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틈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은 우겨지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역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2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추수꾼: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 ' The Solitary Reaper ' 에서 인용
3
무단횡단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4
종유석
동굴 따라 꾸불꾸불 길게 누운 어둠 속에서 이 딱딱한 바위들도 한때는 흘러다녔구나. 어둠 구석구석을 꼬리치는 도롱뇽처럼 기어다녔구나.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고드름으로 수세미로 버섯으로 꽃으로 아이스크림으로 마음껏 녹았었던 움직임들은, 한번도 머릿속에 들어가보지 못한 생각처럼 바위는 돌을 벗어나 유연하고도 자유로웠겠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형체가 되어 생각 속에 박힌 편견들처럼 튼튼해지고 말았구나 이제 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처럼 깨어질지언정 다시는 움직여 꽃이 되지 못하리라. 물방울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소리를 내며 퍼져 나가던 깊은 물은 그 물줄기들은 돌 속으로 들어가 돌과 섞이고 돌을 움직이더니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돌이 되었구나.
5
양철 낙엽
또 겨울. 나무 밑에 전봇대와 담벼락 주변에 몰려 있던 낙엽들이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나온다.
구두들에게 밟히고 타이어들이 밀어낸 바람에 날린다 아스팔트와 마찰할 때마다 속이 텅 빈 금속성 소리가
잎맥에서 새어 나온다. 오프너로 딴 날카로운 깡통뚜껑 자국이 잎 가장자리에 삐죽삐죽 나와 있다.
한때 양철에 그려져 있던 푸른 과실의 그림과 바람의 긴 글자들은 이미 붉은 녹이 되어 있다.
쓰레기와 뒤섞여 담을 오를 듯 홍게들처럼 우글거린다. 산성비 때문에 썩지 않는다고 한다.
6
가시
가시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침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까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러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꽂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 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것은 꽃이 되고
어느 것은 가시가 되었구나
시집 -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년 문학과지성사)
7
상계1동 수락산 입구
해마다 조금씩 기우는 집들 판자와 천막과 비닐로 지붕을 기운 집들 나무 기둥과 벽돌에서 푸른 이끼 자라는 집들 하루 종일 빨래만 널려 있고 사람은 안 보이는 집들 숨 쉴 때마다 변소와 하수도 냄새 들썩거리는 집들 비가 오려고 하면 마디마디 관절이 쑤시는 집들 해마다 봄이 되면 아픈 곳이 갈라지고 터지는 집들 페인트 냄새 마르지 않은 고층 아파트 바로 밑에서 큰 열대 초목 화분에 신장개업 띠를 두른 영양결핍 옆에서 땅값이 오르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며 있는 힘을 다해 낡아가는 집들
시집 - 소 (2005년 문학과지성사)
8
플라타너스 잎 하나
급히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어
돌아보니막 떨어지고 있는커다란 손 같은 낙엽이었다
팔 없는 손은 내 팔을 더 붙잡지 못하고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마침 뒤에서 오고 있던 발 하나가
무심히 밟자바스락!
