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송하다 / 오정자
올해 내 생일에는 강아지 한 마리를 샀다. 마흔 네 번째 생일인가에는 벤자민을 샀었는데 다음 해 생일이 돌아올 때까지 살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 꼭이 그런 이유에서 강아지를 샀던 건 아니지만, 화초 못지않게 생동감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 게, 강아지를 선택한 이유였다. 기대 보다 웃도는 생동감에 정신을 홀딱 빼앗겨, 강아지를 붙좇는 두 어른의 풍경은, 마치 양지녘에 앉아 손주를 돌보는 할배 할매 같으다. 그야말로 늙수그레한 自畵像.
메롱아 메롱아- 목청을 높여 부르다가 데끼 이놈 야단을 치기도 하며, 미운 서너 달이라고 혀를 차며, 저것이 열 달은 지나야 철이 나서 얌전해 지지 하며, 정말 사람에게 말하듯 하였다. 조것이 우리 얘기를 쓰기엔 아직 이르고, 그래 내가 조것 얘기를 늘어놓아야지, 했던 게 벌써 석 달이 지나간다. 언젠가 녹색가게 안에 한 할매에게 메롱이 얘길 들려주자 얼싸하며 맞장구를 치는 말이, 우리도 강아질 한 마리 키웠는데 글쎄 그 개가 말이지, 내가 외출할 때 ‘너 이 자리에 꼼짝말고 앉아 있어’ 하면 정말 돌아올 때까지 꼼짝도 않고 고 자리에 앉아 있더라고! 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에잇 설마’ 했었다.
개가 어떻게 사람 말을 그렇게까지 정확히 알아들을 것이며, 설령 알아들었기로서니 우리 집 메롱이 같으면 온 마당을 다 해벌치고 다녔을 게 뻔한데, 어찌 고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아 기다릴 수 있어, (지가 뭔 '늑대소년'*이라고)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세수를 하면서 나는 속으로 또 픽 웃었다. 역시 나란 사람은 참 고지식(naive)하구나! 느껴져서였다. 그 할매의 말에는 두 가지 이상의 은유가 깃들어 있었건만, 그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걸 깨달아서였다. 그녀의 은유를 상상하며 동시에 나의 성격을 다시 생각하며 훗 늦게라도 깨달아져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웃었다.
가는 말 오는 말. 가지도 오지도 않는 말. 소통이란 화두를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갈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떠나 주변인 가운데 꼭 한 두 사람은 지말만 떠드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그것은 그럴 것이기에 그런 사람은 그러려니 하면 된다 고 다짐도 하고 미워도 말자 맹세도 하지만, 정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지겹고 목소리조차 듣기 싫어질 때가 있다. 저 사람만 나타나면 주변이 시끄럽고, 저 사람이 시끄러우면 주변사람들이 조용해진다는 걸 알아챘다. 떠드는 내용은 너무나 단순 일정하여, 먹는 것, TV 본 것, 남 헐뜯는 것, 자식 자랑하는 것, 재산 자랑하는 것, 고작 그게 전부인데, 무엇때문에 리바이벌하고 재탕 삼탕 우려 먹이려 드는지. 그 시스템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나는 자포자기해 버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젯밤에는 사는 게 참 외롭다 고 누워서 중얼거리는데, 웬 남자가 그게 바로 문학이야, 하는 게 아닌가. 문학?
어정쩡허니 섰는지 누웠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의식과 형식의 중간쯤에서 홀로임을 느끼는 ‘그, 나(her)’란 존재는 무엇일까. 몸을 뒤척이며 두런두런 말을 걸어 보았다. 간밤에 그랬던 내가 아침에는 타인의 손을 빌어 다시 커피를 마시고 초코칩 쿠키를 한 봉다리 집어 먹었다. 착착 잘도 넘어간다. ‘찰라’란 이름의 페이지가 참으로 신기하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초침소리에도 민감한 내 몸의 감각(특히, 冷溫을 느끼는)이 신열과도 비슷한 몸살을 앓는다. 내 몸의 온도도 내 의지대로 조절되지 않음을 느낄 때면 더욱 서글프다. 주변을 감싸는 듯 겉돌던 음성들과 뜻 모를 소음들과 웅성대던 소요의 얄궂음이 외롭다.
아니 진정 외로운 건 그들이 아니라 나인 것. 그들 속에서 한 말도 한 목소리도 내놓지 않았으니, 어쩡정허니 눈만 껌벅거렸으니. 저들이 설령 왜 저 여잔 종일 말이 없지, 의문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맥없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바로 고독이란 것일까. 잠결에 몸의 열을 느끼고. 잠결에 옆 사람의 얼굴을 만진다. 자다가 깨어 옆 사람이 어이 시원타 말한다. 왜 뜨거운 손으로 얼굴을 만졌는데 그는 시원타 말했을까. 몸의 여러 부분 중에 한 부분만 쑤시거나 간지러워도 온 몸이 난리다. 한 부위만 쫑알대도 온 몸이 시끄럽다. 병원에 가 봐, 얼렁 병원에 들러 봐, 부추긴다. 몸은 소통의 場이다. 마디마디 관절들로 연결되어 설상가상 하나라도 끊어지면 피가 멈추고 호흡이 멈추고, 곧 죽는다. 나 보다 더 민감한 몸. 그것을 어찌 남이라 부르겠는가.
낮 동안 부딪히며 떠들며 만나기도 하며 얼만큼이나 通하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것일까. 낮 따로 밤 따로. 몸 따로 의식 따로. 따로가 존재양식이 되버린 기계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한 밤중이면 나라도 내 몸을 어루만지며 속삭여 주는 것이니. 외롭니, 고독하니, 쓸쓸하니. 그런데 그런 말은 어디서 빌려 왔니 하면서, 몸을 아껴두기 위한 無盡한 뒤척임을 지켜보는 것이다. 자다가 다시 깨어 그가 내 몸을 만졌다. 어디가 그렇게 많이 아픈 거야. 언어의 頂點은 침묵이라는 듯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첫 시야에 메롱이가 뛰어든다. 굿모닝 메롱- 대답하지 않고 꼬리와 엉덩이만 흔드는 메롱. 소통 끝!
아침에 최승호 시인의 시를 읽는다. 3년 전 오늘 읽었던 그의 시를 또 읽는 이유는, 메일 수신함에 일주일 전부터 와 있는 그의 다른 시를 힐끗 보았기 때문이고, 배경지식 대신 예년에 읽었던 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너그러운 인간의 응시와 철학적 사변을 빼지 않은 그의 노래. 그의 몸은 요즘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최승호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 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럽게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문학동네 시인선, 최승호의 '아메바' 中>
* 체온 46도, 혈액형 판독불가… 세상에 없어야 할 위험한 존재 늑대소년. 2012년 시월에 상영된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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