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노혜경<시인이라는 정체성>

미송 2013. 7. 28. 15:33

시인이라는 정체성 
                   --지식인인가 예인인가 

                                                                                                        노혜경  (시인)      


          

1. 사건들

소위 제삼천년기가 시작되면서, 우리 문단은 변화의 격류에 휩쓸리고 있다. 강준만 교수의 주도로 시작된 실명비판의 물결이 문학계에도 미치면서, 문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이 비판받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문학에 대한 기존의 태도가 수정되고 변화한 적이 처음은 분명 아니지만, 최근의 변화는 문학외적인 시대 상황의 변화에 이끌린 것도 아니고 담론을 수입하던 선이 바뀐 데서 비롯된 것도 아닌, 문단 내부의 자생적인 문제제기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최근 문단에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는 거칠게 꼽아보아도 다섯 가지다. 첫째 김정란의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이 촉발한 문단권력과 언론의 유착에 대한 문제 제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후속 논쟁들이 있다. 김정란의 문제제기가 불러 일으킨 파장은 깊고도 심각한 것이지만,(이와 관련하여 비평가 이명원은 김정란을 "담론의 뇌관"이라는 말로 적절히 부르기도 했다) 뜻밖에도 비판의 표적이 된 문학동네와 문지 권력자들에 의해서는 사석에서의 중얼거림을 넘어서는 어떤 대응도 본격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두번째는 권오룡의 [권력형 글쓰기에 대하여]라는 평문이 야기한 논란이다. <김현 10주기 심포지엄>에서 권성우가 발표한 [4·19세대 비평의 성과와 한계]라는 글에 대한 반론격인 이 글에서 권오룡은 '권력 비판'이 '권력을 깨뜨린다는 명분'으로 '권력의 음지에 기생하는 것'이라고 험담한 일이 있다. 이에 대해 문사 지면에 반론권을 요구한 비평가 권성우의 정당한 요구를 문사가 거부함으로써, 문지에콜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4.19 세대 비평가들은 아마도 비평담론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문단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에 옮겼던 최초의 비평가 '그룹'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4.19 세대를 이어받은 에콜이라 할 문지에서 정당한 논쟁의 장으로 나서지 않고 기득권에 안주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따른 문단의 왜곡 현상은 대단히 심각하다.

세번째 사건은, 조선일보사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제도의 개편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이다. 동인문학상의 심사대상에 오르기를 거부한 황석영의 선언과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인 이문열, 정과리의 입장 표명에서 비롯된 공방은 조선일보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서명운동으로 번지고 있으며, 1차 서명자 명단에는 다수의 시인들도 들어 있다.

네번째는, 가톨릭대 역사학과 교수 박광용의 [국화옆에서] 비판이 야기한 친일파 논쟁이다. 공적 영역에서의 시인의 처신이 텍스트에 대한 가치평가와 무관한가라는 질문을 유발시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섯번째는, 박남철 시인이 여성시인 폭행 및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한 사건이다. 사안 자체가 폭력 등의 혐의라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경과에 이르기까지 80년대 문학사에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하는 문단적 평가가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2. 문제들

비판자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태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위의 다섯 가지 사건은 하나의 꿰미로 엮이어진다.
비판자들은 상대의 실명을 적시하면서 특정한 언술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비판당하는 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마지못해 답변의 자리로 나올 때에도 '아는 사람은 안다'는 식의 '분무기 안개 비평'으로 일관한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비슷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 사건들은, 인터넷을 통해 훨씬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리하여 문학과 담론의 유통구조에 새로운 지형변화를 몰고 왔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등단을 하고, 특정 문예지에 글을 싣고 하는 절차를 통해 담론의 생산자로 가입하던 과거의 관행을 깨고, 인터넷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문학의 일에 관여하는 경험은 분명 새로울 뿐만 아니라 희망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비판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문학텍스트가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권력을 발생시키며 따라서 텍스트의 발설자들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권력을 행사하는 데 따른 공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반면에 비판당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저자와 무관한 텍스트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텍스트를 통해 발생하는 권력은 루머이고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언표의 뒤에 숨어서 대중을 향한 실질적 권력을 여전히 행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번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사태로 묶어볼 수 있는 초점이 바로 이러한 충돌이다.

