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中

미송 2020. 8. 25. 16:37

기억하는 일

 

서기 양반, 이 집이 구십 년 된 집이에요 이런 집이 동네에 세 집 남았어 한 집은 주동현씨 집이고 한 집은 박해원씨 집인데 그이가 참 딱해 아들 이름이 상호인데 이민 가더니 소식이 끊겼어 걔가 어려서는 참 말 잘 듣고 똑똑했는데 내 자식은 어떻게 되냐고? 쟤가 큰 아들인데 사구년 음 칠월 보름 생이야 이놈은 내 증손주야 작년 가을에 봤지 귤도 좀 들어 난 시어서 잘 못 먹어 젊어서 먹어야지 늙으면 맛도 없지 뭐 젊어서도 맛나고 늙어서도 맛난 게 있는데 그게 담배야 담배, 담배는 이 나이 먹어도 똑같긴 한데 재작년부터 기침이 끓어서 요즘은 그것도 못 피우지 참다 참다 힘들다 싶으면 불은 안 붙이고 물고만 있어 그런데 서기 양반은 죽을 날만 받아놓고 있는 노인네가 뭐 예쁘다고 자꾸 보러 온대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며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쳐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날지 못하는 새는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는 없다

 

삼남매의 손을 탄 종이 인형 같아 목이 앞으로 꺾어지는 당신 주름은 무게와 무게가 서로 얽혔던 흔적이라 적어두고 나는 오랫동안 진전이 없었네 보조바퀴처럼 당신을 따라다니네

 

양은냄비 뚜껑에 배추김치가 올라앉는 무게 밥상의 무게를 밀어두고 화투장의 무게를 뒤집으면 팔월, 무주공산에 삼월, 홍싸리가 피네 오늘 저녁쯤엔 귀한 무게를 만난다는 괘를 싣고 길가로 나오네

 

무게의 내력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내 생에서 절망이 아닌 것들을 골라내는 일 당신은 지금껏 절망이 아닌 것들을 골라내는 일 당신은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종이만 주웠으므로, 나는 노트에 적어두었네

 

날지 못하는

새는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는 없다

 

길가 담벼락, 온몸의 무게를 들어 당신이 버려진 폐지를 꺼낼 때 나는 은유를 꺼내네 황달 앓는 막내들 같아, 수레에 잔뜩 실린 골판 골판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길을 돌다 갑자기 그 수레를 만나면 누구라도 ‘탑’하고 걸음을 멈출 수 있었네

 

그 ‘탑’을 조심스럽게 피해 돌다보면 사면으로 쌓인 골판과 골판 ‘사이’에 오늘의 결정(結晶)같은 주스 병이 맺혀 있었는데 수레를 쫓으며 속기한 내 노트에는 ‘사이’가 ‘사리’라고 오기되기도 했네

 

언덕을 내려가는 당신의 몸이 뒤로 젖혀지네 무게를 잊고 처음 바람을 읽는 어린 새 같아 어둠보다 높이 오른 탑의 꽁지가 막 들썩이기 시작했네.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 <평론>

-허수경 시인

 

세계는 언제나 불편한 것이었다. “뻔히 저기 있는 것을 알고 있으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 고통이라는 김현 선생 일기의 한 구절은 어젯밤에 꾼 악몽처럼 생생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농담스럽게 이 세계를 통과하기를 바랐다. 농담은 우리의 허브였다. 우리의 존재를 아주 조금이나마 밝은 곳으로 견인하는 식물의 향기. 괴로움의 상태를 벗어나게 해 주는 순간의 칼피스로서 우리는 이 시대, 농담을 이해했고 심지어 사랑했다.

