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집>의 배경이 된 북방 변경은 전통적으로 우리의 역사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지역이다. 거기다가 이곳의 주민들은 설상가상으로 항상 오랑캐의 침입에 직면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이와같은 상황속에서으 삶이 궁핍과 가난의 점철이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될 수 있는 일이다(이집에서 대대로 살았다는 백성들은/대대손손에 물려 줄/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과 신뢰에 토대한 공영체를 확립하였고 또 이를 유지해 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공영체 안에는 적어도 외적인 세력--이방 오랑캐나 중앙에서 파견된 지배계급에 대항해서 오랫동안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온 삶의 순수성과 파견된 지배계급에 대항해서 오랫동안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온 삶의 순수성과 집단의 정체성이 확고했고 그 가난 역시 생존의 문제가 될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물질적 생활에서는 궁핍을 면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공영체 안에서만큼은 사랑과 신뢰에 토대해서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인간다운 삶은 물질적 풍요에만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산을 마음놓고 뛰여다니던 시절' (제 3연)로, 살구꽃 활짝 피어 꿀벌 날아들던 시절로 묘사하고 ㅣㅇㅆ다. 이는 이 공영체의 사람들이 지닌 삶의 순수성과, 행복을 비유적으로 암시해주는 것들이다. 동물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함께 생활을 공유한다는 것은 약육강식 이전의 원시적 평화--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말하자면 원죄를 짓기 이전의 에덴과 같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요 '살구꽃 활짝 핀' 동네란 우리 가곡의 가사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와 '무릉도원'이라는 말에서 보듯 삶의 이상향을 뜻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공영체의 행복과 안녕은 사라지고 삶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시의 본문에서 찾아 본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극한에 다다른 물질적 궁핍이고 둘째가 여러 형태의 상실이다. 셋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이다. 넷째, 공동체의 유대가 붕괴되어 파편화로 치닫는 삶이다. 시대의 폭력은 사랑과 신뢰 위에서 평안을 구가하던 공동체를 붕괴시켜 각자 개인적 생존에 탐닉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한 마디로 중심에서 이탈되어 주변주에서 부유하는 뿌리 뽑힌 자들의 삶이라 할 것이다. 다섯째, 착취하는 노동력이다. 압제자는 이 공영체를 지배하면서 수 많은 경제적 수탈을 자행한다. 우리는 이를 이미 첫째 항에서 살펴본 바 있으나 노동력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낡은 집>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오히여 불행과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시대의 아이러니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시대의 폭력---압제자의 수탈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낡은 집'은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시에서 묘사된 것들은 모두 일제의 폭력아래 짓밟힌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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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언급한 내용은 제 3자적 시점의 서술체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통적인 서정시와는 거리가 멀다. 원칙적으로 시는 일인칭 자기 고백체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내용은 '시'라는 그릇보다는 '수필'이나 '콩트' 혹은 '단편소설' 등과 같은 그릇에 보다 잘 담겨질 것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실제로 이 작품은 현실과 시대에 관한 통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차원에서는 그렇게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낡은 집>의 시적 형상화는 '집'이 지닌 상징적 의미와 그 이항 대립적인 구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는 집'과 '버려진 집'의 대비이다. 화자는 이 빈집을 매개로 해서 이 집에 살았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의 '집'이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인간' 더 나아가 '국가'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원형적 상상력에 있어서 집은 인간 혹은 인간의 삶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집의 외부는 인간의 외적인 모습이나 인격을 나타내며 집의 구조는 인간의 내면 그 자체와 같다고 한다. 가령 창문은 눈에 해당하며 지하실은 잠재의식이나 본능에, 상층은 머리나 정신에 동일시되는 것 등이다.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가령 '아들은 집안의 기둥'이라든가 '잘 될 집안은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도 집과 인간을 동의어로 여기는 발상이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에 그치치 않고 집은 국가를 상징하는 표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특별히 국가를 유기체로 보는 헤겔류의 민족주의적 국가관에서 그렇다.