이 모든 공방들을 지켜보면서, 시인인 나는 과연 '시인'이란 누구인가라고 하는 심각한 정체성의 의문을 느낀다. 특히 시인들이 관련된 뒤의 두 사건의 경우, 앞의 세 사건에 비해 덜 중요하게 다루어지거나 덜 문학적인 사건이라고 생각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유는, 본격적으로 주의 주장을 개진하고 또 비판을 제기하는 비평담론의 영역에 속한 앞의 세 사건과는 달리 뒤의 사건은 '사람'이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단의 오랜 관행인 텍스트와 저자의 분리라고 하는 관점이, 이 사건들을 문학적 문제로 바라보기를 방해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미당과 박남철의 양쪽에서 공히 발견되는 텍스트와 시인의 분리가 과연 온당하고 가능한 것인지를 따져보고 싶고, 나아가 문단 권력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시인의 신비화도 문학을 위해 해로운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공론화되기를 바란다.


3. 미당의 경우--기득권 옹호라는 정치성을 담보로 한 예술가 레테르의 획득

일단, 최근 제기된 두 문제의 진원지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미당을 어용시인으로 고발한 역사학자 박광용의 글에 대해 반론한 것은 지금으로서는 비평가 이남호의 정동칼럼뿐이다. 그러나 이 칼럼에는 그동안의 미당에 대한 학계의 태도가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큼 골고루 소개되어 있으므로,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과연 미당이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만큼 반민족적인 행동을 많이 한 사람일까. 이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정확한 연구가 있어야 하고, 또 여러 가지 상황이 조심스럽게 고려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다른 점도 섬세하게 저울질해야 한다. [중략] 미당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최고의 시인이다. 첫 시집 ‘화사집’ 이후, 미당은 반세기 이상 동안 수많은 명시들을 발표하였고 놀라운 시세계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가령 미당은 ‘화사집’ 한 권만으로도 대표시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시인이다. 그러나 미당은 그 후 ‘귀촉도’ ‘서정주시선’ ‘신라초’ ‘동천’ ‘질마재신화’ 등 ‘화사집’을 오히려 능가하는 많은 시집을 냈다. 여러명의 큰 시인들이 합쳐도 미당의 시세계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미당만큼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표현을 확장시킨 시인은 없다.

또 미당만큼 우리 민족의 마음씨와 정서를 잘 표현한 시인도 없다. 겨레의 말을 아름답게 다듬어 겨레의 마음씨를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하고 되살린 미당의 문학적 업적은 문학사뿐만이 아니라 민족사에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미당이 없는 한국 현대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당의 정치적 행적이 얼마나 잘못 되었고, 우리 민족사에 누가 되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미당의 시가 그런 이유로 매도당하는 것은 엄청난 민족문화의 손실이다.[후략]

이남호의 글에서 엿보이는 가장 심각한 위험은, "미당이 없는 한국 현대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엄청난 민족문화의 손실"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미당의 시는 친일파이자 독재정권에 복무해 온 그의 인생과 무관하게 한국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한국적 정서와 가치를 잘 담아내는 언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시인의 시를 그의 정치적 행적만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 태도가 이남호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이라면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도덕적, 정치적 파탄에 대해 한국문학이 비교적 관대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기득권을 옹호하는 작가의 정치성'은 '정치성'이 아니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어왔다. 이런 합의의 바탕 위에, 기득권의 이익에 복무하는 작가들의 도덕적/윤리적 파탄을 문학의 이름으로 눈감아 온 것이 아닐까?

이 점은 80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의 상황은 그 이전이나 이후와는 겉으로 보기에 정 반대로 나타난다. 분명한 정치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작가들은 폄하되고, 정치적 색채가 분명한 작가들의 사생활은 그의 공적 발언의 선명함으로 인해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아 왔다. 그러나, 문단이라고 하는 작은 사회에 국한시켜 보자면, 저항이데올로기는 문단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고, 바로 그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작가군들이 소위 '어용' 작가들과 똑같은 관면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은 대동소이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록 미당이 저 80년대에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비난과 지탄을 받아 왔기는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 그의 문학이 외면당한 적은 없었고 80년대의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문단에서 그의 영향력이 약화되지도 않았다. 수많은 출판사에서 여전히 그의 시집을 펴냈고, 그 시집들은 여전한 인기로 팔렸으며, 미당의 그늘에서 '정치적'으로 특별한 죄과가 없는 한 시인의 '비정치성'은 오히려 미덕으로 권장되기까지 한다. 더구나, 미당 문학의 문학성에 대한 확신은 문인에게 정치적 불순함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을 뜨거운 감자로 만들어버리기에 족할 만큼 컸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이남호의 미당 문학에 대한 옹호이며, 그 폐단은 정말 넓고도 심각하다.