 

우리는 이를테면 이런 농담의 메타포를 이해한다. “, 오늘 태어났는데요, 아버지가 제 아이예요라거나, “저 말들은 호모예요, 저 말의 고기를 먹는 건 텍사스 혹은 태양에서는 금지당했어요, 호모의 고기를 먹는 인간은 말의 고기를 먹는 샤먼이 되어 모든 질서를 흔들어버린대요!”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빙긋, 웃는다. “웃음은 신보다 더 오래되었” (옥타비오 파스)고 농담은 신보다 우리를 더 오래전부터 위로해주었으니, 이것은 불편한 세계를 받아들이는 한 방법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동지(冬至)」) 당신을 향하여 시를 쓰는 방법이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지만 말이다. 이것은 농담으로 겨우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를 지탱하는 한 방법이다.

 

박준이 선택한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서정(Lyric)’이다. 이 오래되고도 아득한 단어, ‘서정의 뒤편에는 악기가 있다. 서정의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를 동반하는 악기는 현악기 리라(Lyre)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현을 종종 짐승의 내장으로 만들었다. 양의 내장을 잘 씻어서 산()에 담갔다가 재로 씻어서는 길쭉하게 잘랐다. 그것을 말렸다가 유황에 넣어 표백했다고 한다. 산과 재와 유황이라는 극악한 지옥과, 시간이라는 무표정한 얼굴을 통과한 짐승의 내장을 쓰다듬을 때 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그것을 우리가 서정이라는 오래된 단어의 영혼으로 가정할 수 있을 때 박준이 쓰는 시들로 들어가는 입구는 조금 넓어진다.

 

또한 이 세계는 박준 시의 한 구절대로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고 나서야 겨우 살 만한 곳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박준에게 시는 염분의 문제이니 눈물의 염분이 세계의 염분, 그 농도보다 조금은 높아질 때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불편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과 도덕과 써야 할 말과 버려야 할 말 가운데. 자신의 부패와 타인의 몰인정함, 그리워하면 할수록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는 그리움과 함께, 또한 이 불편한 세계조차 유한하게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조건과 함께. 그런 고통 때문/ 덕분에 어떤 시인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인류에 속하되 세계를 소화하는 위장만은 초식류의 동물들처럼 여러 개의 방을 가진 되새김위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들여다보면 볼수록 멀어지는 것으로 여겨질 때 첫째 위안에 그것을 저장해두고 되새김하는 어떤 시인들에게 세계는 씹어도 씹어도 소화되지 못하는 무엇을 뜻한다. 세계는 시인의 둘째 위를, 셋째 위를, 넷째 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결국 첫째 위에서만 머문다. 박준도 그런 시인들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그는 이 세계가 자신의 위장 속에서 결국 소화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 시달린다. 위장 안에서 소화되지 못하는 세계도 언젠가는 불쑥 바깥으로 나온다. 아마도 더 이상 이 세계를 위장 안에 담고 있지 못할 거라는 시달림. 그 시달림은 소화되지 못한 세계를 바깥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동력이다. 시달림은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 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 (「미신」) 있는 상태의 떨림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떨림의 간곡함이 언어로 환원되었다. 우리는 그 결과를 박준의 첫 시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삶과 죽음.

이 오래된 문학의 주제는 폐기하고 싶을 만큼 낡고 오래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사유하며 그리고 반복해서 명멸해간다. 살면서 죽음은 여러 번 찾아오기에. 죽음을 목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거의 죽음과 가까운 순간들을 맞는 것까지. 누군가 새 출발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살아내었을 어떤 죽음의 순간을 떠올린다. 삶은 그토록 얇은 얼음장이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그렇다고 막막한 시작이 있었던 뒤로 갈 수도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 균열이 일어나면 그 균열의 파장은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 모두를 균열로 몰아넣는다. 에밀 시오랑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적이라는 것은 그 균열의 순간을 온전히 자신 속에 담아두지 못할 때 온다. 균열로부터 파생된 것들이 삶의 방향 없는 주인으로 들어앉은 느낌. 그 무질서의 느낌 속에서 한 인간은 완벽한 개인이 된다. 누구도 누구의 고통을 흉내내지 못한다. 누구도 누구의 느낌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완벽한 개인이 되는 순간은 어떤 절대적인 순간이다. 그리고 한 인간의 일생에서 어떤 순간은 그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공간으로 들어온다. 영원이라는 공간은 그러나 그다지 단단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없는 공간이다. 그곳은 다만 믿어야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영원은 가난한 노동조합이며 그 조합원들이 살고 있는 산동네다. 그곳은 언제라도 철거가 될, 믿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사원이며 한동안만 살 수 있는 사글세 집이다. 시집 역시 그렇다. 순간은 영원이라는 엉성한 공간 안에서 서먹한 퍼즐 조각처럼 널려 있다. 이 순간들이라는 퍼즐 조각을 들어올려본다. 순간들이여, 그대들은 시집이라는 영원을 우리에게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순간1. ‘미인이라는 소년의 창문

