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 그때도 그랬지 / 오정자
아지랑이가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올랐을 때
사윈 햇살들이 풀무치들을 밟고 있었을 때
사뭇 그런 예감이 있었다
무구한 시간들이 주춤대는 것을 보았을 때
에푸수수한 머리칼로 나대고 싶었을 때
나침반을 버리고 길 잃으려 했을 때
희망조차 결별을 속삭였을 때
잠든 너의 아름다움을 묻지 않았다
베돌던 바람의 뒤통수를 보았을 때
개펄의 해산물 같은 약속을 남겼을 때
시린 잎사귀들을 보았을 때
떠나는 것들아 낯붉히지 말라 했었다
멈추지 말고 총총 흩어지라고
소멸의 강줄기로 사라지라고
벗겨진 어둠을 맛보리라고
상사(想思)에 죽어갈 나무가 될지라도
권태로운 빛의 알갱이들 한 계단씩 이동하고 나면
시골 정류장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어둠 속에 어둠 속에
보석들의 광채를 길이 담아 둔
밤과 같은 당신에게
과거시재(過去時在)의 그 어느 때를 빌어 엮어가는, 가을 바람의 의미망(意味網). 그 의미망이 '당신'으로 표상(表象)되는, 존재와의 '꿈꾸는 재회(再會)'로 모아지는 모습이 차분해서 좋다. 대체로 이미지(Image)의 연상술(聯想術)은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詩 끝에 남겨지는 여운이 깊다. 詩를 감상하니 나 역시, 어느 시골 정류장 같은 곳에서 그렇게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그 대상(對象)이 가을 같은 사람이라면, 더 할 나위 없겠으나. 지금의 현실에서 그럴 일은 전혀 무망(無望)하지만 말이다. 비록 지금의 나는 누더기 같은 삶이지만, 詩에서 말해지듯 권태로운 빛의 알갱이들 한 계단씩 이동시키고 나서 내 生의 그 언젠가 잠시나마 있었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 속의 고운 추억을 그렇게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나를 기다리는, 가을 바람 속에서. <안희선>
'보석들의 광채를 길이 담아 둔 밤과 같은 당신에게' 이 구절은 아마 김현승 시인의 싯구일 거다.
8년 전 뭘 몰라 천방지축일 때, 싯구 하나에서도 영감을 얻었고, 얻으면 산문체로 늘여 쓰곤 했다.
긴 글이 잔소리처럼 들리면 시랍시며 줄여 쓰기도 했다. 웃기는 짬뽕 시절의 가을 이야기...
폼생폼사를 떨었던 시절, 그때도 그랬으니 올해도 그럴까 하면 부끄러운 일이겠지, 부끄럽지 않은 건
변함없는 가을일 뿐이겠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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