십일년 일월 삼일이라는 최후의 시간까지 자유의 수도를 지킨 같은 겨레의 같은 시민들이요, 같은 시간에 같은 차로 같은 목적지에 내린, 같은 운명체가 아닌가. 그들의 살벌한 얼굴에도, 위엄 있는 얼굴에도, 아부적인 웃음을 띤 얼굴에도, 그들이 아직 플랫폼에서 발을 옮기고 있는 동안에는 다같이 동지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한번 출찰구를 빠져나와 그 넝마전 같은 역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들의 얼굴에서 동지는 어느덧 다 죽어버렸다. 출찰구를 통과함으로써 동지는 절로 해산이었다. 그리고 해산은 동시에 새로운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구는 이 새로운 자유를 안고 출찰구 밖으로 던져진 채 한순간 전의 동지들이 이제는 모두 남이 되어 돌아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어디로 저렇게 찾아가는 것일까. 중구는 그것이 신통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부산에 친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란 것은 중구로서도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본디 부산 사람들이 아님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출찰구를 빠져나오자마자 그렇게 쓱쓱 찾아갈 곳이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한순간에 동지에서 벗어나 그렇게 용감하게 자유를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끝의 끝 막다른 끝이란 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 끝의 끝 막다른 끝에서 한 발이라도 옮기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정녕 이 끝의 끝 막다른 끝까지 온 사람은 중구 자신뿐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이렇게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이 모두들 그렇게 용감하게 찾아갈 곳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기적이다. 엄청난 기적이다. 중구는 혼자 속으로 이렇게 뇌까리며 저도 모르게 와아 몰려가고 있는 행렬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발을 옮겨놓았다. 저도 모르게 그렇다 그것은 동지의 관성이었는지도 몰랐다.

 

중구가 저도 모르게 또는 동지의 관성으로, 이 기적의 행렬 속에 휩쓸려 막 전찻길을 건너서려 할 때였다. 이형은 어디로 갈 데 있어요? 하는 소리가 왼쪽 귓전을 울렸다. 자줏빛 머플러에 손가방 하나---그것이 중구의 것보다 좀 반짝거리고 배가 불러 보이기는 했지만--를 든 K통신사의 윤이었다. 중구는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카킷빛 털실 장갑을 낀 왼쪽 손으로 입을 가려 보임으로써 말씀 아니라는 뜻을 나타낸 다음, 이번에는 와아 몰려가고 있는 동지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하고 되물어보았다. 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띠어 보이며 다 갈 데가 있는 모양이지요 할 뿐이었다. 전찻길을 건너셨다. 이번에는 중구가 또 물었다. 윤형은 그래 어디로 가시오? 이것은 그냥 인사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윤이 중구에세 먼저 이렇게 물었을 때는, 아는 사람 사이에 건네는 지나가는 인사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 중구와 같이 자기의 처지를 이미 표명한 다음에는, 어디 좀 같이 따라갈 수 없겠소,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윤은 먼저와 같이 입술을 꼭 다문 채 입 안에 소금을 머금은 듯한 웃음을 띠어 보이며 우리 같은 놈이야 별수 있소? 염치 불구는 중구를 경계하기 위하여 덧붙인 말일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중구에게는 도리어 반대적인 효과를 나타내었다. 중구도 염치 불구에 한몫끼기를 염치 불구하고 희망했기 때문이다. 윤은 세번째 그 소금을 머금은 듯한 같은 웃음을 띠어 보였다. 그뿐이었다.

 

승낙도 거절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경우 중구는 이것을 승낙으로 취하는 자유를 행사하고 잠자코 그의 뒤를 밟아가면 되었다. k통신사의 지국은 보수동이었다. 윤과 중구가 인도받아 들어간 곳은 넓이가 서너 칸이나 남짓 되어 보이는 지국 사무실이었다. 윤은 할 수 없지, 여기라도 자지 어떡해? 했다. 중구도 그럼 했다. 윤은 또 저녁을 사 먹으러 나가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을 중구는 싫다고 했다. 나중, 윤이 저녁을 마치고 오는 길에 조그만 소주병 하나를 들고 와서 한잔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을 중구는 또 싫다고 했다.

 

테이블 네 개를 한데 붙여서 탁구대 모양으로 만들고 오버도 입은 채, 털모자도 쓴 채, 중구는 그 위에 자기의 몸을 눕혔다. 어디서인지 문풍지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피리 소리 같기도 한 것이 울려왔다. 지국장이 불 붙인 초 한 자루를 내어다 주며 주무실 때는 끄고 주무이소 했다. 윤이 고맙다고 대신 인사를 했다.

