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 김중일
나는 그것을 흔히 천사라고 부르는데, 간혹 천사는 비를 타고 오기도 했다. 흥분한 비가 흥건히 우리를 적시면 기립한 우리는 모두 이곳의 발기다. 비틀거리는 산천초목은 지구의 적록색 구토다. 거대한 토사물 속에 천사는 산다. 천사는 '나' 라는 나락의 가장 말단인 손톱을 붙들고, 메아리 같은 몸으로 매달려 있었다. 내 꿈을 덮는 홑이불처럼 말이다. 우리의 이런 관계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막 태어났을 때 내 손끝에는, 미완성의 잠언 끝에 박힌 작고 단호한 문장부호처럼 손톱이 찍혀 있었다. 내 손톱은 나를 붙잡고 있던 천사가 끝내 손을 놓아야 했던 마지막 순간 꾹 힘줘 눌렀던 자국이었다. 그날 이후 내 열개의 손톱은 밤이면 밤마다 나로부터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별들의 그림자가 일력처럼 뜯겨나간 흔적. 나는 해변 위에 그 신성한 손끝으로 이 글을 읽는 무고한 당신에게 저주의 문장을 쓰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지우지 않고 돌아왔다. 나의 두 손이여, 청색 파도가 밀려오는 열개의 붉은 해변을 돌며 녹색 안개의 이빨에 물어뜯긴 내 손톱이여, 오늘의 혼(魂)들이 읽고 있던 한 장의 나를 어제로 넘기는 갈피여. 하루 한 페이지 두께로 손톱은 하얗게 조금씩 부풀었고. 잘라도 잘라도 내 손끝에는 열개의 말줄임표가 돋아났다.
ㅡ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작과 비평,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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