 

앞에서 시오랑의 이름이 언급된 김에 다시 한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그가 루마니아 헤르만슈타트에서 김나지움을 다닐 때 기거하던 방의 창문 사진을 나는 본 적이 있다. 부쿠레슈티에 대학으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러 떠난 것이 열일곱 살 때였으니 그 집에서 살던 시오랑은 열 일곱 이전이었다. 블라인드가 반쯤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었고 창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창 안은 검고도 검어서 그 안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칠흑이어서 그 안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데 창문은 열려 있는 상태. 자신을 감추고 외부를 향하여 문을 열어둔 상태. 앞에서 언급한 균열의 순간을 온전히 자신 안에 담아두지 못하는 상태. 어떤 의미에서 이 상태는 어떤 시적인 것의 시작에 대한 강력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 박준은 혼자 있지 않다. 누군가와 동거한다.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은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꾀병」 전문

 

그는 유서를 남기고 싶을 만큼 아프다. 그는 그 상태를 꾀병이라고 부른다. 그가 미인이라고 지칭한 사람은 정말 그의 병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일까? 그 사람의 성별은?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었으니 여자일 가능성은 높겠으나 귀걸이를 달고 다니는 이들이 요즘 세상에 여자뿐이랴. 뿐만 아니라 고대와 고대처럼 살고 있는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어떤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크고 무거운 귀걸이를 달고 있다. 그 둘이 기거하는 공간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시적 자아와 그 자아를 동반하는 무엇이 있는 공간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여러 곳이거나 아무 곳도 아니다.

 

소년의 병은 그의 병을 진짜 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시점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자주 아프다.원동기 소음기에 덴 상처와 짧은 손끝에서 무너지던 새벽과 새로 배운 어려운 욕들이 동백이 피어 있는 나무” (「동백이라는 아름다운 재료」), “나는 매일 병(病)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용산 가는 길」),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용산 가는 길」) 등과 같이 시집에서는 병의 기록이 수없이 등장한다. 자신의 병을 꾀병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자신 보다 이 세계가 더 아플지도 모른다는 반성에서 시작될 터이다. 미인은 이미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둘이 기거하는 공간을 떠난다. 미인이 없는 사이, 소년은 죽음의 경계 가까이에 다가가 있다. 그 경계 속에서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고 자신의 병을 정의한다. 미인이 돌아온다. 볕이라는 환한 것들 속에서 미인은 잠을 자고 있다. 자신이 구술한 유언을 받아 적은 것처럼 피곤한 미인. 세계와 자신을 연결해주던 미인은 드디어 삶과 죽음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인은 열려진 창문이다.

 

미인만이 그 공간 바깥으로 나가고 안으로 들어온다. 소년의 자아는 열려진 창문 안의 어둠 속에 누워 신열을 앓는다. 열린 창문 속에 든 어둠이라는 공간은 열린 잉크병과 같다. 누군가 그 잉크를 사용해서 무언가를 적어주면 된다. 그 일을 떠맡은 사람은 미인이다. 유서를 받아 적어주는 이 미인은 이 시집의 여러 장면 속에 등장한다. 위에서 인용한 꾀병말고도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호우주의보」 「()」 「미인의 발」 「마음 한철에서도 미인은 맹활약을 한다. 미인이 잉크병으로부터 소년의 유서를 써주면서 그 컴컴한 것들은 환한 이 된다. 말은 어둠 속에서 나왔고 드디어 태양의 가장자리인 으로 나왔다.