 

중략

 

한 십 년 동안 시베리아 같은 데 유형살이를 하다 돌아와 처음으로 커피를 입에 대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도 커피의 한 모금은 그의 가슴속에 쌓이고 맺혀 있던 모든 아픔을 한꺼번에 훅 쓸어내려주는 듯했다. 중구는 입이 헤벌어지며, 곧장 바보같은 웃음이 터져 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하고 몇 번이나 입 밖에까지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그는 간신히 참았다. 커피 여섯 잔이 새로 왔다. 현식은 말없이, 자기 앞에 두번째 놓인 커피 잔을 테이블 한가운데 옮겨놓았다. 자기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중구도 두 잔째니까 사양을 했으나 이번에는 길여사가 듣지 않았다. 평론가가 내는 차는 먹고 본인이 대접하는 차는 거절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해요 길여사의 항의에 장단을 맞추듯, 송화백이 또한 손바닥을 내밀며 빨리 드십쇼 하는 제스처를 부렸다. 중구도 입에 손을 가져감으로써 제스처에 응수를 했다. 중구의 이 제스처는 이미 유명한 것이어서 때로는 곤란하다는 뜻, 때로는 미안하다는 뜻, 때로는 곤란하다는 뜻, 때로는 거북하다는 뜻, 때로는 미안하다는 뜻, 때로는 죄송하다는 뜻, 그 밖에 수줍다는 뜻, 고깝다는 뜻, 천만에 말씀이라는 뜻, 이러한 모든 델리게이트한 감정과 의사표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다방은 어느 날까지 열렸어요? 이번에는 커피당인 송화백이 물었다. 이십구일까지든가 삼십일날까지든가, 아무튼 그믐께부터는 거리에 다니는 사람이라곤 거의 볼 수도 없었으니까, 나중은 병자, 노인들까지 모두 들것에랑 리어커에랑 태워서 나오는 데, 아이유 하며, 또 입에다 손을 가져갔다. 순간,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모셔오지 못한 그의 어머니의 생각이 가슴에 찔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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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피난 시절 ‘밀다원’이란 다방을 중심으로 거기에 모인 예술가들의 삶의 관련을 조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동리의 초기 소설과는 달리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현실적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내면 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또 다른 소설 세계를 보여 주는 일 편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정신은 실존 의식이다. 삶에의 절망과 허무, 그것이 삶의 조건이라는 참담함에 빠진 예술가의 정신의 궤적이 밀다원에서의 예술가들과의 교류 속에 잔잔히 펼쳐지고 있다.

 

 

김동리(金東里 1913-1990) 경북 경주 출생. 본명 시종(始鍾). 경북 경주(慶州) 출생. 경주제일교회 부설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중학에서 2년간 수학한 뒤, 1929년 서울 경신중학(儆新中學) 4년에 중퇴하여 문학수련에 전념하였다. 박목월(朴木月)․김달진(金達鎭)․서정주(徐廷柱) 등과 교유하였다. 1934년 시 “백로(白鷺)”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함으로써 등단하였다. 이후 몇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소설로 전향하면서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화(山火)”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1년 동협회부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문협(文協)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 중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新人間主義)의 문학사상으로 일관해 온 그는 8․15광복 직후 민족주의 문학 진영에 가담하여 김동석(金東錫)․김병규와의 순수문학 논쟁을 벌이는 등 좌익문단에 맞서 우익 측의 민족문학론을 옹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때 발표한 평론으로, “순수문학의 진의”(1946), “순수문학과 제3세계관”(1947), “민족문학론”(1948) 등을 들 수 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한국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 등을 신비적이고 허무하면서도 몽환적인 세계를 통하여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그 이후에는 그의 문학적 논리를 작품에 반영하여 작품세계의 깊이를 더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과의 갈등을 조명하는 데 주안을 두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소설집으로 <무녀도(巫女圖)>(1947), <역마(驛馬)>(1948), <황토기(黃土記)>(1949), <귀환장정(歸還壯丁)>(1951), <실존무(實存舞)>(1955), <사반의 십자가>(1958), <등신불(等身佛)>(1963),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 시집으로 <바위>(1936), 수필집으로 <자연과 인생> 등이 있다. 예술원상 및 3․1문화상 등을 받았다.

 

 

 

 

보름달 / 김동리

나는 지금 보름달 아래 서 있다.
한 깊은 사람들은 그믐달을 좋아하고, 꿈 많은 사람들은 초승달을 사랑하지만,
보름달은 뭐 싱겁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맞는다던가?

