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최정례,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미송 2021. 1. 18. 12:04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 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블루베리 힐에 놀러 가서 블루베리 케잌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 달란 말이야.

 

 

최정례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90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등 수상.

 

“네 그래요 통속합니다. 그래요 상투적이죠 우리의 일상이란 게.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일상이라는 신파를 견뎌야하는 것도 삶 아뇨? 그 통속함마저 우리의 ‘레알’이란 말이오!” 누가 이렇게 외치는 것 같습니다. 삶이, 일상이, ‘얼음땡놀이’ 중인 것 같은 막막한 느낌이 들 때, 우리는 탈출을 꿈꾸지요. 탈출을 꿈꾼 이들 중엔 더러 정말로 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시 속에 나오는 은영이처럼, 먼 나라로 탈출한 후에도 한국에서와 다름없는 일상의 상투성, 그 질긴 감옥에 다시 갇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같은 대목에서 제 시선은 오래 흔들립니다. 전화를 끊지 않네, 가 아니라 전화를 끊지‘를’ 않네, 라고 시인이 조사 하나를 굳이 더 붙여 쓸 때, 저 ‘를’ 속에 포함된 그 모든 지리멸렬한 비애의 울컥함들! 시인이 포착해내는 이런 일상의 순간들이 시로서 우리 눈앞에 다시 전개될 때, 화들짝 놀랍니다. 우리의 일상을 다시금 일깨우게 됩니다. 고마워요, 시인이여. 우린 차가운 입술에 길들여지지 않을 거예요. <김선우>

 

델마와 루이스. 집 나온 두 여자가 지평선을 끼고 황야를 횡단하던 그 영화. 시를 듣자니 삼십 대 중반 격렬했던 우리 화면들도 떠오르네. 남미로 갔던 은주가 떠오르네. 관동팔경 바닷길을 다 지나 경포대 솔밭 언덕을 씩씩대며 오르곤 했던 그녀. 함께 떠나자는 말을 자주 했던 그녀. 만상이 아무렇게나 기울어지네. 추억도 잠시 다알리아도 잠시. 이제는 다알 거 같은 답안들 쟁반만큼 뜨네.  20090305-20210118<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