 

 

순간2. 천마총

 

한 청년이 거쳐야 할 수업 가운데 하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행이었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나날에 이렇게 고향으로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일 년 반 동안의 고독 속에서 저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으로? 예술가로서의 저를 말입니다.” , 얼마나 행복한 편지인가? 어떤 여행이 예술가를 구원하다니! 이 행복한 자기 발견은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그리스, 로마 르레상스 시대의 미술품과 건축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괴테가 시 속에서 레몬과 오렌지, 더없이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 미르테와 월계수가 자라는 곳이라고 노래했던 이탈리아. 그리고 그곳에 산적한 예술품들. 이름을 숨기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린 채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 몰두했고 돌아왔다. 괴테처럼 가보고 싶은 곳에 가보고 그 여행을 일기와 그림으로 기록하며 심지어 예술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까지 발견하는 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행운이 아니다. 더구나 괴테가 살던 세기에는 약 95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평생 떠나보지 못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어떤 시인은 수학여행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여행을 가지 못함으로써 시인의 말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불행 속에서 21세기 한 시인의 시는 시작된다.

 

심야택시 미터기에서 뛰는 말아, 불안감 조성은 경범죄처벌법 제24조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동네 입구서부터 내려 걷는 날이 많다. 사유지 놀이터엔 비가 내린다. 가로등 그늘은 빈 그네를 쉽게 밀 줄을 알고 나는 오래된 말들을 곧잘 불러 탄다.

 

그때, 수학여행에 못 가고 벤치에서 몸을 김밥처럼 말아넣는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첨성대를 돌아 천마총으로 향하고 있었을 겁니다. 뒷산에서부터 저녁이 미끄러져 내려왔습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놀이, 혀가 마른 입술을 아리게 만나는 놀이, 시소가 떠난 무게를 기억하는 간단한 놀이, 누가 부르는 것 같아 자꾸 뒤돌아보는 놀이들을 모래에 섞어 신발에 넣었습니다. 네가 돌아오면 ‘경주는 많아 갔다 와봐서, 바다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어’라고 신발을 털며 말하고 싶었지만

 

놀이를 놀이이게 하고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놀이터에 봄이 와도 너는 오지 않았으니 나는 풀어놓은 아픈 말들을 한데 몰아 노트에 적는 놀이를 시작했다. 흙이 흙을 낳고 말이 새 말을 하는 놀이, 그 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놀이,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

 

고분처럼 뚱뚱한 동네 엄마들이 깨어날 시간입니다 저는 아직 제 방으로도 못 가고 천마총에도 못 가보았지만 이게 꼭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어서요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 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었으니까요

―「천마총 놀이터」 전문

 

오래된 말을 불러내게 된 동기는 수학여행에 동참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혼자 놀이를 하면서 천마총으로 간 너를 기다린다. 혼자 놀이를 하는 아이에 대한 문학의 메타포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오래된 메타포에 속할 것이다. 한 개인이 처음으로 고독한 자아를 마주하고 자신의 고독한 존재를 바라본 순간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그는 그 순간과 마주한다. 한 개인이 철저한 개인이라는 병적인 상태속에서 생을 시작하고 보내고 이 자연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순간, “나는 풀어놓은 아픈 말들을 한데 몰아 노트에 적는 놀이를 시작했다. 흙이 흙을 낳고 말이 새 말을 하는 놀이, 그 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놀이,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는 시작된다. 놀이흙에 종이를 묻는자연에다가 자신의 말을 매장하는 단계로까지 다다른다. 종이라는 물질은 자연과 인간의 실용적인 과학적 예감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모든 글쓰는 인간의 로망이다. 인간이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기억을 온전히 잊어버리고 난 뒤에도 그 로망은 인간의 몸의 기억 속에 머문다. 연필로 종이 위에 오래 글을 썼던 손가락은 튀어나온 근육으로 그 시간을 증언한다. 천마총으로 여행을 가는 집단적인 수학을 함께할 수 없었던 철저한 개인이 되어 소년은 그 시간을 소화한다. 세계를 소화할 수 없었던 것과는 가장 반대의 것이 이곳에서 벌어진다.

