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전동균<거룩한 허기> 외 1편

미송 2013. 7. 28. 15:52

 

그림, 박항률

 

 

거룩한 허기

 

피네스테레, 세상의 끝에 닿은 순례자들은

바닷가 외진 절벽에 서서

그들이 신고 온 신발을 불태운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청둥오리 떼 날아가는 미촌 못 방죽에서

매캐한 연기에 눈을 붉히며

내가 쓴 시를 불태운다

 

*피네스파레(Finesterre) : 포루투갈의 지명. '산티아고의 길'의 끝으로, 로마인들은 이곳을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

 

 - 시집, [거룩한 허기](2008)에서

 

 

 

 

건기(乾燥)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깼다. 12시 42분. 벽을 두드리듯

딱 딱 딸깍 딱 딸깍...낡은 텔레비전 채널 돌리는 소리 같았다.

YTN 뉴스에서 프리미어리그 중계로, 패션쇼로, 다큐멘터리로, 하지만

어느 것도 볼만한 게 없다는 듯 끊임없이 채널을 바꾸는소리.

쯧쯧, 저이도 꽤나 외롭고 심심한 모양이군,

흐트러진 이불을 고쳐 덮고 몸을 웅크렸다.

 

또 소리가 들렸다. 3시 18분, 술판이라도 벌어졌는지

병 따는 소리, 잔을 부딪는 소리, 웃으며 수런대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는 낮은 신음소리... 그 틈을 비집고 딱 딱 딸깍 딸깍 딸...

텔레비전 채널 바꾸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영원한 밤의 터널에 갇혀 구조신호라도 보내듯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치지 않는 저 소리의 주인은,

식당에서 만난, 얼굴에 붉은 털이 많은 독일인일까. 허름한 스웨터를 입고

쓰레기를 버리러 오던 중국인 부부일까. 한참을 궁금해 하며

마른담배를 태우다가,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쳤다. 5시 02분.

문득, 바람의 냄새가 달라지는 건기에는 물가의 집을 허물고

사막으로 떠나간다는 아프리카의 들개가 떠올랐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 했다. 1005호에는

몇 해 전 중년 사내가 목을 맨 뒤부터.

 

- [시안, 2010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