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더, 더 희게
더, 더 가벼이
입술 깨물고 호기심으로 달려가는 무인칭들
꼭꼭 뭉쳐던지면
떨어진 곳에서 눈사람이 태어났지
코코넛에 영혼이 있다고 믿어 쪼개기 전
당신을 먹어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구한 피지 섬사람처럼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아주 잠깐 허수아비였다가 물이였다가
하늘 창(窓)을 떼어들고 투신할 당신
내가 얼마나 타버렸기에
내가 얼마나 눈멀었기에
그토록 느닷없이 공간 가득 몰려오는가, 촘촘한 영혼이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미혹을 자동기술하기 위해
당신을 먹어도 되겠습니까?
당신을
2
바 다
낯선 방에서 창을 열면
바다가 한 줄
금빛 숨결 달아오른
눈부신 한 줄
3
재(災)의 여름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
홍차와 아스파라거스가 필요하지만
부추나 가지에도
기억은 땅속줄기처럼 주렁주렁 따라나오지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삼척으로 가지
당신 없는 여름은 갈취일 뿐이고
어떤 변명도 유치할 뿐이라고
자외선이 환청처럼 파고들고
파도가 발을 걸지만
당신을 내다버릴 생각에 골몰했지
맹목과 장롱, 서랍이 비워지고
서류의 칸이 비워져
마침내 우울도 비워지기를
커튼을 떼어 무진장의 햇빛을 들여놓고
빛 속에서 비로소
인생이 내 손아귀에 들어 있음을 알았지
어머니라는 규칙을 몰아낸 후
텅 빈
뼈의 휴식
빛이 스러지면
재의 방
당신이 죽어야 살 수 있고 당신이 죽어도 죽을 수 있구나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회전문처럼
여전히 나를 돌리고 있는 당신
금지옥엽
죽지도 않는 당신
4
각인
산비탈을 급히 내려가다
샘을 핥던
고라니 새끼의 동그란 눈과 딱 마주쳤다
놈은 펄쩍,
뛰어오르더니 물가에 나동그라졌다
고요한 숲이 쿵! 흔들렸다
애처로운 연노랑 배를 버르적거리다
칡덩굴과 엉겅퀴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놈은 어디에 가서 울고 있을까
산중턱에서 꺾인 낙엽송을 밟고 선 짙은 갈색 몸집이
어미인지도 모른다
젖내 나는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
인간의 눈빛과 맞닥뜨린 사태를 낱낱이 고할지도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린 찰나의 공포를
긁힌 털가죽 깊이 심어 넣었겠지
그 씨앗 같은 눈은 더욱 검어지고
내 눈은 더욱 더듬거리겠지
5
가장 조용한 죽음
몽골에서
양 잡는 것을 보면
사람 둘, 짐승 하나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한 사람은 뒤에서 양을 꼭 껴안고
한 사람은 앞발을 잡고
명치를 찔러
애인의 가슴을 움켜쥐듯 심장동맥을 움켜쥐고
가장 고통 없이 즉사시킨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속삭이는 주인의 품에 폭 안겨
양은 한마디 비명도 없이
커다란 눈만 껌벅이고 있다
하늘의 솜다리꽃이
하강한 양
초원의 말발굽에 밟혀 진동하는 꽃향기처럼
제 몸 냄새를 들판에 퍼뜨리지만
에튀겐*에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용히 별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환생을 지켜보는 것 같다
* 몽골 대지의 신.
6
양지꽃
언 화집을 뚫고 올라오는 노란 양초
심지 불빛, 속이 비치는 밀랍은
지난봄 칠한 안료를 녹여 바른 것일까
빨간 열매 독을 키우며
뱀처럼 땅을 기는 뱀딸기꽃과 혼동하여 지레 피한 기억
풍문을 유목하고
줄줄이 달려나온 촛불이 얕은 수풀에 붐빈다
무릎 근처 엄지 검지를 간지럽힌다
관성처럼, 날아온 침술사가
대침을 찔러 빛 알갱이들을 빨아먹는다
제 몸을 덥혀 노란 촛농을 쏙쏙 낳으려고
노랑, 애틋한 유년의 빛깔 - 강신애
노랑은 햇빛의 색, 망각의 색이고 천진무구의 색이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와 황사 섞인 폭설과 눅은 때를 녹여버리고 이른 봄, 이 땅 곳곳을 신생의 설렘으로 물들이는 최초의 빛깔이다. 담장 가득 흐드러진 개나리 처녀들은 풋풋한 원색의 차림새로 행인의 시야를 활짝 열어주고 양지 녘 얕은 수풀 밑에서 언제 잃어버린 줄도 모르게 잃어버린 빛 고운 브로치처럼 수줍게 피어난 양지꽃은 애틋한 유년의 한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어린 시절, 강화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친척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지천으로 피어난 야생화들과 눈 맞추고, 달고 시큼한 열매들을 맛보며 흠뻑 젖도록 뛰어다니던 유년은 내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한 때이다. 가끔 밭에서 호미질하는 외할머니 곁을 맴돌다 풀밭 틈새로 빨갛게 여문 딸기를 발견하고 내가 “딸기다!” 하고 뛰어가 손을 댈라치면 외할머니는 독이 있다거나 뱀이 먹는 거라며 못 먹게 하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 붉은 열매에 깃든, 성분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독’은 내가 느낀 자연의 첫 모순처럼 여겨진다. 그토록 탐스러운 빛깔 속에 숨어 있는 독이라니! 그 후 샛노란 뱀딸기꽃도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바라보곤 했다. 내가 뱀딸기꽃으로 오해하고 지나친 꽃들 중에 양지꽃이 적지 않으리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이다.
우리 믿음이란 대개 근거 없는 것들 투성이여서 옛 어른들이 뱀딸기에 독이 있다거나 뱀이 먹는 거라고 금지한 식물이 지금은 그 약효가 밝혀져 항암제로 쓰이기까지 한다. 산야의 이름 모를 잡초들도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 그 본질은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성분(약효)을 가진 풀이요 더러 자연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독성을 가진 풀들 역시 우주의 섭리를 증거 하는 것이리라.
채도와 명도를 구분할 수 없이 비슷한 뱀딸기꽃과 양지꽃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과도 견줄 수 있으리라. 한 사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란 어디까지가 그이고 어디까지가 그 아닌가. 드러난 성품이란 오해로 왜곡되거나 꼬리에 꼬리를 잇댄 소문이 만들어놓은 허구일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 속에 존재하는 양지꽃처럼 청아하고 애틋하고 귀여운 미덕을 놓치고 지나쳤다면 내 삶에서도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양지꽃은 작고도 화사하다. 종아리를 스치며 무리 지어 땅을 기는 성질은 겸손한 친밀감을 노란색은 천진무구함을, 양지(陽地)를 좋아하는 성품은 태생적인 명랑함을 드러낸다. 꽃말처럼 ‘사랑스러움’을 간직한 꽃, 풀숲에서 발견하는 순간 기쁨이 샘솟으며 주저앉아 어루만지고 싶어지는 꽃. 지금 땅속에서는 영하의 날씨 아래 자연의 화첩에 저장해둔 빛깔을 녹여 촛불처럼 천진하게 타오를 준비로 부산하겠지. 올봄, 당신의 빛깔도 양지 녘에서 피어나는 양지꽃 같기를.
강신애 1996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으로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이 있다.
캐슬린 윈터의 소설 <애너벨>에서 모티브를 얻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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