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자로 끝나는 시
안녕하세여, 어디가세여, 나 몰라라 도망가지 말아여, 우리 피시방에서 만났던가여, 아니, 전생이었던 것 같네여, 어떻게 지내셨어여, 전 오늘 좀 슬퍼여, 사실 애인이랑 막 헤어졌어여, 육 개월 동안 밤마다 애무하던 그녀 다리가 의족인 줄 어제서야 알았어여, 뭘여, 제가 나쁜놈이지여, 저 위 좀 보세여, 저놈의 달은, 누가 자기 자리 뺏어갈까봐 낮부터 저러고 버티고 있네여, 참 유치하지여, 한 백 년 만인가여, 기억나세여, 당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지여, 그냥 친근해서여, 전 호부호형 안 해여, 다 어머니라고 해여, 제 삶은 홍길동전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희극적 만남이지여, 도대체 누구냐고여, 몇 생 전이던가여, 우리 어느 심하게 게으른 나라의 국가대표 산책팀 소속이었자나여, 기억 안 나세여, 왜 저보고 사는 게, 납치할 아이 하나 없는 세상의 유괴범처럼 황당하게 외롭다고 그랬자나여, 불어였던가여, 스페인어였던가여, 왜, R 발음에 세상에 모든 부조리를 우겨 넣은 듯한 언어로 말했잖아여, 그렇지여, 첫번째 생 다음은 다 후렴구이지여, 그렇지여, 신은 희로애락을 무한의 버전으로 믹싱하는 DJ지여, 그렇지여, 우리 인간은 그 리듬에 맞춰 춤이나 출 따름이지여, 같이 커피나 한 잔 하실래여, 전 크림 안 넣어여, 하얀 게 뭉게뭉게 번져가는 걸 보고 있음 괜히 기분 나빠져여, 뻔한 성적 상상력에 지나친 예민함이라고나 할까여, 누구 기다리세여, 다행이군여, 요새는 뭐 하시나여, 전 요새 시 다시 쓰고 있어여, 사실은 아무거나 쓰고 이거 시다, 그러고 있어여, 엊그저께는 이력서에 사진까지 붙이고, 이거 시다, 이거 이력서 아니다, 그랬지여, 취직은 몇 번의 후생에나 가능하다 여겨집니다여, 아, 제가 이상한 놈으로 보이나여, 님의 표정이 불편하다는 의사를 살짝 비춰주시네여, 그러세여, 붙잡지 않겠어여, 커피 값은 제가...... 아, 그래주면 고맙지여, 안녕히가세여,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여, 다음 생에 볼 수 있음 또 보지, 아님 말지, 여.
풍경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油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이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 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간의 情理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하게 불켜지는 창문들.
3
마주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199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낙화
어느 지상에 가을이 임하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빛이 만인(萬人)의 발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낙화의 순간
누군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누군가 넘어지고
무언가 잘못된다
아직은 인간인 고아(孤兒)가
가족과 이웃
좋은 이와 나쁜 이를
구별할 수 없어 모두가 그리웁다
떨어지는 꽃이여
찰나의 귓바퀴를 맴도는 시간의 방랑이여
누군가 급히 거둬들인 시선이여
무언가 슬피 가리키는 손가락이여
지상의 어느 문에도 맞지 않아
허공에서 영원히 헛돌고 있는
고단한 열쇠여
텅빈 우정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항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항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될 것처럼
나는 대체로 무관심하답니다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입술이 하염없이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신비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내일은 진동과 집중이 한꺼번에 멈추는 날
그 다음 날은 침묵이 마침내 신이 되는 날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들이 동시에 끝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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