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이상국 <고맙고 미안한 나의 시>

미송 2014. 6. 2. 10:17

가인(歌人)과 시인(詩人)

지난해 여름 친구와 남도 여행을 했다.
서해 변산반도 쪽에서 시작하여 광주, 목포, 통영, 거제, 부산, 경주 남산을 거쳐 돌아오는 제법 긴 여행이었다. 우리는 더위와 운전의 피로를 달래기 위하여 휴게소에서 몇 장의 시디를 구했다. 물론 흘러간 노래들이었지만 여행의 긴 시간 심심하면 듣고 또 들었다.

나는 역시 송창식이 좋았다.
큰 몸통과 굵은 목울대에서 꽃대가 꽃을 밀고 올라오듯 미끄럽게 빠져나오는 그의 노래는 조용필의 찢어지는 듯한 가성의 호소력이나 조영남의 능란한 창법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시인들의 대표작 몇 편만 알고 있다가 시집 한 권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른 것과 유사한 경험이었다. 송창식에게는 마치 스스로의 인생과 노래를 사랑하고 즐기는 듯 온 힘을 다하는 전인적 열정이 있었다. 흔히들 송창식을 일러 가인(歌人)이라고 부르는데, 역시 가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인과 시인을 생각했다.
나는 내 시를 사랑하고 즐겨 본 적이 있는지, 그렇게 온몸을 소리통으로 열정을 다하여 나의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는지.

어려서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문필가가 되겠다고 하여 결국 시인이 되기는 되어 그 후 40년 가까이 나는 시인이었다. 그간 몇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기도 하며 내가 받은 시인 대우에 비하면 사실 내가 문학 공부에 바친 열정이나 기울인 노력은 많이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체로 나의 삶을 지탱해 주었고 생이 그것으로 거의 일관했다고 보면 시에게 고맙고 미안하기까지 하다. 기계적으로 시를 발표하고 크게 내세울 만한 것도 없이 아무 데나 이름을 올리는 걸 생각하면 모든 게 과분하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몸을 바르게 하고 청을 다듬어 간다는 것을 구실 삼아 이 어쭙잖은 글을 엮는 염치없음을 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 시의 원적지 설악동(雪岳東) 낙산서(洛山西)

얼마 전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학생회장 선거에서 나와 경쟁했다는 한 친구는, 그때 전교생 앞에서 회장의 각오를 발표하는데 내가 뭔가를 써서 나왔는데 그 내용이 자기 것보다 월등해서 낙선했다고 내게 벌주를 권했다. 그러고 보면 어려서부터 생각이나 말을 꾸며내는 재주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다. 6·25 전쟁 중 기총소사가 있던 날 어머니가 나를 부엌에 쓰러뜨리고 내 위에 엎드렸는데 그때 어머니 심장과 내 심장이 함께 뛰던 그 터질 것 같은 박동소리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추녀 끝 흙벽을 뚫고 간 총알 자국이 주는 공포와 사격장 부근에서 캐낸 기관총 탄통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구릿빛 전율 같은 게 어린 나를 관통해 가기도 했다. 원래 즐거운 건 남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는 축문을 쓰는 가는 붓처럼 예민했고, 어머니는 동네 초상집에서 대신 울어 줄 정도로 활달하고 술을 좋아했다. 우리 집 부엌 검불가리 밑에는 늘 술독이 묻혀 있었다. 밀주 단속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아무 때나 독을 열고 체를 지그시 누르면 술이 고였고 어머니는 그걸 일터로 가져가시고는 했다. 내가 지금도 낯가림을 하는 것은 부친을 닮았고 술을 즐기는 것은 어머니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서 내가 물려받은 유산은 표지를 기름 먹인 《주역》 한 질과 《주자가례》 그리고 당신이 필사한 《만세력》 한 권이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보관하고 있다. 당신이 평생 침 묻혀 넘기다 닳아 해진 책장을 나도 넘겨보며 아버지를 생각할 때도 있다. 그분들은 선산에 같이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을 정도로 불화하며 살았다. 나의 꿈에 그리운 어머니는 좀체 오시지 않는다. 아버지는 가끔 나타나시는데 그런 날은 뭔가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해방 다음 해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인공치하의 북한이었다.
고려 말 안축이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를 마치고 관동을 유람하며 남긴 경기체가의 하나인 〈관동별곡〉 중, 고성 청간정을 지나 양양 낙산으로 향할 때 그는 “설악동 낙산서 양양풍경/ 강선정 상운정 남북상망(雪岳東 洛山西 襄陽風景/ 降仙亭 祥雲亭 南北相望)”이라 읊었다. 그때 그가 지나갔던 설악산 동쪽 낙산 서쪽에 있는 강선정은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의 뒷산에 있었고 그 마을 이름이 바로 강선리다. 안축이 〈관동별곡〉을 지은 시기를 대략 1330년대로 잡고 보면 내 고향은 상당히 오래된 마을이다. 그곳에서 부친은 전형적인 소농이었고 소위 바깥출입 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한학과 인문적 교양을 갖춘 분이었다. 정월이 되면 사랑방에서 마을 부녀자들의 신수점을 봐 주거나 택일을 해주었고 우환이 있는 집에는 안택을 해 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정선 사람으로 강릉 함씨였다.