과연 미당 문학의 예술성은 미당의 모든 세속적 굴절을 덮어버릴 만큼 위대한 것일까? 문학작품은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 자신의 개인적 체험의 범위를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그 위대함에 따른 존경과 찬탄이 그 작가의 온갖 잘못을 덮어주고 눈감아주어야 할 만큼 막강한 것일까?

이남호는 이에 대해, 윗글의 인용하지 않은 부분에서 에즈라 파운드의 예를 들며 문인의 정치적 행적과 문학성을 분리하는 것이 타당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에즈라 파운드는 모더니즘의 극단적 페단을 보여준 시인으로, 에즈라 파운드와 그의 동료 엘리어트의 문학을 고평하거나 동조하지 않기 위해 일어났던 문학적 운동이 바로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가. 파운드와 관련해서는, 모더니즘적 세계관의 파탄이 결국 파시즘에 동조하는 범죄를 저지르게끔 몰고 갔다는 문학적 평가가 반드시 따른다는 점을 이남호는 무시하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문인의 정치적 범죄는 그의 문학에 대한 의심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본보기가 오히려 에즈라 파운드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언제 친일 문인들에 대해, 그들의 언어에 친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장되어 있었던가, 나아가 그 언어가 드러내는 세계관이 파탄을 겪을 때 그 문학을 예술적이라 평가해도 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하려는 시도를 해 본 일이 있는가?

미당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분명 80년대 내내 문단의 '왕따'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리하여 사적으로는 댓가를 치렀다고 볼 수 있을지라도 문학사에서의 평가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이남호의 말처럼, "이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정확한 연구가 있어야 하고, 또 여러 가지 상황이 조심스럽게 고려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다른 점도 섬세하게 저울질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남호는 미당을 옹호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연구를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 없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최고의 시인" "우리 민족의 마음씨와 정서를 잘 표현한 시인" 등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비록 신문의 칼럼일지라도 위험한 발상이다.

나는 이남호의 글에 반박하는 글을 쓰면서 "우리 문단과 제도적 문학교육은, 언어를 삶에서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작동해 왔으며, 그러한 분리의 결과로 지금 우리가 말의 타락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바로 이것이 미당 논쟁의 핵심이다.

논쟁의 핵심은, 이남호가 주장하듯 단순히 '국화'가 이승만이냐 아니냐에 대한 해석문제나 또는 시인과 시의 관계, 더 정확히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온당치 못한 삶을 살아온 시인의 시도 예술적으로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말, 또는 문학작품이란 문학성과 예술성으로 평가받는 것이지 정치나 도덕의 잣대로 잴 것이 아니라는 말에 대한 찬반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시의 예술성을 결정하는 우리 사회의 판단기제가 과연 정확히 작동해 왔는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나 자신의 주장을 인용하자면, "미당의 문학이 예술적으로 위대하다고 말하기 전에, 왜 우리 문학사는 거의 고의적이라 할 만큼 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작가의 행적을 분리시켜 놓고서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 왔는가를 물어야 한다."


4.박남철의 경우---아방가르드적 '탈정치성'을 담보로 한 예술가 칭호의 획득

박남철의 문학을 대단히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칠게 보아도 세 가지 차원에서 미당의 문학을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첫번째로, 박남철은 자기의 문학행위에 대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시작업을 해 온 시인이라는 것이다. 박남철은 자신의 삶을 텍스트화하겠다는, 그 자체로는 지극히 온당한 문학적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미당이 작품속에 거의 언제나라고 할 만큼 허구의 자아를 등장시키며 삶의 현장에서 비켜난 전달자의 자세를 취하는 데 비해, 박남철의 시는 시인이 언제나 전면에 있다. 가족과, 지인들과, 자신의 경험했던 모든 상처와 의문들이 생경하다시피 한 언어로 튀어나온다. 그의 시는 그의 자서전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번째로, 미당이 자기 시에 대한 해석의 입을 일방적으로 학자들이나 비평가와 같은 독자에게 양도하고 작품의 뒤에 숨어 있던 것과는 달리, 박남철은 시를 통하여 자기 문학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비평가들에게 담론의 씨앗을 제공해 왔다.

