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이인주 시인의 <반칠환 '무'> 시평

미송 2013. 12. 15. 20:16

 

 

/ 반칠환

 

이렇게 속없는 놈도 사는구나

, ,

깍둑썰기를 해도

날 상하게 할 뼈가 없다

, ,

채썰기를 해도

손 물들일 피 한 점 없다

칼로 무 베다 보면 속 부끄럽다

이렇게 속 깊은 놈이 사는구나

난도질하고 남은 목

던져놓으면 수채 속일망정

파랗게 웃으며 되살아난다

숙취를 지우는 무국을 뜨며

속없이 속 깊는 법을 생각한다

 

월간 문학사상201312월호 발표

 

 

 

침묵과 사랑이 깊이 어린 삶의 홍심의 시간

 

과녁의 한가운데를 홍심이라 한다. 홍심을 여지없이 관통시키는 사람을 명궁이라 한다. 나는 한때 명궁을 꿈꾼 적 있다. 백발백중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내게 주어진 삶의 과녁을 통쾌하게 뚫고 싶었다. 화살인 내가 삶의 홍심에 정곡으로 꽂힌다는 것, 그것은 한계라는 벽을 온몸으로 뚫는 일이었다. 당연히 나는 패기 있게 산다는 것과 현명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오래 고심해 보았다. 그 두 가지 방법 사이의 간극과 교차와 비낌과 합일에 대해, 그리고 각고와 분투와 패배와 승리에 대해서도. 어두운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것처럼 시위를 겨누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머리로 얻을 수 있는 답은 가슴이 허락지 않았으며, 가슴이 시키는 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출혈이 심한 것이었다. 그래도 꿈꾸지 않는 날들은 사막의 버섯돌 같은 침식의 시간이었다. 나는 나를 모래바람에 갈아 칼이 되든 폐허가 되든 해야 했다.

 

그런 궁구의 시간을 몸에 연흔처럼 새긴 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내 몸에 스며드는 시들이 있었다. 없는 듯 있는 무늬를 입은 시들은 몸으로 걸러낸 삶의 진액을 함부로 흘리지 않았으며, 어떤 발성도 발설조차도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자아내었다. 그들은 무겁지 않은 침묵과 가볍지 않은 말들 사이에 띄워진 술잔으로 흥을 돋울 줄 알았다. 기예와 경륜 사이 간들간들 줄을 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춤추고 있었다. 부어도 붓지 않아도, 마셔도 마시지 않아도 그대로인 술잔, 침묵이 어리고 말이 어리고 사랑이 어린 깊이에 삶의 홍심을 비추고 있었다.

 

매력적인 시의 고수를 만나는 날이면 아니, 그 검법에 가차없이 베이는 날이면 나는 즐겁게 피를 흘렸다. 옆구리를 움켜쥐며 포복하며 !...’하는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속 깊은 놈이 속없는 나를 찌르는구나, 이렇게 속없는 놈이 속 깊이 나를 찌르는구나. 단칼에 베인 내가 외려 속 부끄러워지는, 이런 시를 쓰시는 분도 있구나. 깍둑썰기를 해도 채썰기를 해도 다치지 않는 무가 있다니. 오히려 칼을 들이대는 나의 이빨이 상할까봐 뼈도 버리고, 벤 자국이 남을까봐 피도 버린 살신성인이 있다니. ‘날 상하게 할 뼈가 없으므로, ‘손에 물들일 피 한 점 없으므로 기실 썰고 있는 내가 깊이 썰리는 한 수를 체감한다. ‘이렇게 속없는 놈도 사는구나이렇게 속 깊은 놈이 사는구나로 역전되는 순간이다. ‘난도질하고 남은 목마저 던져놓으면 수채 속일망정/ 파랗게 웃으며 되살아나는고수의 천연생기를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칼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자리엔 같은 무가 남아 웃고 있었다.

 

가장 높은 산에 오른 자는 비웃는 자를 웃는다란 한 철학자의 단상이 떠오른다. ‘이렇게 속없는 놈도 사는구나라고 세인들이 난도질할 때 조금의 굴욕감도 없이, 도도한 시선을 내려 깔지도 않고 그저 담백하고 느긋하게 상대를 받아 안는 맨살의 온기가 느껴진다. 기어이 이기려하지 않아도 훼손되지 않는 원형을 지닌, 그런 것들의 조용한 웃음. 삶의 과녁을, 홍심을 관통한다는 것은 내 살이 썰리더라도 뼈를 세우지 않는 염결과 관용이 있어야 하며, 손을 잡더라도 물들이지 않는 성찰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삶이 화려한 자는 더욱 화려해지고, 고단한 자는 더욱 고단해지는 신자유주의 시장의 한 모서리에서 하루의 피로를 몸에다 쟁인 채 예민한 각을 세우는 수많은 들을 생각한다. 저자의 말처럼 무밥에 무국에 생채에 장아찌에 시래기무침에 생무까지 우걱우걱 씹으며 한 시대를 넘어온 우리는 무를 온몸으로 체화한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경지의 무. 누구도 거스르지 않으며 물처럼 흘러가는 삶의 푸른 내공을 수채 속에서도 펼 수 있는 역설을 뼈나 피가 없다고 매도할 것인가. 돌아보면 발에 채는 무더미 같은 사람들 속에 거룩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 살아도 살아도 인 생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나를 거듭 술 마시게 하지만 다음날 숙취를 지우는 무국으로 내 속에 들어와 진정 나를 살리는 녀석이 있다. ‘속없이 속 깊는 법의 심지를 천연스레 내리는. <이인주>

 

 

 

이인주 시인 - 경북 칠곡에서 출생. 경북대 화학과 대학원 졸업. 2006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2002년 '수주문학상', 2003'신라문학대상', 2008년 '평리문학대상', 2010년 '목포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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