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명인 <문장들> 外 2편

미송 2013. 10. 7. 09:54

     

     

     

     

    장들

     

    1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


    2
    가을 바다에서 문장 한 줄 건져 돌아가겠다는
    사내의 비원悲願 후일담으로 들은들
    누구에게 무슨 감동이랴, 옆 의자에
    작은 손가방 하나 내려놓고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 바다는
    몇 만 평 목장인데 그 풀밭 위로
    구름 양 떼, 섬과 섬들을 이어 놓고
    수평선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포구 가득 반짝이며 밀려오는 은파들!
    오만 가지 생각을 흩어 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삼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구하러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 온 관주貫珠 꿰어 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3
    윤곽이 트이는 쪽만 시야라 할까, 비낀 섬 뿌리로
    어느새 한두 등 켜 드는 불빛,
    방파제 안쪽 해안 등의 흐릿한 파도 기슭에서
    물고기 뛴다, 첨벙거리는 소리의 느낌표들!
    순간이 어탁魚拓 되다, , 맥을 푼다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상 하나가
    싱싱한 배태胚胎로 생기가 넘치더니 이내 삭아버린다
    쓰지 않는 문장으로 충만하던 시절 내게도 있었다
    볼만했던 섬들보다 둘러보지 못한 섬
    더 아름다워도
    불러 세울 수 없는 구름 하늘 밖으로 흐르던 것을,
    두 개의 눈으로 일만 파문 응시하지만
    문장은 그 모든 주름을 겹친 단 일 획이라고,
    한 줄에 걸려 끝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수평선이
    밤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4
    시원始原에 대한 확신으로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절에나 있다
    시야 저쪽 아련한 미답未踏들이
    문득 구걸로 떠돌므로 미지와 만난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리라
    타고 넘은 물이랑보다 다가오는 파도가 더 생생한 것,
    그러나 길어 올린 하루를 걸쳐 놓기 위해
    바다는 쓰고 지운다, 요동치는 너울이고 고쳐 적지만
    부풀거나 꺼져 들어도 언제나 그 수평선이다

    5
    일생 동안 애인의 발자국을 그러모았으나
    소매 한 번 움켜잡지 못해 울며 주저앉았다는 사내,
    그의 눈물로 문장 바다가 수위를 높였겠는가
    끝내 열지 못한 문 앞에서 통곡한
    사내에게도 맹목은, 한때의 동냥 그릇이었을까?
    문장은, 막막한 가슴들이 받아안지만
    때로 저를 지운 심금 위에 얹힌다
    늙지 않는 그리움을 안고 산다면
    언젠가는 수태를 고지받는 아침이 올까?

    6
    어둠 속에 페리가 닿고 막배로 건너온
    자동차 몇 대, 헤드라이트를 켜자 번지는 불빛 속으로
    승객들이 흩어진다, 언제 내렸는지
    허름한 잠바에 밀짚모자, 헝겊 배낭을 맨 사내 하나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다
    , 문장을 구해 서역에서 돌아오는 법사가 아닐까
    그가 바로 문장이라면?
    허전한 골목은 닫혔다, 바다 저쪽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헤맨다 한들
    아득한 섬 찾아내기나 할까?
    일생 처녀인 문장 하나 들쳐 업으려고
    한 사내의 볼품없는 그물은 펼쳐지겠지만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그물코들!
    나는 이제 사라진 것들의 행방에 대해 묻지 않는다
    원래 없었으므로 하고많은 문장들,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단 하나의 문장!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 둔 그리움 다시 내린다
    수많은 아침들이 피워 올린 그날 치의 신기루가 가라앉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새까만 염소 떼를 몰고 찾아든다
    그 염소들, 별들 뜯어 먹여 기르지만
    애초부터 나는 목동좌에 오를 수 없는 사내였다!
     
    계간 세계의 문학2010년 여름호 발표 
     
     

     

     김명인 시인
    1946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 1973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동두천(東豆川)(문학과 지성사, 1979), 머나먼 곳 스와니(문학과지성사, 1995), 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문학과지성사, 1994), 바닷가의 장례(문학과지성사, 1997), 길의 침묵(문학과지성사, 1999), 바다의 아코디언(문학과지성사, 2002), 파문(문학과지성사, 2005) 등이 있음. 1992년 제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1992년 제3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2000년 제45회 현대문학상 수상. 2001년 제13회 이산문학상 수상.

     

     

    비밀
     
    나를 기다리는 우연 하나
    이미 지나쳤으니
    네가 와서 들추면 지워진 자취,

    그게 비밀이라고요?

    그렇다면, 들쭉 그늘 색칠하다 환한 잠드는 바람
    해바라기 검은 씨앗 속 햇살

    구름 눈꺼풀이 덮고 지나는 날 빛 푸름

    물곬의 섶 뒤지다 심심해지는 밀물

    어스름 수평 아래로 막 잠기는 일몰의 행방
    들고 나는 이의 신음 소리 쓰다 지우는 시 

     

    비밀은,
    가슴에 들켜야 쟁쟁한 비밀이니
     
    감추다 몰래 꺼내놓다
    다시 망설이는
    그 사소한 흔적들 모두

    내 비밀이라니!
     
     바다의 아코디언중에서

     

     

    새벽까지
     
    한 장씩 더듬으며 너를 떠올리는 것은
    내가 이 풍경을 대충 읽어버린 까닭이다.
    어두워지더라도 저녁 가까이
    창문을 달아두면
    검은 새들이 날아와 시커멓게 강심(江心)을 끌고 간다.
    마음의 오랜 퇴적으로 이제 나는
    이 지층이 그다지 초라하지 않다.
    그 창 가까이 서 있노라면
    오늘은 더 빨리 시간의 전초(前硝)가 무너지는지,
    골짜기를 타고
    어느새 핏빛 파발이 번져오른다.
    곧 어둠의 주인이 찾아들겠지만
    내가 왜 옹색하게 여기
    몇 가을째 세들어 사는지,
    헤아리지 않아서 이미 잊어버렸다!
    어떤 저녁에는 병색 완연한 새 한 마리가
    내 사는 일 기웃거리다 돌아가면
    나도 아주 하릴없어져 어스름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불붙는 아궁일
    물끄러미 들여다보거나 정 심심해지면
    땅거미 가로질러
    하구 저쪽 갯벌 끝 끝까지 걸어가곤 한다.
    거기에는 소금을 모두 비운 한 채
    소금막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다.
    시간의 무딘 칼날에 베여도 이제 더는
    아프지 않도록
    이 밤의 책들 다 사르리라, 나는
    불꽃을 훨씬 뛰어넘는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