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조은 <근황>外 3편

미송 2014. 4. 6. 08:47

 

최민식

 

 

1

근황

 

우울한 생각을 물뿌리개처럼 뿜어내며
가을빛이 쏟아지는 길을 걸었다
나는 경사가 심한 길을 걸었고
심층의 나무뿌리가 구불거리는
흙의 기억도 넘어갔다
때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재빨리 돌아서거나
놀라 그 자리에 멈췄다
아스라한 소실점 같은 기억 속
그들의 눈이 뿔처럼 빛났다
닳고 닳은 그림자를 빨아들이는 땅을
넋 놓고 보다 고개를 들었을 땐
생애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집 <생의 빛살> (문학과지성사)

 

 

최민식

 

 

2

 

바람이 후비던 곳이 열린다

 

거기 손 넣었던
바람이 출렁댄다
한 번 존재가 흔들린 것은
오래 바라보던 것을
쉽게 버리기도 한다

 

굳은 그림자의
발자국이 발긋해지고

 

헛디딘 발 아래서
향기가 올라온다
군데군데 다른 빛을 띤
허공으로

 

바위의 경동맥이 솟아오른다

 

-2011, 유심 50

 

 

최민식

 

 

3

절망 같은 희망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눈앞에 모래 언덕이 와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모래가
몸 속으로 사라졌다

 

-2013, 유심 58

 

 

최민식

 

 

4

비밀을 나눈 뒤

 

비밀을 나누면

믿지 못할 자가 된다

 

혀가 근질거려

무덤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비밀

화농 같은 비밀

살짝 암시만 하려다

도취되어버린 비밀

 

귀를 막을 사이도 없이

생의 첫 숨결처럼

토해버리는

모든 비밀은 지고지순하다

 

눈빛, 운명, 불빛……

목걸이, 가방, , 출입문……

 

혁명군 같은 꼬리를

누가 밟으면

너의 총구는 나를 겨눌 것이다

 

비밀을 나누고 싶으면

한때 비밀이었던 것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우리는

무덤까지 같이 갈 수 있다

 

-현대문학20143월호

 

 

조은 1988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무덤을 맴도는 이유》《따뜻한 흙생의 빛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