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문혜진<8분 후의 미장센>

미송 2009. 5. 26. 00:35

8분 후의 미장센

 

8분 후, 태양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으로 돌변하고, 복지원 앞에 버려진 아기는 동파한 수도관처럼 얼어붙어, 당신의 배관 속 검은 머리 비단뱀, 8분 후면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사라지겠지 순식간에, 저격수의 렌즈는 떨어져 나간 각막처럼 깜깜해지고 사냥꾼은 멧돼지를 쫓다 올무에 걸려 그림자 활극처럼 펄쩍 뛰겠지 그 모든 것들이 하늘을 보는 순간, 무수한 시간에 걸친 파괴적인 노력들이 고개를 쳐들고, 빌딩에서 투신한 넥타이는 비명에 목이 졸린 채 암전, 그리하여 8분 후 배우가 배역을 빠져나와 마스크를 쓰고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해 고심하는 동안, 사막에서 화석을 찾는 사람들은 돌덩이 속에서 인류의 오래된 식인 습관을 발굴하지 황량한 바람이 불고,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해 안부를 묻는 목소리들은 외로운 얼룩으로 별들의 식민지를 떠돌다 멀어지겠지 8분 후, 시청 앞 시계는 12시, 알제리에서 기차를 타고 마르세유로 가던 물병자리 소녀는 화장실에서 혼자 아기를 낳지 유괴당한 아이는 앵벌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왼팔이 잘리고, 8분 후 도달할 태양 빛이 돌이킬 수 없는 어둠으로 돌변하자, 그 모든 시간차의 토타카와 푸가, 음역이 풍부한 암흑 속 먼지처럼 우리는 잠시 퍼덕이다 페이드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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