내가 나고 자라던 집은 터만 남았다. 일하기 싫으면 슬며시 올라가 공상에 잠기거나 먼데 신작로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자동차와 바다를 바라보던 언덕에는 근사한 펜션들이 들어섰다. 한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서낭당 당목이 밭둑의 뽕나무만 하게 보일 때가 있었으나 그것들이 어느새 거대해진 걸 보면, 신경림 시인의 시 〈다시 느티나무가〉에서처럼 나는 다시 작아진 모양이다. 이제는 나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나 집과 사람이 바뀌었다고 고향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커서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커다란 대륙을 가보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낯선 인종들도 만나보았지만, 나는 고향에서 소고삐만큼밖에 나가지 못했으며 가도 가도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언젠가 이런 시를 썼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 〈산그늘〉

나는 그곳의 산천을 물려받았고 농사하는 부모를 통하여 수천 년 농경문화를 태반으로 나고 자랐다. 그것들은 여전히 내 속에 작동하고 있으며 그곳의 농업적 사고와 투박한 언어들 그리고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배했던 전통적 삶의 양식과 정서는 내 시의 바탕이자 원적지가 되었다.


《초혼(招魂)》에서 《동해별곡(東海別曲)》까지

나는 내가 왜 시인이 되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네루다처럼 말하자면 시가 어떻게 나에게 왔는지 모른다. 마치 산자락의 옹달샘에 저절로 물이 고이듯 나도 모르게 시라는 샘을 가지게 되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필가’를 자원했다. 시와 소설조차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필가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선친이 보시던 서책이나 수시로 들은 교훈적인 고사도 그렇지만 근동에 초상이 나면 만장을 도맡아 쓰거나 소를 잡아 지내던 동제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축을 고하던 아버지에게서 받은 막연한 영향일 수도 있다. 거기다 아버지는 꽃 피는 철이거나 가을 시제가 끝나면 낙산 의상대와 하조대 같은 곳으로 시회(詩會)를 다니셨고 보면, 그런 시골의 처사적 풍류나 유가적 숭문사상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왔을 수도 있다.
한편 국민학교 시절 작문 숙제를 해 가면 또 누구 것을 베껴왔느냐고 면박을 주곤 하던 선생님의 치명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국 시인이 된 걸 보면 사람이란 저도 모르게 좋아하고 끌리는 것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맡기게 되는 모양이다. 더구나 문재(文才)란 공부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천부적 성정도 중요한 것이고 보면 시는 내게 그런 여러 경로를 통하여 왔을 것이다.
나의 문학에 스승이 없다. 문단 연조가 깊거나 성공한 문인들의 문학적 자전에 보면 누구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고 거기서 같이 이름을 얻게 된 사람들과 도반을 이루어 평생 글벗과 술벗이 되어 지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다. 나는 혼자 터벅터벅 걸은 셈이다.