발 밑에서 무수한 틈이 갈라지는
쇳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발이 멀리 가버린 뒤에도
소리들은 틈 사이에 남아
오랫동안 저희들끼리 바스락거렸다
가을 햇빛이 주름살을 쓰다듬듯
깨어진 마른 핏줄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넓은 잎은 크고 앙상한 손바닥을 오므리며
바스러진 틈으로 빠져나가는 허공을 오래오래 쥐고 있었다
9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 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현대문학 2002년 12월호
10
전자레인지
불도 없는데 생선비늘 들썩거린다
이글이글,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퍽, 퍽,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 들린다
은비늘 하나 다치지 않은, 바다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생선,
김과 열을 뿜는 흰 접시가 전자레인지에서 나온다
불도 없는데
할머니 얼굴 쭈글쭈글해진다
등뼈가 휘어지고 오그라들고 굳어진다
거친 숨, 가는 신음이 몸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깊은 주름을 흔들며 이 빠진 아이처럼 깔깔거리는 할머니
성한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
현대시 (2004년 9월호)
11
복권 파는 여자
빨간 지붕, 하얀 벽돌, 작은 반달창, 동화 속의 집 같은 예쁜 복권 판매점에 오늘도 그 여자는 앉아 있다. 시커먼 손, 누런 손, 하얀 손, 주름지고 딱딱한 손이 더 이상 갈 곳 없는 너덜너덜한 돈을 들고 와서 빳빳하고 깨끗하고 오색찬란한 복으로 바꾸어 간다. 복권으로 복을 받을 확률은? 십만분의 일?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 오, 얼마나 단단하고 두껍고 높은 희망인가. 이제 저 희망을 손에 쥐었으니 저들은 칼잠, 새우잠, 선잠, 불안하고 얕은 잠 속에서 필사적으로 돼지꿈을 꾸어야 하리라. 복권 파는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낡은 천 원짜리가 들어온다. 점쟁이처럼 그녀는 모든 걸 한눈에 보아버린다. 얼마나 불쌍한 손이 머뭇거리며 찾아왔는가를 그 돈이 얼마나 떠돌며 구겨지다 왔는가를 그 손이 받아갈 복이 얼마나 힘없이 찢겨질 것인가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기계처럼 민첩하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그녀는 헌 돈을 새 복권으로 바꾸어 준다. 지루하게 줄 서 있는 저 출구 없는 삶들, 사방팔방이 꽉 막혀 있는 저 삶들에 대한 그녀의 확고하고도 유일한 처방은 언제나 단 하나―복권이었다. 얼마나 많은 오갈 데 없는 돈들을 복으로 바꾸어 주었던가. 오늘도 얼마나 많은 복을 나누어 주었던가. 그래도 아직 복권은 많다. 주택 복권, 월드컵 복권, 더블 복권, 또또 복권…… 2억, 4억, 7억, 10억…… 당첨금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엄청난 복을 앞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그녀는 요염하게 하품을 한다, 복이 너무 많아 이제는 귀찮다는 듯 마법의 성처럼 예쁜 집에서 복을 관리하는 여신 노릇도 이제는 시시하다는 듯.
12
연탄 가스를 적당히 마시면 2
내 잠속에 손 하나가 들어와 휘이 휘이 휘젓고 있다. 내 몸을 더듬다가 슬며시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간지럼을 태우고 있다. 내 몸은 착하고 얌전하므로 그 손을 뿌리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손은 지금 내 바지 단추를 끄르고 있다.
잠의 한쪽이 조금 찢기고 내 어둠을 깨우며 빛이 들어온다. 아이들이 떠들고 때리고 우는 소리,전화벨 소리,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뒤이어 들어온다. 아이들이 내 잠의 벽에 “조아저씨지배는빨개버슨여자그림책이따”“딱지맹글개책조요”라고 낙서하고 있다. 어떤 아이가 책을 안 주면 연탄재를 던지자고 소리친다. 이어 더욱 극성스러워지는 아이들의 고함소리. 어서 일어나 저놈들을 쫓아내야 한다. 전화벨 소리가 더 크게 더 악착같이 울린다. 어서 일어나 나는 죽었으니 출근할 수 없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내 바지 단추를 끄르던 손은 이미 바지를 벗기고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 몇몇이 문앞에 모여 총각이 무엇을 하고 있길래 여태껏 안 일어나는지 들어가보자며 킬킬거린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어서 일어나 바지를 추켜야 한다.
내 잠을 찢고 들어와 내 옷을 다 벗긴 손 하나가 강아지처럼 잘 길들여진 나를 자꾸 쓰다듬어주고 있다. 나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 마냥 좋아 드디어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시집 - 태아의 잠 (1999년 문학과지성사)
13
여름 바다
낮은 곳 후미진 곳까지 남김없이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잔잔해진다. 꺼끌꺼끌하게 와 닿는 바위와 돌멩이들이 매끈매끈해질 때까지 그 오랜 날들을 나는 끊임없이 찰랑거려야만 한다.