 

소외를 시적혹은 말놀이라는 가장 고독하고 의미 없는 일로 변형시킨 이 자리에서 한 시인의 시언어가 발생한다. 천마총을 가지 못했던 기억으로 어쩌면 이 한 권의 시집은 시작되었고 끝을 맺을지 모르겠다. 가장 가고 싶었던 곳에 가지 못했고 그 시차에서 말은 나오고 인간의 저녁은 저물어 어둠이 올 때 이런 겨울이 온다.

 

 

순간3. 붉음에서 검음으로

 

수많은 아들이 있다. 그 아들 모두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한 것 같다. 이렇게 고쳐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 세계에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수많은 아들이 있고 사랑하는 아들도 있고 그냥 밋밋하게 서로를 대하는 부자도 있고, 있고, 있고…… 어느 겨울 혼자 살고 있는 아버지를 방문하는 아들도 있다.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파주」 전문

 

이 아버지는 다른 시에 나오는 죽어서 밤이 된 (태백중앙병원) 아버지이다. 살아 있는 아버지는 붉은빛으로 죽은 아버지는 검은빛 (’‘)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혼자 살던 아버지를 방문했던 아들의 마음이 붉은빛이었을 것이고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은 검은빛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붉은빛은 왜 결핍의 누대(累代)에는 늘 붉은 줄이 그어졌는지 알고 계실까요? (유성고시원 화재기)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결핍의 시간이 만들어놓은 빛이다. 검은빛은 그건 단지 그동안 울먹울먹했던 것들이 캄캄하게 울어버린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같은 시)에서 짐작할 수 있는 모든 붉은 시간을 지탱하고 난 뒤 찾아오는 암전 상태이다.

 

붉었을 때는 울 수 없었고 마침내 컴컴해졌을 때 그는 울 수 있었다. 혼자 사는 아버지가 혼자 막걸리를 마시는 것, 혹은 그의 붉은 얼굴을 보고 돌아오는 아들은 그 붉음 속에서 검어지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죽음 속에서 우는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고독을 목격하고 우는 아들. 붉음이 점차 짙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맞이한다. 저녁이 밤에게 자신을 내어줄 때이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이들은 시인이 된다. 박준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순간4. 밥상 위로 올라온 잉어

 

한 사람은 어떻게 이 세계로 오는가. 혹은 올 뻔하다가 가는가? 박준은 그것을 ()’이라고 말한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날, ‘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날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날 아버지가

들고 온 비닐봉지

얄랑거리는 잉어

 

잉어 입술처럼

귀통이가 헐은

파란 대문 집

 

담벼락마다

솟아 있는

깨진 유리병들

 

월담하듯 잉어는

내가 낮에 놀던

고무대야에 뛰어들고

 

나와 몸집이 비슷했던 잉어

 

그날따라 어머니는

치마 속으로

나를 못 숨어들게 하고

 

이불을 덮고 끙끙 앓다가

다 죽기 전에 손수 배를 가르느라

한밤중에 잉어 내장을 긁어내느라

 

탯줄처럼 길게

끌려내려오던 달빛

 

“당신 이걸 고아먹어야지 뭐하려고 조림을 해”

 

다음날 아침

밥상에 살이 댕댕하게 오른

 

그러니까 동생 같은

 

―「파주」 전문

 

 