내가 최초로 손에 넣은 시집은 중학교 시절 소월의 《초혼(招魂)》이었다.
당시 건봉사 봉명학원 출신으로 동국대를 나와 속초에서 중학교 교장을 하고 계셨던 나의 둘째 숙부는, 언젠가 영서 지방으로 전근을 가시면서 험한 교통을 이유로 당신의 서책과 끌고 다니기 힘든 가재도구를 우리 집에 맡겨놓고 가셨다. 그 책들을 쌓아둔 골방이 나의 아지트였는데 거기서 나는 문고판 소월 시집 《초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뭔지 모르긴 해도 외롭고 서럽고 막연한 소월은 물처럼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 책은 지금도 내 서가에 꽂혀 있다. 책더미 속에는 숙부님이 구독하시던 낡은 《신천지》나 《사상계》도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발표된 소설과 동인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을 떼어내 따로 소설책을 만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원》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백일장에 뽑혀 다니기도 했으나 내 속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주는 선배나 은사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역사와 사회 과목 같은 것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수학이나 과학 시간에는 대놓고 소설을 읽었다. 선생님들도 그런 나를 제쳐놓았다. 해방되고 설립된 수복지구의 고등학교에서 문학하는 교사를 만나기는 힘들었을 테고 이어받을 문학적 전통이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2 때부터 《현대문학》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대학 갈 형편은 안 되었고 모 교대에 남의 대리시험을 봐주러 갔다가 일이 꼬이는 바람에 내 이름으로 합격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등록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 좌절을 군 입대로 견뎌보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나의 20대는 갈 곳이 없었다. 당시 강릉의 경월소주는 25도였다. 그때 일삼아 마신 술로 위를 버리고 오랫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다. 몇 번의 가출과 출구를 찾기 위한 방황이 계속되었다. 몇 년의 서울 생활은 막막하고 외로웠다. 그 시절 나는 종로 3가의 뱀집 일을 돕기도 했고 외가 쪽의 삼양동 철강대리점에서 경리를 보기도 했다. 또 뚝섬을 주거래처로 무허가 약 거래를 하다가 약사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서 즉심을 받기도 했다. 을지로 인쇄골목이나 영등포의 중기시장에 술친구들이 있었다. 낮보다 밤이 좋았고 마치 부초처럼 흘러다니던 시절이었다. 흥인동에도 한참 살았는데 그 무렵 가스등을 밝힌 청계천 리어카 서점에서 구해 읽던 책들이 아직 남아 있다. 그때 몇 년간 나는 시다운 시 한 편 쓰지 못하고 살았다. 그것들은 들끓으며 내 안의 어딘가 있었겠지만 나올 힘이 없었다.

결국 정처를 마련하지 못한 나는 귀향했다. 어느 해 겨울, 어둑한 방 한편에서 헌 이불을 덮어쓴 채, 누룩이 뜨고 목이 긴 오지병에서는 시큼하게 식초가 익어가는 골방에 엎드려 많은 작품을 써서 신춘문예에 던졌다. 어쩌다 〈강원일보〉에서 당선 통지가 날아왔다. 1972년이니까 스물여섯 살 되던 해였다. 〈문밖에서〉라는 작품이었다. 이후 시집에서도 빠지고 지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시 박목월 시인이 심사를 했었는데 그야말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지 않았을까.
그 후 1976년 《심상》으로 등단하기까지 4년여, 나는 시 공부를 다부지게 하지 못했다. 그걸 가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고 또 시가 20대의 고립무원이나 상실감을 만회시켜 주기에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역의 동인지였던 《갈뫼》에 지속적으로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누구와 구체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고 시의 동향 같은 데도 무관심했다. 생활은 불안정했고 시 공부는 지지부진했다. 등단을 위하여 몇 군데 시도를 해보기도 했으나 내가 쓰는 작품들이 일테면 현실 문제를 담고 있는 편이어서 굳이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다. 모처럼 기회가 있어 《현대문학》 같은 곳에 작품을 보낸 적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속초에는 고교 선배인 이성선 시인이 시문학으로 등단해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창간한 지 얼마 안 된 《심상》을 소개해 주었고, 1976년 가을 그곳을 통하여 비로소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고향의 농협에 자리를 잡았다.