한적한 하오의 햇볕 아래 나는 하릴없이 누워 있다, 파리를 쫓는 게으른 소처럼 해변에서 깔깔거리는 여자들 흰 잔등을 작은 파도로 찰싹찰싹 밀어내며. 수면 아래로는 푸른 위장을 지나가는 수백만 마리 은빛 고기떼. 푸른 이두박근 삼두박근 사이 정교한 결을 따라 날렵하게 새어나오는 넙치떼와 가자미떼.
고기들이 떼지어 이동하는 산란기가 가까워오면 나는 지구가 흔들리도록 거대한 몸을 뒤채이고 싶어지리라. 물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는 굵은 파도를 해변 넘어 아스팔트 가득 쏟아내고 싶어지리라. 조금만 몸을 흔들어도 배를 삼키고 섬을 덮치며 일어날 것 같은 파도는 아직 잠에 빠져 있다. 잠 속의 바다, 아아, 그 목구멍에 아직도 걸려 있는 착한 심청이만 아니었어도 흰 거품 게워내는 뜨거운 몸의 일부를 지구 밖으로 쏟아내고야 말았으리라.
지금, 한류와 난류가 뒤엉켜 도는 허리 어디쯤에서 나는 낮꿈을 꾸며 졸고 있다. 꿈틀거리는 내 꿈의 저편 끝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요동치다 잠기는 거대한 꼬리 하나. 며칠 후에 들이닥칠 천둥소리의 떨림이, 순간, 전해온다. 비늘 몇 개만 보석처럼 반짝이며 떠가는 여름 하오.
시집 - 태아의 잠 (문학과지성사)
14
가로수
지나가는 차들과 행인들에게 거치적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가지를 쳐낸 가로수들이 전봇대처럼 전선을 따라 도로변에 줄지어 서 있습니다. 가로수들이 껴입은 더러운 껍질은 긁혀 있거나 벗겨져 있거나 스티커가 붙어 있거나 현수막을 지탱하는 끈에 붙들려 있습니다. 남루하고 칙칙한 이파리들이 박쥐처럼 가지에 떼지어 달라붙어 있습니다
무성한 잎으로 여러 상점들 간판을 가리던 나무 하나는 분노한 톱에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아 있습니다. 한때 생명을 담았던 그 그릇에는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가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그 나이테의 무늬 속에는 생명이 바삐 드나들던 맑은 소리와 함께 혹한의 시간과 두꺼운 매연과 소음이 레코드판처럼 녹음되어 있습니다. 목 없는 통닭의 다리처럼 움직이지 않는 뿌리는 여전히 힘차게 땅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녹슨 상수관과 부글부글 끓는 하수도, 전화선과 가스관이 어지럽게 매설된 땅 속에 가로수들은 시추공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래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매장량이 무한대인 초록빛을 뽑아 올립니다. 고엽제 같은 매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저돌적인 생명, 그 고집불통의 습관을 막을 힘은 이 가로수들에게는 없습니다
모두가 지루하고 긴 삶을 각오한 지 오래입니다
15
명태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은 악쓰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 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작가 (2002년 여름호)
16
송충이
아삭아삭 빛이 부서지는 소리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
나뭇가지인 줄 알고 송진이
송충이 혈관을 지나간다
부서진 빛이 송충이 내장 속에서
퍼진다 꿈틀거리며 간다
솔잎인 줄 알고 송충이 털 속으로
수액이 송충이 털 속으로 들어간다
선인장 가시처럼 뿌리내린
푸른 빛 속에 뿌리내린 송충이 털
내장인 줄도 모르고 섬유질 속으로
꽃인 줄 알고 털 끝으로 희고 가는 선 끝으로
시집 - 태아의 잠 (1999년 문학과지성사)
17
머리 깎는 시간
이발사는 희고 넓은 천 위에내 머리를 꽃병처럼 올려놓는다.
스프레이로 촉촉하게 물을 뿌린다.
이 무성한 가지를 어떻게 剪枝하는 게 좋을까
빗과 가위를 들고 잠시 궁리하는 눈치다.