세번째로, 시인추천권을 행사하며 에피고넨을 생산하는 것으로 문단권력을 장악한 미당의 경우와는 달리, 박남철의 문학은 문단권력에 대한 적극적 도전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기득권을 지닌 문학에 도전하는 문학적 아방가르드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크나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인이라는 한국사회의 특수한 신분 속에서 두 사람에게는 유사점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가 여전히 시인 자신의 역사적, 심리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텍스트에 담긴 '투명한' 언어로만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해석의 장에서 시인의 맥락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미당의 경우는 앞 장에서 이야기했으므로 박남철의 경우만 살펴보기로 하자.

주 14에서 미리 언급했듯이, 박남철의 해체 전략은 문학사 내부를 향한 것이었고, 당대의 문학적 상황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거칠게 요약해보면, 물적 근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문학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미적 근대성에 대한 갈망이 '고백'의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 박남철의 시였다. 그러나, '고백'을 수용하기에 당시의 문학현장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기상조였다. 모더니즘을 외적이고 형식적인 실험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해 온 학적/비평적 협소함과, 광주로 인하여 공동체의 삶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던 현실적 제약이 큰 이유였다. 따라서 박남철의 시도는, 그 자신이 직접 정교한 담론을 발생시키고 '고백'에 걸맞는 실천을 수행함으로써 비평계와 시단에 관철시켜내지 못한다면 사장될 수밖에 없는 기획이었다.

박남철의 시가 지닌 문학적 성과가 80년대로써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평가들뿐 아니라 박남철 스스로도 자기 시가 지닌 가능성을 스스로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했고, 문단의 주목을 받기 위하여 형식실험으로 자신을 몰아간 혐의가 분명히 있다. 다시 말해, 텍스트와 일치하고 텍스트를 통해 자기자신을 재구성해 가야 할 종류의 문학을 제안한 시인이, 지속적으로 텍스트만을 징발하는 비평가들에 의해 오독당해 왔던 것이다. 그 오독의 결과로, 마침내 시인 자신이 자기 시를 오독하기 시작한 결과가 기이한 자기노출의 시들이다.

주체의 재구성이라는 자기 텍스트화를 시적 방법으로 삼았던 시인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것을 시로 쓰기만 하면 면죄부가 주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경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오로지 억압을 재현하기만 해도 시 텍스트를 통해 저항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거대담론의 층위에서이다. 광주, 군사독재 등등의 정치적 억압은, 그 억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였으므로, 재현이 곧 비판이었다. 그러나 재현의 대상이 개인의 차원으로 옮아가게 되면 단순한 재현뿐 아니라 '해석'과 '구조화'라는 작업이 요구된다. 구체적 개인의 '일상'이 '정치적'이 되는 바로 그 국면은 '재현'만으로는 파악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비평계는 바로 그 점에서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개별적 접근이 요구되는 개성적 시인들의 발생을 여전히 거대담론--그것이 정치담론이든 시학이든 상관없이 디테일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거대담론이다--으로 재단한 잘못이다. 박남철은 시에 담긴 삶의 내용과 관련하여 어떠한 비판도 받은 바 없이, 그의 시작 행위 자체를 새로운 실험으로 간주하는 비평에 직면하여 삶과의 치열한 대결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점에 대해서는 장정임의 [박남철, 시와 삶의 비극적 일치에 대하여]를 참조하기 바란다.

정리하자면, 미당은 스스로 작가 자신의 삶을 텍스트에서 완전히 배제해 버리는 댓가로 친일과 부역이라는 현실적 잘못에 대한 면죄부를 얻었다. 비평가들은 자신들의 담론행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미당에게 예술가의 칭호를 부여해 왔다. 박남철은 끊임없이 시를 통해 자기자신을 드러내 왔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그의 시가 말하는 인간의 윤리적/정치적 정당성을 묻지 않았다. 박남철의 시가 지닌 파격적 형식은 비평가들에게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문학에 대한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파괴적 시쓰기로 아방가르드라는 영예로운 왕관을 쓰고 예술가의 지위에 등극했지만, 기실 그 왕관은 머리가 아니라 꼬리에 씌워진 것이었다.

