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烏瞰圖) 시제1호 / 이상(李箱)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1
(오감도 시제1호)를 이해함에 있어서 전제해야 될 점은 이 시가 시대적으로는 '현대'를 공간적으로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표명적인 진술에서는 물론 그렇게 규정할 만한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 그러나 그 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이 작품이 현대 도시에 관한 이야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도로'나 골목'과 같은 표현이다. 만일 그 배경이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라면 '도로'나 '골목'과 같은 어휘 대신 아마도 '길'이나 '고샅길'과 같은 표현을 썼을 것이다. 우리 국어에는 일찍 '대로'와 같은 말은 자주 쓰였으나 '도로'는 '신작로'가 그렇듯이 근대에 들어 특히 도시의 길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로'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도시', '현대성' 같은 따위의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 골목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골 마을의 내면 길을 지칭할 경우 일반적으로 고샅길이라 하지만 도시의 그것은 '골목'이라 한다. 즉 '골목은 시골의 골목이 아니라 도시의 골목일 때 자연스럽다.
둘째 '질주하다'는 표현이다. '질주하다'는 말이나 소를 묘사할 때보다는 자동차나 기차를 묘사할 때 보다 적절한 어휘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말이나 소 혹은 사람과 같은 생물은 '달린다' 하고 '기차'나 '자동차'나 '오토바이'와 같은 무생물 혹은 기계는 '질주한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이 '질주한다'는 어휘에는 도시성, 문명성, 현대성, 물질성과 같은 의미소들이 함축되어 있다.
셋째 이시에서 보여주는 익명성이다. 이 시에는 13명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어떤 아이도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는 이들이 개성이 없고 자아가 해체된 존재들임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왜냐라면 자아가 뚜렷하고 독자적 개성을 가진 존재는 타자와의 구별을 위해서 자신만의 이름 즉 고유명사의 이름을 고집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 명사로 표현된 이 시의 아이들은 주체의 정체성이 없고 단지 숫자적 개념만을 지닌 다중多衆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사회가 양산한 물화된 소비 대중, 보이지 않는 자본의 거대한 손에 의해 길러지는 익명의 소시민군이다. 말하자면 현대 도시 산업사회의 물화된 인간들의 상징인 것이다.
넷째 숫자의 의도적인 사용이다. 이 시에는 거의 모든 시행에 숫자가 등장한다. 단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진술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예컨대 시의 의도가 가장 전략적으로 구현된 제목(시제1호)이 그렇고 매 진술에서 행동 혹은 서술의 주체가 되는 주어가 그렇다. 모든 문장의 주어가 예외 없이 '제 1의 아해', '제2의 아해.....와 같이 숫자로 호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숫자는 가장 추상적이고, 논리적이고, 지시적이라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며 과학적이다. 그리고 과학이란 모든 개념적인 것, 의미적인 것을 숫자화시킨다. 숫자의 논리 즉 수학이 과학의 본질을 이루며 과학이 현대 물질문명의 토대가 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 역시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고유명사로서의 존재는 사라지고 주민등록번호나, 사회보장번호, 연금번호, 카드번호가 대신한다. 주거지의 위치, 교통수단, 직장에서의 직무 등도 모두 숫자화되어 컴퓨터에 입력된다. 그러므로 현대는 그 특징을 이루는 물질문명이나 도시 산업화가 그렇듯이 모든 것이 숫자화되고 숫자의 기호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다섯째 <오감도>라는 제목이다. 보통명사에 '오감도' 라는 말은 없으므로 이상이 조감도라는 단어를 변형시켜 만든 조어임을 알 수 있다. 조감도(鳥瞰圖)란 영어의 'bird's eye view'를 번역한 것으로 '높은 곳에서 비스듬하게 내려다 본 것처럼 그린 풍경화나 지도', 즉 새처럼 높은 공중에서 지상을 바라본 풍경화나 지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은 여기서 '새' 대신 보다 구체적 이미지를 갖는 '까마귀'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오감도'란 까마귀가 높은 공중에서 지상을 바라본 풍경이나 지도가 되겠다.