이발소는 시계 초침 소리보다 조용하다.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
재깍재깍 초침 같은 가위가 귓가에 맑은 소리를 낸다.
그 맑은 소리를 따라간다. 가위 소리에서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도록 귀 기울여 듣는다.
싹둑, 머리카락이 가윗날에 잘릴 때
온몸으로 퍼지는 차가운 진동.
후드득, 흰 천 위에 떨어지는 머리카락 덩어리들.
싹둑싹둑 재깍재깍 후드득후드득······가위 소리는 점점 많아지고 가늘어지더니
창밖에 가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흙에, 풀잎에, 도랑에, 돌에, 유리창에, 양철통에
저마다 다른 빗소리들이 서로 겹쳐지는 소리.
처마에서 새끼줄처럼 굵게 꼬이며 떨어지는 소리.
물뿌리개로 찬물을 흠뻑 부으며
이발사는 어느새 내 머리를 감기고 있다.수
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만져보니
머리가 더 동굴동글하고 파릇파릇하다.
비 온 뒤의 풀잎처럼 빳빳하다.
18
과적過積
내가 타고 있는 것이 어떤 동물인지 나는 모른다. 내 체중이 누르는 엉치뼈의 관절은 아슬아슬하게 이음쇠를 지탱하며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이 가끔 심장의 박동 소리와 엇갈릴 때마다 고열을 삼키는 숨소리가 내 꼬리뼈를 통해 척추로 올라와 다른 박자로 숨쉬고 있는 심장 속으로 들어온다. 당황한 내 숨소리가 빨라진다. 내 엉덩이 아래에서 겨우 체중을 버텨내고 있던 숨통이 서둘러 숨을 들이쉬다가, 순간,입구가 눌려 막힌다. 풍선처럼 경쾌하게 늘어나는 허파. 갈비뼈 마디마다 새어나오는 흰 건반 같은 울음. 팽이처럼 급히 균형을 잡는 큰 몸집과 가는 다리. 속도와 힘이 숨죽여 정지한 순간은 아름답다. 오랜 숨막힘, 핏줄은 붉은 살가죽을 잡아당기고 고음이 마지막 건반을 넘어가는 그 끝에서 가늘고 빠른 휘파람 소리 하나가 완강한 무게를 끌어올린다. 이어 휘어진 가는 다리가 펴지고 어긋났던 관절이 삐걱거리며 제자리를 찾는다. 계속되는 움직임. 내 꼬리뼈를 타고 불안한 박자로 올라오는 뜨거운 심장의 운동. 아랫도리가 오줌을 쌀 듯 간지럽다.
시집 - 태아의 잠 (1999년 문학과지성사)
19
나뭇잎 떨어지다
나뭇잎에도 무게가 있네. 그 무게에 나뭇잎이 떨어지네. 나뭇잎 무게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네. 바람과 공기가 떨어지는 무게를 건드려보네. 바람이 자신을 붙들고 마음껏 흔들도록 나뭇잎은 그냥 내버려두네. 후려치고 할퀴는 것을 다만 쳐다보기만 하네. 바람의 힘이 세면 셀수록 그 힘을 타고 나풀거리는 무게의 곡선은 더욱 신이 나네. 그 곡선은 바람의 힘을 넉넉한 부력으로 삼아 바람에 등을 대고 눕네.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는 힘도 나뭇잎을 쫓기만 할 뿐 어찌하지는 못하네. 바람이 힘 빠지면 나뭇잎은 땅으로 살짝 내려오네. 풀잎 위에 누워 쉬면 바람은 다시 잎을 나꿔채서 쥐고 흔들어보네. 나뭇잎은 바람의 성깔이 엽맥 속으로 숨구멍 속으로 깊이 스며들도록 놓아두네. 오히려 그 흥분으로 온몸을 파르르 떠네. 나무 밑에는 나뭇잎들이 가득하네. 겨울 나무 밑에는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들이 가득하네.
20
얼룩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자리를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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