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두가지 상황 - 즉, 현대인의 삶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와 인식했을 때 각각 보여준 화자의 상반된 진술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첫째는 현상에 대한 인지와 본질의 발견을 각각 언급한 것이다. 시의 첫연은 화자가 현대인의 삶의 본질을 모르고 단지 드러난 현상 즉 '어떤 절박한 상황으로의 내몰린 삶'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비유란 물론 '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13인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직설적인 어법으로 3연에서 이미 언급했던 까닭에 그것을 다시 뒤에서 굳이 비유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연의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는 이 자체가 비유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첫연에서 제시한 비유(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를 풀어주는 언술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현대인의 삶이 상호 무서워하거나 무서움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제 다음 차례로 '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13인의 아이들'이라는 첫행의 비유를 살펴볼 차례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길'과' 아이들'이 갖는 상징성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은 '진리' 혹은 '이치'나 '도리' 등의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우리들의 일상 어법에서 '길이 열린다' '살 길이 있다' 는 말은 해결의 방도가 생겼다는 뜻이며 '대도무문'(大道無門 예; 진정한 문학의 길을 찾으면 달리 문학의 길을 찾지 않아도 된다)이라든가, '길이 아니거든 가지를 마라' 와 같은 올바른 행위의 규범을 지키라는 뜻이다.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유교나 불교, 노장 사상에서도 '도'는 세상 만물의 이치 혹은 보편적인 진리를 가리킨다. 도학, 불도, 도교와 같은 표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도'는 옛부터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이 '난랑비 서(鸞郞碑 序)' 에서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을 풍류도 즉 화랑도라 한다' 고 말했던 것 등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전 문학에서도 '길을 쓸 별을 바라보고/ 혜성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혜성가>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온 길/쑥구렁에 잘 밤은 있으리'<모죽지랑가> '생사로는 예 있으매 저히히고 ', '아으 미타찰에 맛보올 내 도 닦아 기다리고다' <제망매가> 와 같은 시행은 두루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아이'는 기본적으로 세가지의 상징성을 지닌다. 하나는 생명력이다. 아이는 앞으로 성인이 될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농축된 생명력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설화들 가운데 동방박사 이야기나 젊어지는 샘물의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순수성이다. 어린 아이는 인위에 물들지 않고 따라서 죄 짓지 않은 원시 상태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에서 가장 순결한 영혼의 상징은 모두 아이들이다. 아이가 지닌 상징성은 생명성이나 순수성 그리고 미래성 등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 시의 첫연으로 보자면 아이들은 거의 맹목적이다 싶게 어떤 곳을 향하여 맹렬히 달려가고 있고 그 길은 막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는 곧 삶의 생명성, 순수성, 미래성이 거부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처해진 삶은 절망적인 것이고 또 절망적인 까닭에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실 시인이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으로 묘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떤 특정한 어린 아이의 집단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우리들 현대인들의 삶 그 자체이다. '어린 아이'나 '길'은 단지 시적 상황에서 제시된 비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1연에서 보여주는 것은 현대인이 처한 절망적 상황과 그것에서 연유된 무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삶의 이 비극성 혹은 불길한 상황을 보다 시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몇 개의 부차적인 이미저리를 동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하나가 13이라는 숫자이며 다른 하나가 시의 제목으로 차용된 까마귀의 이미저리이다. 어떤 논자는 이 시의 숫자 13을 예수 최후의 만찬 참석자 13명과 관련시키고자 했으나 필자로서는 이같은 해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4'라는 숫자를 싫어하듯 유럽인들은 대개 '13'이라는 숫자를 기피한다. 대부분이 기독교인 유럽인들은 13이라는 숫자에서 예수 최후의 만찬 참석자 13명을 유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오감도' 즉 '높이 까마귀의 눈으로 본 세계'로 정했던 것은 그가 진단한 현대의 상황이 지금까지 살펴 본 바 13이라는 숫자와 더불어 까마귀의 상징적 의미 그대로 불길하고 비극적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주는 것이다.
이 시에서 13명으로 구성된 아이들의 집단은 각자가 모두 무서운 아이들이면서 또한 각자가 모두 무서워하는 아이들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각자 무서운 아이들이지만 개개인들은 누가 무서운 아이인지, 가령 한명이 무서운 아이인지, 혹은 소수나 다수가 무서운 아이들인지 모른다. 즉 모두가 무서운 아이라는 것은 화자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며 13명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그룹 안에 무서운 아이가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을 뿐 누가 무서운 아이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른다. 그러므로 이 때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엄밀히 말해서 '무서움' 이라기 보다는 '불안' 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서움 즉 공포는 대상이 분명한데서 야기되는 감정이지만 불안은 대상을 알 수 없는데서 야기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두가지 특성이 드러난다. 첫째 13명은 상호간 서로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요. 둘째 서로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단절'이란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소외되어 있다는 뜻으로, 서로 모르고 있다는 것은 공동체에의 참여 없이 각자가 자폐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추상적 숫자나 기호로 지시되는 존재는 마치 기계나 물건 같다. 그러므로 이 시의 '막힌 골목길을 질주하는 13명의 어린 아이들은 첫째 소외되고, 둘째 자폐되고, 셋째 물화된 현대인의 상징' 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이처럼 이들을 현대 도시 산업사회의 인간형으로 규정하는 것은 1장에서 살펴본 결과에 근거한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무서움은 그 처해진 절망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13명의 어린이로 상징된 현대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 자신이 무서운 존재이자 또 무서워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삶을 소외시키고, 자폐시키고, 물화시키는 원인이 사실은 외부나 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의 내부에게도 있는 까닭이다. 시인은 현대인이 영위하고 있는 이와같은 역설적 삶을 시에서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느 일부가 가해자이고 다른 일부가 피해자가 아니라 그 모두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면 현대인은 또한 그 자신 공동죄의 범법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인이 소외되고 자폐되고 물화된 원인을 그들 스스로가 범한 공동죄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불안 원형적인 불안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즉 원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죄를 범함으로 해서 아담과 이브는 순결을 상실하게 되고 더불어 불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죄의 결과 바꿔 말하면 단독자에 있어서 원죄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불안이며 이 불안은 아담의 그것과 다만 양적으로 다를 뿐이다.
불안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게 된다. 하나는 그 불안 안에서 개인이 질적인 비약에 의하여 죄를 정립하는 불안이며 또 다른 하나는 죄와 함께 들어온 바 있고 또 들어오고 있는 불안이다. 이 불안은 그러한 한에 있어서는 개인이 죄를 정립할 때마다 양적으로 이 세상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죄의 현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현실성으로 다만 불안만이 있을 뿐이고 죄의 연속성이란 인간을 불안 속에 떨어뜨리는 가능성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기독교)구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시제1호>에서 언급된 무서움 혹은 불안은 의식적이건 혹은 무의식적이건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어쩔 수 없이 범하게되는 구조적인 죄 즉 공동죄의 결과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동죄란 한마디로 자신을 포함하여 삶의 공영체를 구성하는 모두를 소외시키고, 자폐시키고 또 물화시킨다. 시인은 이와같은 공동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산업화 시대의 물화된 삶을 <시제1호>를 통해 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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