물론, 비평담론을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에 공모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90년대 문학의 파행을 몰고 온 실질적 문화권력자들이 시에서 시인을 몰아내고 문학에서 가치를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 왔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시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급격히 흔들리는 기존 문화권력의 향배가 바뀌더라도, 시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자각을 지니지 못한다면, 나쁜 역사가 본의아니게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시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5. 결론--시인은 지식인인가 예인인가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대체로 우리 시인들은 자기 자신을 현실문제에 오불관언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멀리는 친일파 문제에서 가까이는 문단 권력을 비판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시를 쓰는 일 그 자체를 제외한 어떠한 공적 발언도 시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듯한 기묘한 불관여주의의 태도를 견지하는 시인들을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를 저절로 탄식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이라는 이름에 주어진 상징권력을 있는 대로 누리면서도 사적 영역에서의 자기 자신과 시를 통해 독자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 사이의 분열을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앞의 태도에서 엿보이는 것은 시와 시인에 대한 전근대적인, 또는 고전주의적인 관념이며, 뒤의 경우에 바탕이 되는 사고는 신비평적인 관점에서의 시와 저자의 분리일 것이다. 미당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하고, 박남철의 경우는 아방가르드로 출발했으나 전근대로 되돌아가고 만 일종의 파탄이다.

미당의 친일부역과 박남철의 폭력/성추행 혐의는, 앞의 것은 시인의 공적 영역에서의 처신이 문제이고 뒤의 것은 사적 영역에서의 행동이 문제라고 하는, 언뜻 보기에 대단히 상반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두 사안이 문단에서 제대로 담론화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시인'이라고 하는 현상과 그가 생산하는 '시텍스트'의 관계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분할통치될 수 있고 또 있어야 한다는 문단의 암묵적 합의 때문이다. 이 사건은 '시인'자신들이 말해야 하는 사건임에도 시인의 입은 비평가에게 저당잡혀 있기 때문에, 비평계의 문제의식이 없는 한 영원히 침묵중에 떨어지고 말 사안이 될 수도 있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가를 고민하는 동안, 나는 우리 시인들이 스스로에게 지니고 있는 이미지가 '지식인으로서의 시인'이 아닌 '예인으로서의 시인'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때의 '예인'이란, 비판이론가들이 말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수공업자' '저자의식이 발생하기 이전의 노래꾼' 등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는 지금 내가 말한 바의 지식인/예인 구분에서 분명히 지식인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문단의 시인의식은, 아직도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보는 자의식에서 멀리 뒤떨어져 있다. 글쓰는 자들을 대단히 전근대적인 이항대립 -- 선비/예인 -- 으로 구분하는 의식에서 그렇개 발전해 있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예인"적인 내포를 "예술가"의 외연에다 덧붙임으로써, 시인과 대중독자에게 가짜 아우라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미당을 예술가라고 말하는 것과 박남철을 예술가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대단히 상반된 문학관을 토대로 한 발언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월계관이 현실과의 분리, 현실 저 너머의 세계로의 유람이라면, 그것은 무늬만 '예술가'인 일종의 '예인'화이다.

현재의 문단 상황을 보면, 불행하게도 시인은 '텍스트'를 비평가에게 징발당하고 자기 시에 적극적인 발언을 자제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댓가로써 '명예'를 얻는다.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댓가로써 '찬양'을 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침묵'과 '절제'의 '미덕'을 발휘한 댓가로써 사적 영역에서의 도덕적 파탄과 공적 영역에서의 직무유기가 보호된다. 그 결과로써, '시'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재상산을 위한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직 극소수의 시인들만이, 시를 세계를 미학적으로 개조하려는 적극적 담론행위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시의 진정한 정치적 성격을 간파한다. 그리고 시를 통해 대중에게 상징권력을 행사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문단권력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미당과 박남철, 두 대조적인 시인들의 일탈에 대한 문단의 무거운 침묵은, 바로 이 극소수의 시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 텍스트의 생산자들에게 텍스트와 삶과의 통합성을 요구하라는 주장에 대한 침묵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노선은 분명해졌다. 시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예인'을 강요하는 담론과 대중독자들의 압력을 수납해서는 안 된다. 시인이야말로, 리처드 로티가 잘 간파했듯이, 상상력의 힘으로 타자의 고통과 연대하고 새 시대의 전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계층인 것이다.


