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식 作
1
근황
우울한 생각을 물뿌리개처럼 뿜어내며
가을빛이 쏟아지는 길을 걸었다
나는 경사가 심한 길을 걸었고
심층의 나무뿌리가 구불거리는
흙의 기억도 넘어갔다
때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재빨리 돌아서거나
놀라 그 자리에 멈췄다
아스라한 소실점 같은 기억 속
그들의 눈이 뿔처럼 빛났다
닳고 닳은 그림자를 빨아들이는 땅을
넋 놓고 보다 고개를 들었을 땐
생애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집 <생의 빛살> (문학과지성사)
▲ 최민식 作
2
봄
바람이 후비던 곳이 열린다
거기 손 넣었던
바람이 출렁댄다
한 번 존재가 흔들린 것은
오래 바라보던 것을
쉽게 버리기도 한다
굳은 그림자의
발자국이 발긋해지고
헛디딘 발 아래서
향기가 올라온다
군데군데 다른 빛을 띤
허공으로
바위의 경동맥이 솟아오른다
-2011, 유심 50호
▲ 최민식 作
3
절망 같은 희망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눈앞에 모래 언덕이 와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모래가
몸 속으로 사라졌다
-2013, 유심 58호
▲ 최민식 作
4
비밀을 나눈 뒤
비밀을 나누면
믿지 못할 자가 된다
혀가 근질거려
무덤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비밀
화농 같은 비밀
살짝 암시만 하려다
도취되어버린 비밀
귀를 막을 사이도 없이
생의 첫 숨결처럼
토해버리는
모든 비밀은 지고지순하다
눈빛, 운명, 불빛……
목걸이, 가방, 피, 출입문……
혁명군 같은 꼬리를
누가 밟으면
너의 총구는 나를 겨눌 것이다
비밀을 나누고 싶으면
한때 비밀이었던 것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우리는
무덤까지 같이 갈 수 있다
-《현대문학》2014년 3월호
조은 1988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무덤을 맴도는 이유》《따뜻한 흙》《생의 빛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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