그날은 어떤 날이었을까? 동생이 태어난 날? 혹은 동생이 이 세계로 올 뻔하다가 저 너머로 가버린 날? 그날, 아버지는 산모를 위해 잉어를 사들고 들어온다. 잉어는 비닐봉지 속에, 그리고 산모는 잉어 입술처럼/ 귀통이가 헐은/ 파란 대문집// 담벼락마다/ 솟아 있는/ 깨진 유리병들속에 갇혀 있다. 잉어는 내가 낮에 놀던 고무대야 속으로 월담을 하듯 뛰어든다. 시인은 그 잉어의 몸집이 자신의 몸만큼 크다고 했다. 월담을 하는 순간 잉어는 ‘Cyprinus carpio’라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이름에서 벗어나 잉어라는 신화적인 존재로 거듭 태어난다. 신화 속에서 한 존재는 엄청나게 팽창하거나 혹독하게 수축한다. “월담을 하는 순간, 즉 경계를 넘는 순간, 존재 이탈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제 사건은 현실의 비닐봉지를 뚫고 나와 신화의 고무대야속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날따라원래 아이의 영토였던 어머니의 치마 속으로 아이를 못 들어오게 한다. 원래 어머니의 치마 속도 고무대야도 아이의 것이었다. 아이는 두 영토를 잃어버렸다. 자신이 신화였던 두 영토를 아이는 잃어버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신화가 탄생되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아픈 어머니는 다 죽기 전에 손수 배를 가르느라/ 한밤중에 잉어 내장을 긁어내느라바쁘고 그 와중에 탯줄처럼 달빛이 끌려나온다. 그 다음 날, 밥상 위에 오른 것은? “동생 같은잉어조림/ 잉어탕이다. 탄생, 그 떨어지는 순간이 그렇게 이물스럽고도 낯설다. 나는 동생의 출생을 보면서 나조차도 몰랐던 내 출생의 순간을 재생한다. 내가 태어난 그날, 나는 밥상 위에 올려져 있다. 이것은 1980년대 후반을 소화해내지 못한 고통을 기록하던 김현 선생 일기의 한 구절과 닮아 있다. 앞에서 인용한 일기에서 이런 세계를 김현 선생은 카프카적 세계라고 명명했다.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신한 채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등에 얹고 말라 죽어가는 그 세계. 어느 날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한 것처럼, 어느 날 우리는 어떤 곳으로부터 어떤 시간으로부터 사람으로 변신되어 툭, 떨어진다. 열 달가량 자궁이라는 감옥 혹은 보호처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떨어짐을 준비했을까? 어쨌든 떨어진다. 한 가족의 밥상 위에 잉어조림/잉어탕이 되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낯선 세계에서 어떻게 삶을 겨우 유지하는가? 어머니는 치마 밑으로 내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새로운 탄생이 시작되었기에. 동생이 태어난 날, 혹은 인 날 잉어조림/잉어탕을 받아든 당신은 이런 유사 신화를 쓰지 않고 그 순간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어떤 의미에서 시는 모든 유사 신화의 현장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이 낯선 유사 신화 속의 밥상은 눈썹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이다.

 

이 어머니는 유사 신화 속의 어머니가 아니라 세속의 어머니이다. “한동안/머리에 수건을/뒤집어쓰고다녔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그만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마에 육중하게 앉아 있는 지리산에 참지 못하고 상을 뒤엎어버린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어린 누나와 내가/노루처럼/방방 뛰어다녔다”.

 

유사 신화 속의 어머니가 고독하다면 일상 속의 어머니 또한 고독하다. 어쩌면 일상 속의 어머니가 더 고독할지 모른다. “눈썹 문신을 이마 위에 지리산처럼 얹고 있는 어머니, 아마도 매일매일 눈썹을 그리는 시간을 줄이려고 문신을 시도한 어머니가 차리는 것이 매일의 밥상이다. 매일의 밥상을 위하여 그러니 어머니는 이마에 지리산을 얹고 있는 것이다. 그놈의 밥상! 내일 세계의 종말이 와도 밥상은 차려져야 하고 아이들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니니. 밥상은 비워지기 위해서 차려지는 것이다. 차려지고 비워지고 그 흔적을 설거지하는 매일의 범박한 일상 속에서 아이들은 철모르게 뛰어다니다가 문득 어른이 된다. 그리고 이런 시를 쓴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 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전문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일생을 대필하는 자서전과 자신의 일기사이를 지우는 글쓰기.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은 유사 신화와 일상이 긴장을 하는 자리에서 태어나는 서정의 어떤 얼굴일 것이다. 이 세계와 만나는 자리에서 결국 우리들은 우리를 글썽이며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그래서 저녁이면 만나서 밥과 술을 먹고 서로 택시를 태워주며 헤어지다가 문득, 당신이 생각날 때. 그런 마음들이 애잔해지는 이런 시를 쓰고 싶다. 바로 다음과 같은 시.