이 작품에서는 이렇게 하나의 인간이나 혹은 국가로 비유될 수 있는 집이 버려져서 정원의 나무들은 시들고 봄이 되어도 꿀 한마리 날아들지 않은 흉가로 제시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생산이 불가능한 황폐한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엘리엇이 노래한 '황무지' 혹은 웨스턴이 그의 '의식에서 로멘스로' 에서 언급한 불모 혹은 불임의 땅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웨스턴의 그의 저서에서 기독교의 성배 전설에 토대한 풍요제의를 연구했는데 그 주된 내용은 통치자 어부왕이 노쇠하여 황폐해진 나라와 이를 구원코자 모험을 떠나는 한 기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용감한 기사는 이 나라의 한발과 초목의 불임이 어부황의 노쇠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알고 왕의 회춘을 위하여 모험을 길을 떠난다. 그리고 온갖 고난 끝에 위험당에 도달하여 거기에 모셔 있는 창(남성 상징)과 성배(여성 사징)를 만나고 돌아와 나라를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삶의 성쇠와 생산의 임, 불임이 성스러움의 체험 즉 엘리아데의 용어로 말하자면 성현체험과 관련이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기사와 성배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어부왕의 나라는 성스러움을 상실했을 때 초목들이 시들어 불모의 땅이 되었으나 그것을 회복했을 때 초목들은 열매를 맺고 생산은 풍요를 거두었다. <낡은 집>의 경우도 바로 그 성스러움을 잃어버려서 불모의 땅이 되어버린 어부왕의 국토에 비유되지 않을까 한다. 3장에서 지적했듯이 살구나무꽃이 탐스럽게 피고 꿀벌이 잉잉거리며 날아드는 곳, 노루, 멧돼지, 쪽제비와 같은 약한 동물들이 인간과 친구가 되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삶의 순수성과 생명의 원시적 평안이 보장된, 즉 '복사꽃(살구꽃)으로 대변되는 '무릉도원'혹은 동물(뱀)과의 평화로 상징되는 에덴 동산과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이상향이 주인이었던 털보네 사족이 유랑의 길을 떠나 버리자 황폐한 불모의 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낡은 집>의 표층적인 내용은 해체되어 버린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지만 심층적으로는 국가를 잃어버린 민족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성스러움을 상실할 때 황폐한 불모의 땅,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동물적 삶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민족의 비극적 진실을 깨우쳐 주는 작품인 것이다. <낡은 집>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부연할 것이 있다면 이 작품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의 연관성이다. <낡은 집>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 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는 결말 부분은 나라를 빼앗기니 제 철이 되어도 봄이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어 분명 이상화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그 모티브에서 동일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같은 의미의 동일성을 이 용악이 그의 선배시인의 시를 의도적으로 차용 혹은 모방함므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어떤 작품도 그가 속해 있는 문화적 콘텍스트나 선배 시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오늘날 해체주의자들의 입장은 여기서 충분히 참고 삼을 만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낡은 집>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부터 무엇을 차용 혹은 모방했는가를 밝히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이를 어떻게 수용 혹은 수정하였는가의 과정을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하나의 문학작품이란 다른 텍스트를 수정하는 데서 쓰여진다고 주장한 블룸은 한 시인이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단계를 오독, 변용, 차용, 형상화, 반추, 극복 등 여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는데 이용악은 물론 <낡은 집>의 한 부분에 국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오독의 단계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오지 않느다'로, 변용의 단계에서 자연적인 것의 소재를 인간적인 것의 소재로, 차용의 단계에서 일반적인 봄의 상실을 살구나무꽃의 불임과 꿀벌 및 동물들의 이미지 반입으로, 형상화이 단계에서 고통의 내면적인 독백을 식민지인의 현실적인 삶으로, 반추의 단계에서 '들'을 '집'으로 은유화시켜 이를 한 가족의 유이민이라는 이야기로 '극복'하고 '수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상호텍스트성---엄밀히 말하자면 곁텍스트성과 관련하여 보다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명제이므로 여기서는 후일의 논의로 남겨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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