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천양희〈쓴맛〉

미송 2019. 7. 29. 19:04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
나팔꽃과 매꽃과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
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
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
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평생을 바라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구별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천양희 쓴맛(유심11월호)

 

 

자연이라고 말할 때, 자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만질 수 있는가. 감각장 안에 들어와 있는가. 가령 쑥부쟁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과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다른 말이 될 것이다. 쑥부쟁이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상품들이 대량생산됨으로써 경험 없는 기호들로만 존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따라서 감각의 장에서 섬세한 느낌이 형성된다면 쑥부쟁이와 벌개미취는 전혀 다른 개체로 인식될 것이다. 기실 식물의 이름 속에는 사람과 연결된 지점들이 존재한다. 가령 쑥부쟁이과 벌개미취라는 말은 같은 대상일지라도 그것을 느끼고 지각한 사람의 마음들이 연결되면서 각기 다른 이름을 얻게 된다. 식물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기호적 성격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에 대해 의미를 가졌던 시간들을 말해준다. 대지와 생명체와 인간이 하나의 느낌을 공유함으로써 이름이 탄생한다. 만일 이 느낌을 제거하고 나면, 식물의 이름은 단지 분류 자체를 위한 학명(學名)에 불과할 뿐이다. 시가 그토록 자연의 구체적인 이름들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천양희 시인은 이처럼 인간과 사물들이 함께 존재하는 관계성을 쓴맛이라는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쓴 것이 몸으로 들어와 감각을 자극하고 또 쓴맛에 대한 기억으로 어떤 사물을 볼 때마다 그것을 떠올리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분명한 것은 과거 어느 때까지 자연은 우리의 신체와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세계가 상실한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상호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인식할까. 자연이라는 지평 없이 존재하는 인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느낌은 모든 것에 대한 느낌이다. 자연에 대한 감응능력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느낌을 상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생태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역사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소외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타자를, 더 나아가서는 내 자신을 나로부터 소외시켜온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신진숙>

 

 

구별되지 않는 것들만 쪽집게처럼 끄집어내었다. 시를 읽고 어려운 해설까지 읽고 나니 쓴맛과 소외란 단어가 시선에 들어온다. 인생의 쓴맛이니 조직의 쓴맛이니. 단맛의 반대 되는 맛을 자주 접하는 우리, 무협지 같은 인생을 목소리 큰 사람을 통해 들었을 때 쫄기까지 하는 우리, 여태껏 단맛에만 길들여져 살다 이빨이 다 썩은 냥 찌그러드는 우리.

 

신학적 관점에선, 타락의 결과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다 말하지만 흔한 노래 같다.

 

오래 산 사람일수록 씀바귀 칡뿌리 뭐 그런 쓰디쓴 것들을 즐기는 듯 한데 몸에 축척된 쓴맛보다 더한 쓴맛이 들어가야 삼투압에 의한 쓴맛이라도 경험할 수 있어서 일까. 어쨌든 자연으로부터 멀리 와 버린 현실, 소외의 시간이 길었다.

 

인간에 대해 의미를 가졌던 자연을 만나려면 감각이 남달라져야 할 것 같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