등단하고 나서도 나의 문학은 개점휴업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어쩌다 등단지에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청탁을 받아 보는 외에는 시를 발표할 일이 없었다. 지연이나 학연을 통틀어 봐도 연이 닿는 문학지나 아는 이가 없었다. 어느 분야나 비슷하겠지만 스승이나 도반이 없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크게 낙담하거나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시를 쓰는 일은 필생의 업이라며 억지 여유를 보이거나 내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 중의 하나일 뿐 굳이 거기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는 핑계와 자위였다. 한편 그것은 그럴수록 시에 전념하기보다는 마치 남의 일처럼 시골구석에 처박혀 청탁 오기만을 기다리던 나의 객기이자 미련함이기도 했다. 등단 10년 만에 겨우 첫 시집 《동해별곡》을 내게 되었다. 그 후기에 나는 삶과 시 어느 것에도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시작의 방향성이나 작품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깊게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또 작품에 대한 평가나 비평을 제대로 받아 본 적도 없었다. 첫 시집에는 세계의 바깥과 외로움 혹은 현실의 칙칙함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경림 시인의 해설은 그것을 넘어 죽음을 읽고 있었다. 대개 첫 시집의 경험이 그렇듯 내 시를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과 조망은 중요한 것이었다. 후회는 늘 뒤에 오기 마련이어서 나는 비로소 각성과 분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인과 시의 안과 밖

시인은 환영받는 존재인가? 우리나라 시인들은 근현대를 통과하며 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편가름에 시달렸고 지금도 그런 상황은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그 와중에서 시인이라는 존재가 대중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늘 궁금하다. 누구 말처럼 모든 시인은 대체적으로 불온한 것이긴 하지만 1970, 80년대 현실에 대한 나의 비판적 인식은 주위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쯤으로 비칠 수도 있었고 그런 시선은 불편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인은 나의 전부였다. 중학교 다닐 때인가 “기름 없는 나라 걸어 다니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5·16쿠데타를 지지하는 거리행진을 해 본 이후로 중심에서 멀리 있다는 이유로 혹은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나는 시위를 해 본 적이 없다. 학생들이 옥상에서 몸을 던지고 시인들이 감옥에 가는데 고작 자위적 시나 쓰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해체되어가는 농촌 문제를 담아내거나 함경도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속초의 속칭 ‘아바이마을’을 10여 년 드나들기도 했다.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아파하지 않으면 시가 될 수 없다는 다산의 시론과 칠레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이해받고 지지받았던 네루다의 민중성, 혹은 브레히트의 시론 등에 나는 근접해 있었고 그러한 것들을 문학의 윤리나 정치성 문제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러한 의식들은 시집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에 반영되었거나 시도되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작품으로서의 성패 여부를 떠나 시대정신에 동참하고자 했던 시인으로서 예의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 무렵의 일들을 정리하여 어느 지면에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었다.

80년대를 보내며 나는 반독재투쟁이나 민중시를 쓰는 시인들에 대하여 상당한 부채의식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현장 혹은 중심에서 동떨어진 시골에서 월급 타서 술이나 마시며 겨우 자기변명에 가까운 시를 끼적거리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자조했고 절망했다. 그러면서 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며 해체되어가는 농촌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그것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문제기도 하고 당시 내가 재직했던 농협창구에서 매일 맞닥뜨리는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이기도 했다.
평론가 유성호는 당시 작품들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그동안 이상국의 시는 민중들의 소박하면서도 구체적인 삶을 옹호하고 그 여실한 국면을 그리는 이른바 리얼리즘 계열로 평가받아왔다. 특히 해체일로에 있는 고단한 농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그의 초기 대표작들은 매우 값진 당대의 효용성과 형식적 견고함 그리고 잘 절제된 핍진성으로 인해 깊은 주목과 상찬을 받은 바 있다. 냉혹한 분단현실과 구조적 모순으로 고통 받던 ‘농촌’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은 이상국 시인을 가장 선명하게 특징짓는 시적 본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유성호 〈침묵의 파문〉 창비 2002)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등의 시집에 실린 것들이 그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에 대한 나의 평가는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데가 있었다. 그것들은 이른바 역사의식이나 소명감을 갖고 쓴 작품들인데 누군가 나의 대표작을 고르라면 그 당시의 작품에서는 단 한편도 선택을 못 하기 때문이다. 박영희에 빗대어 말한다면 시대만 있고 시는 없었기 때문일까. 대표작이란 무엇일까? 작품의 문학적 성취도는 물론 그 안에 내재된 공감의 보편성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나의 작품들이 구현해 내고자 했던 시대정신이나 당대 현실의 진실이 문학성을 담아내기보다는, 말하자면 리얼리즘의 구체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목적에 상응하려는 일종의 상투성이 전면에 나섰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나에게 던지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시인은 언제든 현실과 시대정신에 무관할 수 없고 그것이야말로 시인에게 부여된 영예이자 짐일 것이다.
— 《시와시학》 2012년 여름호