 

 

순간5. ‘날아오는 새들이토해놓은 들깨씨

 

 

묵직한 악몽 같은 유사 신화의 어린 시절을 통과하면서 군대엘 가고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고 난 뒤 박준의 시들은 새로 울고 싶은/ 오월의 밤하늘과 같은 수채화를 닮아 있다. 유화처럼 세계를 건설하려 하지 않으며 물감을 물에 풀어서 붓으로 선과 선으로 구축해낸 입체의 질감을 지우고 또 지워 드디어는 사라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수채화이다.

 

오월 천변(川邊)에서는

멀리 보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숭어는 겨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뜹니다.

 

천변의

긴 밭에서

 

새들은

어제 심은 들깨씨를

잘도 파 물어갔고요

 

노인은

막대기에 양철통을 들고

밭으로 나가

 

새들을 쫓다가

졸다가

 

가져간 찰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새로 울고 싶은

오월의 밤하늘에는

 

날아오른 새들이

들깨씨를 토해놓은 듯

별들도 한창이었습니다

 

―「별들의 이주(移住)」 전문

 

이 낙낙한 시간, 우리는 그만 이 불편한 세계와 화해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그 뒤에 올 시간이 폭풍의 손아귀로 우리의 어깨를 후려칠지라도. 세계야, 세계야, 불편해서 나는 앓았으나 앓으면서 이런 모습도 보았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 별은 날아오른 새들이/ 들깨씨를 토해놓은것이다. 그러니 그의 오월 밤에는 언젠가 그 들깨씨가 하늘에서 잎을 피우리라. 그 잎으로 하늘 항아리에 짙고도 투명한 별장아찌를 담그는 날도 오리라. 이건 값싼 희망이 아니라고 당신이 믿어주기를 바란다. 다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믿어주기를 바란다. 다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끊임없이 간섭해왔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었다는 전언을 담고 있을 뿐이므로. 아름다움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계를 이나마 지탱할 수 있었겠는가? 이 어눌한 수채화의 세계에서 시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늘 끝으로 머리를 긁는 당신의 모습이 낯설지 않을 때, 열 개의 손가락을 다 땄을 때, 그 피가 아까워 아름다울 가() 자나 비칠 영() 자를 적어볼 때, 당신을 인천으로 내보내고 누웠던 자리에 그대로 누웠을 때, 손으로 손을 주무를 때, 눈을 꼭 감을 때, 눈을 꼭 감아서 나는 꿈도 보일 때, 새봄이 온 꿈속 들판에도 당신의 긴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을 때” (동지) 시를 쓰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세계야, 나는 널 버리지 않을 거야. 나의 간절한 것들의 깊은 눈을 모아다가 그냥 시를 쓸 거야. 그러니 세계야, 계속 날 불편하게 해줘. 내가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당신을 응시하며, 그리고 어제 해결하지 못한 눈물을 젖은 모자에 집어넣으며 그냥 쏘다니게 해줘. 어느 날, 운 좋게 싱싱한 바지락 국물 속에 든 수제비를 삼키며 멀고도 먼 농담을 사랑하면서 말이야. 그래, 나는 이미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낸이 세계의 어떤 무엇이라니까.

 

타이핑 채란

 

 

시인이 시인에게 극진한 눈길을 주는 일. 진지하시다. 3자의 입장에선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그 지루함으로 코로나블루의 지긋지긋함을 견디어본다. 하릴없이 타전(打電)해 보는 기억. 기억을 기억하는 일이 웃프고도 가상하여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