물론 전근대사회에서도 조감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에 친숙해진 것은 아무래도 근대에 들어서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해양술의 발전 지도의 제작의 보편화, 비행기의 발명, 기계의 도면 설계, 건축 및 도시 개발의 확산 등에 크게 힘입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감도' 라는 시의 제목 역시 강하게 현대성 및 도시성이라는 의미의 뉘앙스를 지닌 단어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감도>가 지닌 몇 가지 측면을 고찰하여 이 작품이 현대 도시의 삶에 대하여 쓰여진 것임을 밝혔는데 결과적으로 상식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해버린 셈이 되었다. 그것은 이상이 추구한 모더니즘 혹은 아방가르드가 바로 현대 도시문명을 반영한 문학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오감도>가 전근대적인 감성과 전원 혹은 자연 취향에서 쓰여진 것이라면 이상은 모더니스트가 아니라는 말이 되어버릴 것이다.
2
이 시는 하나의 괴이한 풍경을 묘사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공중 높이 까마귀의 눈을 통해서 본 어떤 도시의 한 모습이다. 아니 모습이라기보다는 요지경이다. 그것을 단순한 풍경이나 광경이라 하지 않고 '요지경'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보여주는 바가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고 비정상적, 괴기적인 까닭이다.
13명의 아이들이 도시의 골목길을 달려가고 있다. 달려가면서 그 중 한 아이가 무언가 무섭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말을 들은 다른 아이들 역시 차례차례로 같은 심정을 토로한다. 그러므로 모르는 관계로 만난 이 13명의 아이들은 모두 무엇인가 무서움의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서로간 확인된 셈이다. 아이들은 그 무서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자신들의 집단 즉 13명의 어린 아이들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중 누가 그러한 아이인지는 모르고 있는 까닭이다. ('13인의 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3연 4행).
따라서 이 4연까지의 시적 진술로 보면 그 무서워하는 아이는 13명 모두이지만 무서운 아이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떻든 서로 무서워하며 불신하는 이 13명의 아이들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 헤어지지도 않고 또 헤어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불신과 무서움의 관계를 맺으면서도 집단의 공동체는 여전히 유지되며 맹목적이건 혹은 자의적 선택이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혹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달리 말해 골목길을 질주하는 일은 중단 없이 이루어진다.
여기에 화자의 마지막 논평이 부가된다. 처음엔 이 13명의 아이들이 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야 좋을 것이라고 말했던 화자가 끝에 가서는 반대로 길은 뚫려 있어도 좋고 나아가 그들이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끝 진술은 시의 전체 내용을 정면으로 뒤집어 엎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바 13명의 진지한 행동(골목길의 질주)과 언어(무서움의 고백)를 희화화시킨--즉 13명이 한 집단을 이루는 공동체의 외부로 드러난 특징을 전면적으로 부정 혹은 무화시키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간과해선 안될 사실이 하나 있다. 화자가 이처럼 첫 부분에서 피력했던 견해를 뒷부분에서 번복하게 되는 데에는 이 공동체에 대한 어떤 사실의 발견이 동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13명의 어린 아이들이 모두 무서움을 느끼고 있으며 그 무서움의 대상 역시 그들 집단 안에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이 시가 그려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현대 도시인의 삶이다. 그러한 해석은 우리가 이미 1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다. 그런데 화자에게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현대인의 삶은 어떤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에 대한 막연한 느낌이었고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아직은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까닭에 화자는 이 느낌을 시의 서두에서 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13명의 아이들이라는 비유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절박한 상황으로 내 몰린 삶은 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13명의 아이들의 상황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현대인들은 각자가 서로 무서워하며 서로 무서움의 상대가 되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산업사회의 소외되고 물화된 삶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후술될 터이다. 어떻든 이와같은 집단의 본질을 명확하게 규정하자 이제 화자는 현대인의 삶을 고발하는데 전처럼 굳이 그것을 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13명의 아이들의 상황으로 비유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3연의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라는 직설적 언급만으로도 충분하고, 나아가 그 집단의 본질 자체가 상호 불신과 무서움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들이 놓여진 상황이란 뚫린 골목이든 막힌 골목이든 혹은 질주를 하든 않든 근본적으로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의 끝에서 시인은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라 하여 거두와는 상반되는 진술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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