각주
김민웅 외 공저 [조선일보를 아십니까?](개마고원, 단행본 <인물과 사상> 10호 부록)
이와 관련된 글들은 고종석의 [두 권의 책에 대한 메모](<인물과 사상> 단행본 11호), 권성우의 [비판, 그리고 '성찰'의 현상학](<문예중앙> 99년 가을호), 이명원의 [김정란의 싸움은 아름다운 싸움이다](<반갑다 논장> 99년 7월호) 등이 있다. 
[애지] 1호 18쪽 이하 참조
 <문학과 사회>2000년 여름호
 권성우는 이 글에서 김현을 포함한 이른바 4·19세대 비평가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세대론적 인정투쟁'을 통해 전 세대의 문학을 폄하하고 자기 세대의 문학을 지나치게 우월적 지위로 끌어올린 혐의를 지적하고 있다.
권성우의 반론요청은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올랐으며, 역시 같은 장소에 오른 거절의 변은 황당하게도 권성우를 적시한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의 문지에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뒤이어 박남철 사건이 문지게시판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문학과지성사는 게시판을 폐쇄해버리는 조치로 대응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문지마당으로 바뀐 문지게시판을 검색해 보았지만 불행히도 권성우의 반론요청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황석영 [특별기고] 나는 동인문학상 후보작을 거부한다(한겨레 신문 7월 20일자)에서 촉발된 이 공방은 곧이어 <한겨레 21>이 표지 이야기로 ["문학인 모독 참을 수 없다"동인문학상 심사대상 거부한 황석영이 밤새워 털어놓은 속내]라는 타이틀 아래 이상수 기자와의 인터뷰를 실었고, 양귀자, 이문열, 정과리 등이 각기 조선일보 지면에 동인문학상을 옹호하고 황석영을 비난하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이와 연장선상에 있는 인터넷 문지 게시판의 공방에서, 정과리는 권오룡과 유사한 방식으로 김정란으로 간주되는 어떤 비평가가 사적인 이유에서 특정 에콜을 비방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가 네티즌들의 항의와 해명 요구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러나 정과리는 권오룡과 유사하게 더 이상 자신의 말로 인해 빚어진 논란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남호 [미당의 시를 옹호하며](정동칼럼, 경향신문 2000년 7월 9일자)
거듭 강조하거니와, 문인이 '비정치적'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의 체제와 기득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동조한다고 하는 또 다른 정치성에 불과하다. 이는 60년대 '순수--참여' 논쟁에서 이미 선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점이 대개의 시인들에게 의식화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아직도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을 떳떳이 하는 문인들이 있는 실정이다. 나는 바로 이렇게 전 시대의 논쟁의 성과가 다음 세대에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한국문학의 고질적 병폐라고 생각한다. 
그 한 예를 [21세기 고전에서 배운다--한국의 문인 183인이 권하는 인류의 위대한 저술들](하늘 연못, 2000)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책에서는 세계의 고전을 총망라한 추천작 가운데 미당의 시를 추천한 사람이 무려 4명이나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성곤의 여러 저술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김성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탈구조주의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문학 내부의 문제로 파악하고, 그 운동의 공과를 한국문학의 진로 타개를 위해 참조하려고 한 거의 유일한 비평가이다. 김성곤은 90년대초 미국내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포스트모던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으로 80년대 문학의 성과를 이어받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주장하였지만, 문학의 '비정치성'을 옹호하는 문단의 수구성에 막혀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자체가 발전적으로 승화되지 못한 채 주저않고 말았다.
노혜경, [시인의 타락은 말의 타락이다] 전문<부산일보>2000년 7월 12일

