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권정우 <운주사 와불>外 2편

미송 2015. 3. 22. 08:10

 

 

운주사 와불 / 권정우

 

천 개의 부처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뒤에도
나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지만

 

당신 곁에
또다시 천년을 누워 있어도
손 한번 잡아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천 개의 석탑이
다시 바위로 들어가 버린 뒤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겠지만

 

내가 당신 곁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 모르는 당신은
다시 천 년이 지나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테지만

 

권정우 2005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등단. 시집 허공에 지은 집이 있음. 현재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운주사(雲住寺), 가을비 / 르 클레지오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비 속에 
꿈꾸는 눈 하늘을 관조하는 
와불 
구전에 따르면, 애초에 세 분이었으나 한 분 시위불이 
홀연 절벽 쪽으로 일어나 가셨다 
아직도 등을 땅에 대고 누운 두 분 부처는 
일어날 날을 기다리신다 
그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란다

서울거리에 
젊은이들, 아가씨들 
시간을 다투고 초를 다툰다
무언가를 사고팔고
만들고, 창조하고, 찾는다
운주사의 
가을 단풍 속에 
구름 도량을 바치고 계시는 
두 분 부처님을 
아뜩 잊은 채 

고요하고 정겨운 
인사동의 아침 
광주 예술인의 거리 
청소부들은 거리의 널린 판지들을 거두고 
아직도 문이 열린 카페에는 두 연인이 손을 놓지 못한다

살며, 행동하며 
맛보고 방관하고 오감을 빠져들게 한다 
번데기 익는 냄새 
김치 
우동 미역국 
고사리 나물 
얼얼한 해파리냉채 
심연에서 솟아난 이 땅엔 
에테르 맛이 난다


바라고 꿈을 꾸고 살며 
글을 쓴다 

기다리고 웃고 희망을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하다 
서울의 고궁에 
신들처럼 포동포동한 
아이들의 눈매는 붓끝으로 찍은 듯하다 

기다리고 나이를 먹고 비가 온다 
운주사에 내리는 가랑비는 
가을의 단풍잎으로 구르고 
길게 바다로 흘러 
시원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두 와불의 얼굴은 이 비로 씻겨 
눈은 하늘을 응시한다 
한 세기가 지나는 것은 구름 하나가 지나는 것 
부처님들은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꾼다 
눈을 뜨고 잠을 청한다 
세상이 벌써 전율한다

 

 

 

 

 사 이/ 권정우

 

 벼 포기가

 자기 키 만큼 거리를 두고 서있다

 

 혼자 서는 법을 배우려면,

 쓰러져도

 이웃한 벼를 다치지 않게 하려면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두루미가 개구리를 잡으러

 지나가는 저 사이로

 

 지난가을에

 태풍이 지나고

 거미들이 들락거리며

 만 채도 넘는 집을 지었지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이다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는 사이

 

 논두렁에 자전거를 세우고

 벼 포기처럼 서서

 바라보곤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