그러나 내 시가 지향했던 것들과 내가 처한 현실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데가 있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직장은 농민의 이익을 위한 단체였지만 국가의 농업자금을 관리하는 기관으로서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조선시대 환자(還子) 받으러 나온 이속(吏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을이면 가구적간(家口摘奸)을 하듯 융자금 회수를 하러 다니거나 이와 유사한 일로 생활을 보장받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치적 사회적 피로감들이 쌓여가며 1980년대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시낭송이 문화운동에 앞장섰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속초에서 이성선, 최명길, 고형렬 시인들이 주도한 물소리 시낭송회가 시작되었고 나도 거기에 참여하였으나 고형렬 시인이 서울로 가고 나도 얼마 못 가 그만두었다. 1981년쯤이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민주화의 봄을 신군부가 무참하게 짓밟을 때였는데 시낭송회의 분위기가 그런 현실 혹은 사회적 무거움과 너무 동떨어진 게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후 성격이 다른 시낭송회를 주도하기도 했으나 기관원 관객의 시선과 좁은 바닥에서 참여자들이 자기검열에 시달려야 하는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삼 년 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문학 활동과 문화적 영역확보를 위한 모색은 계속되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민예총 강원지회를 설립하여 강원도의 문화지평을 넓히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고 그 뒤로 민족문학작가회의 강원지회를 설립하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기도 했다.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지만, 정치·경제적 소외와 배제를 면치 못함은 물론 문화적 환경마저 거칠었던 강원도적 현실에서 노골적 방해와 압력을 무릅쓰고 양대 단체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시인으로서 내가 한 일 중에는 가장 대중적이고 공공성(?)을 띤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인으로서 살기의 곤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내 삶이 거의 시로 일관되었고 그것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뿔을 적시며 가는 길