이러한 전략이 성공적이었는가라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박남철의 전략은 한국문학에 '고백'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학을 수립할 뻔했던 긍정적 시도이기는 했으나, '고백'의 토대가 되는 죄의식과 공동선에 대한 의지의 결핍/사적인 것과 개인성의 혼동 등등의 이유로 실패한 기획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는, 자기텍스트화란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써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내적 통일성의 원리에 따라 조직해내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시인의 문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소중했던 이 기획의 의미를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박남철의 시에서 표면적인 실험성만을 천착했던 비평가들의 문제가 맞물려 있다. 
[용의 모습으로] 같은 시집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이 시집에서 다른 사람의 시에 자기 이름을 달아 발표하는 무모한 행위를 했으며, 문단은 이러한 퍼포먼스에 대응할 비평적 경험이 없었으므로 이 시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적 방법으로 추인받기에 이르렀다. 박남철의 이러한 퍼포먼스는, 시인이란 텓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바깥에, 텍스트를 관통해서 존재한다는 시관을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제안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인 자신에 의해 뚜렷한 시적 전망이 제시되거나 문단적으로 논쟁이 진행되지 못함으로 해서 박남철표 해프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소위 '해체시'로 불리는 이러한 아방가르드 전략이 실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사람은 구모룡이었다. 실제로 황지우의 경우 80년대가 지나고 '해체'의 효용이 사라져 버리자 재빨리 '선'의 세계로 자리를 옮겨 앉을 수 있었던 것은, '해체' 전략이 당대의 정치적 억압에 대항하는 문학적 장치였다고 간주할 때 비로소 납득이 된다. 그러나 박남철의 경우 현실 정치의 거대 억압이 '해체'를 유발하였다기보다는 문학사적 야심/문단권력이라는 미시 억압에 대한 저항이 '해체'를 유발한 측면이 강하며, 따라서 새로운 주체의 확립으로까지 나아가지 안는 한 그의 아방가르드는 언제라도 '자해'에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구모룡, [억압된 타자들의 목소리]{현대시사상}1995 가을호 참조) 
'고백'이란, 적어도 세 가지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시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를 구분하지 않겠다는 의지, 둘째는 반성적 사유, 셋째는 적극적인 소통의지. 
장정임, [박남철, 시와 삶의 비극적 일치에 대하여]는 여성문화동인 살류쥬의 홈페이지의 [유명글 똥침놓기]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서영채의 글 [왜 문학인가:문학주의를 위한 변명](문학동네, 2000,여름호)을 참조하기 바란다. 서영채는 이 글에서 문학, 또는 문학적인 것을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응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그 묘사의 의도는 90년대 문학의 '탈승화'와 '탈정신화'를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탈승화'라고 하는 말이 본래 지닌 바 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고, 가벼움이 판치는 문학판의 현상을 긍정하기 위한 의도로 굴절되고 있다. 그는 김영하를 예로 들면서 "문학에 대한 저 가볍고 담담한 태도는 우리가 이미 그 변증법의 한 변곡점에 이르렀음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서영채가 속한 문학동네가 바로 김영하를 발굴하고 선택한 장본인들임을 감안하면 이 말은 아이러니이다. 그는 자신들의 담론행위가 창출한 가벼움의 문학은 대세라고 말함으로써 선택의 책임은 피하고 그 결과는 수용하는 기묘한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미당과 박남철에게 일어난 것과 거의 동일한 패턴이다. 

이 글에서 다루기에는 범위가 너무 방대해지지만, 바로 이 분할통치의 기반 위에서, 비판당하는 자들의 권력유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동인문학상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기이하게도 황석영을 제외한 어떤 작가도 심사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발상을 한 일이 없으며, 심사대상을 선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흡사 심사위원들의 고유한 권리라고 여기는 듯한 암묵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심사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구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자기 글로 인해 발생하는 담론에 대해 얼마나 무책임한가 하는 것은 각종 문학상 수상자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독자의 수준에서 뚜렷이 대조되는 두 개의 문학상을 동시적으로 수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명쾌히 자기 문학세계를 두고 해명한 경우는 드물다. 예컨대, 김수영 문학상과 김소월 문학상을 동시 수상한 황지우의 경우, 심사위원 중 어느 한쪽은 분명 오심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황지우 자신이 그 균열을 가장 못견뎌하지 않을까라는 내 의문은 아직도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이 한 예다. 다시 말해, 텍스트를 생산하는 자가 침묵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비평가들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 [오늘의 문예비평 200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