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박노해 <별>시

미송 2009. 5. 23. 20:25

      새벽별

       

      새벽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니

      창살 너머 겨울나무 가지 사이에

      이마를 탁 치며 웃는 환한 별 하나

      오 새벽별이네

      어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온다고

      가장 먼저 떠올라

      새벽별

      아니네

      뭇 별들이 지쳐 돌아간 뒤에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별

      끝까지 돌아가지 않는 별이

      새벽별이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 아니네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별

      그래서 진정으로 앞서가는

      희망의 별이라네

      지금 모든 별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사라지고 돌아가는 때

      우리 희망의 새벽별은

      기다림에 울다 지쳐 잠든 이들이

      쉬었다 새벽길 나설 때까지

      시대의 밤하늘을 성성하게 지키다

      새벽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소리없이 소리없이 사라지느니

      앞이 캄캄한 언 하늘에

      시린 첫마음 빛내며 떨고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사람아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대

      오 새벽별이네!

       

       

      眞光不輝

       

      밤하늘에 가장 빛나는 별은

      북극성도 명왕성도 아니다

      인공위성이다

      眞光不輝!

      참된 빛은 번쩍거리지 않는다

      어둠 속의 별빛은 부드럽고

      슬프고 은은하고 따뜻하다

      지금 너무 눈부시고

      너무 찬란한 별들을

      경계하라

       

       

      국경의 밤

       

      국경의 밤은 차갑고도 길어라

      별은 번득이는 총구에 빛나고

      광야의 모래 바람은 언 뺨을 때리는데

      나는 무릎 꿇린 낙타처럼

      국경의 철책에 걸려 떨고 있다

      누가 갈랐는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금지선

      총칼로 갈라 놓은 국경선

      대지는 쓰러져 누워 말이 없고

      건기의 강바닥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가여운 울음을 울고 있다

      오, 네 발길은 국경의 밤을 헤맬지라도

      네 가슴은 국경 없는 마을에 뜨는 별의 지도를 따라

      해 뜨는 아침 길을 낙타처럼 걸어가라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이 지구별에 목숨 받고 태어나던 날

      자기 운명의 별 하나 품고 나왔으니

      이번 생에 꼭 해야만 할 일이 있어

      그 몫을 다 하지 못하고 휩쓸릴 때

      너의 행복은 어디에도 없으리니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자기만의 길을 찾아 울며 분투하며 나아가지 않는다면

      네 영혼은 울부짖으며 유성처럼 사라지리니

      그러나 슬퍼하지 마라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신의 길을 찾아

      피투성이 맨발로 헤매고 쓰리지고 다시 일어서며

      고통의 인생길을 함께 걷고 있으니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르는

      저 눈물어린 별들처럼

       

       

      떠오른 별들을 보지 못하고

       

      푸른 밤하늘에

      별빛 찬란하다

      아니다

      어둠이 저리 깊은 거다

      별은 낮에도 떠 있는데

      밤 깊어 세상이 어두울 때야

      비로소 별빛이 보이는 거다

      우리 앞길 이리 캄캄인데

      찬란하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니다

      닫혀 있는 내 눈이

      떠 있는 별들을 보지 못할 뿐

      떠오르는 샛별을 보지 못할 뿐

       

       

      별빛 아래

       

      별이 흘러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왜 한 번도 웃음 짓지 못했던가

      별이 빛나는 밤길을 홀로 걸으며

      나는 왜 늘 젖은 눈이어야 했던가

      가만히 들여다보는 별은 왜

      언제나 글썽이는 눈동자인가

      별은 스스로 빛나는 별이 아니라

      누군가의 빛을 받아 빛나는 존재

      먼 우주의 어둠을 뚫고 와

      내 심연에 닿아 빛나는 별들

      눈물처럼 글썽이는 별빛 아래

      나는 왜 젖은 눈으로 미소 짓는가

      내 빛이 아닌 빛에 울고

      내 안의 빛에 미소 짓고

      별이 지나가는 계절의 밤길에서

      나는 왜 글썽이는 눈동자로 미소 짓는가

       

       

      별에 기대어

       

      이 지상에 목숨 받고 태어난 사람들은

      밤 하늘에 떠 있는 자기 운명의 별과 함께 살아간다

      의지할 데 없어라

      창살에 기대어

      밤 하늘 헤매어도

      먼 그대

      찾을 길 없어라

      오리떼 날며

      우지마라 우지마라

      옥담 너머로 사라지고

      사랑이여

      그대와 나 사이가

      너무 험하다

      세월은 얼음장 밑으로

      살을 에이듯 흘러가고

      그대 온기 그대 음성마저

      속절없이 바래가고

      우리 인연의 때는 그 언제

      눈보라 아득한 겨울 속으로

      다시 길 떠나는 겨울 사내 하나

      그대 변함없이 젖은 눈으로

      말없이 지켜봐준다면

      긴 호흡 심장의 고동 함께 한다면

      살아 있겠네

      겨울 사내로 살아 있겠네

      언 하늘 헤치며

      별 하나 돋는다

      오 사무친 내 입맞춤을

      먼 그대에게 전할 길 없어

      내 운명의 별에게 입맞춤하느니

      내 별이 그대 별에게 입맞춤해준다면

      살아 있겠네

      살아 있겠네

      끝내 봄을 품은 겨울 사내로 살아 있겠네

      별에 기대어

      별에 기대어

       

       

      별은 너에게로

       

      어두운 길을 걷다가

      빛나는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 아니다

      불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본 별들은

      수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

      길 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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