나는 등단 40년이 가까워져 오는데 모두 여섯 권의 시집을 냈다.
특별히 적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요즘의 시집 내는 속도나 양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박리다매보다는 잘 안 팔리더라도 언어의 귀금속상을 차려야 한다는 어느 원로 시인의 말씀을 귀담아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작품집을 만들어 냄비 받침으로 사용하거나 지구상의 숲을 없애는 데 기여할 필요가 없다든가 혹은 소월이나 백석, 한용운이 시집이 많아서 100년 한국시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조적 핑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열정이나 노력도 문제였지만 그것은 시로 자신을 세워 보겠다는 일념이나 문학적 성취를 통하여 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도 시집 몇 권으로 시인의 대우를 받으며 시인으로서 일생을 산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어려서 선친이 오대산 스님에게서 받았다는 나의 사주는 아직 서랍에 있다. 선친은 그것에 대하여 내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나는 그것을 아직 누구에게 보인 적이 없다. 거기에 나의 생을 운영하는 좋은 방법이나 지나쳐온 길이 있다 한들 이제는 되돌아갈 수도 없다. 언제나 나를 가장 사랑하는 건 나였으나 그래도 가끔 시가 아니면 어떤 길을 갔을까 하고 내게 물어보기도 한다.
아이엠에프 사태가 오고 나는 회사에서 명퇴했다. 그리고 지역의 선후배들이 경영하는 지역 신문사의 대표이사로 추대되어 갔다. 그러나 규모가 아주 작기는 해도 명색이 회사인데 재정적 실력이나 경영수완도 없이 그것을 운영한다는 것은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겨우 3년 정도를 버티고 난 나는 그때 마침 문을 연 만해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여러 가지로 행운이었다.
그곳에서는 시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고 또 무엇보다 소중한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미시령을 넘나들었다. 내설악의 해 지는 풍경과 북천(北川) 물소리를 들으며 그곳에서 60대의 절반을 넘겼다. 음으로 양으로 받아들인 불교적 사유와 말씀의 무게는 내 웃자란 섶을 눌러주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오현 대덕스님의 법력과 거기서 만난 시인 묵객들의 치열성과 부드러움은 손바닥만 한 내 생과 시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었다. 승속이 함께하는 곳이 늘 조용할 수는 없었으나 만해라는 정신세계는 항상 나를 고양시켜 주었다. 돌아보면 거기서 보낸 10년 가까운 세월은 나의 삶이나 문학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보람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다섯 번째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를 내고, 후에 《뿔을 적시며》로 발간된 여섯 번째 시집을 준비하며 내 시 세계의 변화와 방향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했다. 그것들은 나에게 북천 이후라고 할 만한 어둑하고 더디나 영을 넘는 조용한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내 시에 얼마간의 소외와 변방의식이 있다고 한다. 혹은 그걸 외로움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한 시인의 작품은 비록 소품 한 편이라도 그 시인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그가 나고 자란 산천과 지적 행로가 미로처럼 구불거리고 그가 먹고 살았던 밥이 반영되고 암시된다. 시인이라는 존재는 천성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거나 정신적 유목성을 지닌 부류들일 수도 있다. 따라서 시인은 비애와 변방의식을 저들의 양식으로 삼을 수도 있겠으나 내 시에서 비치는 외로움이나 변방성은 대체로 내가 겪은 삶의 반영이거나 나의 생에서 결핍된 것들에 대한 보상적 그리움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남조 시인은 정지용문학상 심사평에서 “이상국 시인의 시의 심장 부위는 착하고 유순한 우수다. 세상에 이겼기보다 패한 쪽이면서 아량과 용서의 상을 차려 세상에 대접하는 그런 유의 우수를 절실히 받아 느끼고 공감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수상의 상찬이기는 하나 어느 때부터 나는 순해지고 싶었다. 인간의 마음은 근원적으로 슬픔에 가 닿아 있어 문학은 그걸 건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무엇이든 정면으로 마주치거나 바로 가는 길보다는 멀리 에돌아가고 싶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것들은 채울 수 없는 생의 헛헛함이나 존재의 소소함을 시로 지우거나 덮고자 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에 지거나 늦더라도 뿔을 적시며 외롭게 천천히 가고 싶은 생각과 세월이라는 배후를 가지게 되었다.


샤먼처럼 건달바처럼

어쩌다 노래방에 가면 벽에 붙어 있는 인기곡 중에 내가 아는 노래나 가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어두운 조명 아래서 겨우 찾아 불러야 한다. 대중의 기호가 변하고 기호에 따라 문화가 바뀌듯 시도 시인도 변해간다.
나의 시는 내 시의 바깥이나 나라밖으로 나간 적이 별로 없다. 전통 정서의 끝자락을 붙잡고 아직 농토나 절간, 내 사는 마을의 골목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시가 시 속에 갇혀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발견 혹은 시적 사유의 한계성에 대한 별 고민 없이 협애한 통로를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때로 나를 아주 작게 만들고 상심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선배들은 바다 저편 구석에서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도록 한 곳을 떠나지 못하고는, 반딧불처럼 나부끼고 버섯처럼 말라서, 겨우 하잘것없는 시편으로써 큰 나라의 책에 실리게 됨은 실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나… 우물에 빠진 모수(毛遂)가 있는가 하면 좌중을 놀라게 하는 진공이 있다는 것은 불행히도 너무 지나친가 봅니다.
— 박지원 《열하일기》
이는 거대한 중국의 땅덩이와 앞서 가는 문물을 접한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한 탄식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사는 곳은 바다 저편 구석이다. 더구나 그 구석이나마 그때보다 절반으로 줄었으니 그 속에서 겨우 하잘것없는 시편으로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자신을 소모하지나 않을는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막연하다. 그러나 나의 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잘 모르듯이 나의 시가 또 어디로 갈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내 생과 내 시의 주인인 말이 가자는 데로 따라갈 뿐이다.

그동안 좋은 일이 많이 지나갔다. 그러나 아직 좋은 일이 많이 남았다. 어느덧 번잡한 곳에서 조금 비켜서 설악산 자락에 엎드린 나로서는 이제 처사적 글 읽기와 아직 오지 않은 시를 만나러 샤먼처럼 건달바처럼 천지사방 돌아다니는 즐거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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