한이 깊은 사람, 꿈이 많은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래도 싱겁고 평범한 사람이 더 흔할 게고,
그래서 그런지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이 싱겁고 평범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예외 없이 싱겁고 평범하게 마련이라면,
나는 내가 그렇게 싱겁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새벽달의 기억은 언제나 한기와 더불어 온다.
나는 어려서 과식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하얗게 깔린 서릿발을 밟고 새벽달을 쳐다보는 것은,
으레 옷매무새도 허술한 채, 변소 걸음을 할 때였다.

그리고, 그럴 때 바라보는 새벽달은,
내가 맨발로 밟고 있는 서릿발보다도 더 차고 날카롭게 내
가슴에 와 닿곤 했었다.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있어 달의 일종이라기보다는 서슬 푸른 비수나,
심장에 닿은 얼음 조각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게다가, 나는 잠이 많아서, 내가 새벽달을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선잠이 깨었을 때다. 이것도 내가 새벽달을 사귀기 어려워하는
조건의 하나일 것이다.

새벽달보다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한결 더 친할 수 있다.
개나리꽃, 복숭아꽃, 살구꽃, 벚꽃 들이 어우러질 무렵의 초승달이나
으스름달이란, 그 연연하고 맑은 봄 밤의 혼령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소식(蘇軾)의, 봄 저녁 한 시각은 천 냥에 값하나니,
꽃에는 맑은 향기, 달에는 그늘이라고 한 시구 그대로다.
어느 것이 달빛인지 어느 것이 꽃빛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서로 어리고
서려 있는 봄 밤의 정취란, 참으로 흘러가는 생명이 한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단들 초승달로 보름달을 겨룰 수 있으랴? 그것은 안 되리라.
마침 어우러져 피어 있는 개나리꽃, 복숭아꽃, 벚꽃 들이 아니라면,
그 연한 빛깔과 맑은 향기가 아니라면, 그 보드라운 숨결 같은
미풍이 아니라면, 초승달 혼자서야 무슨 그리 위력을 나타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이미 여건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초승달이 아닌가?

보름달은 이와 달라 벚꽃, 살구꽃이 어우러진 봄밤이나,
녹음과 물로 덮인 여름밤이나, 만산에 수를 놓은 가을밤이나,
천지가 눈에 쌓인 겨울밤이나, 그 어느 때고 그 어디서고 거의 여건을
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로서 족하다.
산도 물도 수풀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라도 좋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한 것이다.

보름달은 온 밤 있어 또한 좋다. 초승달은 저녁에만,
그믐달은 새벽에만 잠깐씩 비치다 말지만,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로 하여금 온 밤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보름달은 온밤을 꽉 차게 지켜 줄 뿐 아니라,
제 자신 한쪽 귀도 떨어지지 않고,
한쪽 모서리도 이울지 않은 꽉 찬 얼굴인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좋은 시간은 짧을수록 값지며,
덜 찬 것은 더 차기를 앞에 두었으니 더욱 귀하지 않으냐고 하지만,
필경 이것은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행운이 비운을 낳고 비운이 행운을 낳는다고 해서,
행운보다 비운을 원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초승달이나 그믐달같이 불완전한 것, 단편적인 것,
나아가서는 첨단적이며 야박한 것 따위들에 만족할 수는 없다.
나는 보름달의 꽉 차고 온전한 둥근 얼굴에서 고전적인 완전미와
조화적인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예술에 있어서도 불완전하며 단편적이며 말초적인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기발하고 예리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완전성과, 거기서 빚어지는 무게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에 견줄 수는 없으리라.

사람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을까? 보름달같이 꽉 차고 온전히
둥근 눈의 소유자를 나는 좋아한다. 흰자위가 많고 동자가 뱅뱅 도는
사람을 대할 때 나는 절로 내 마음을 무장하게 된다.
보름달같이 맑고 둥근 눈동자가 눈 한가운데 그득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람,
누구를 바라볼 때나 무슨 물건을 살필 때,
눈동자를 자꾸 굴리거나 시선이 자꾸 옆으로 비껴지지 않고,
아무런 사심도 편견도 없이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람,
기발하기보다는 정대한 사람,
나는 이러한 사람을 깊이 믿으며 존경하는 것이다.

보름달은 지금 바야흐로 하늘 가운데 와 있다.
천심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은 더욱 길며 여유 있게 느껴지는
것이 또한 보름달의 미덕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다릿목 정자까지 더 거닐며 많은 시간을 보름달과 사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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