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김명인 <불우와 부재를 견딘 시쓰기>

미송 2014. 6. 2. 10:11

 

 

— 안녕하세요. 봄을 재촉하는 비가 오는 날에, 촉촉한 걸음 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오늘 유심 문학토크의 주인공은 김명인 시인입니다. 멀리서만 동경하던 분을 이렇게 가까이 모시고 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기쁩니다. 여러분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김명인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으면서 문학토크 시작하겠습니다.

 

 

이 나무는 사막을 거쳐 온 여행자들이
잠깐 쉬었다 가는 자리
그늘을 깔아놓고 행려의 땀방울을 식혀준다
헤아릴 수 없는 순례의 길목이 되면서
뻗은 실가지도 어느새 우람한 팔뚝으로 차올랐지만
나무는, 여행자들이 내려놓는
들뜬 마음이나 고단한 한숨소리로
사막 저쪽이 바람편인 듯 익숙해졌다
동이 트고 땅거미 져도 활짝 열린 사막의 창문
맞아들이고 떠나보낸 여행의 수만큼 나무는
세계의 전설로 그득해졌지만
잎을 틔워 초록을 펴고 시드는 잎차례로
낙엽까지 가보는 것이 나무의 유일한 해살이였다
언제나처럼 굴곡 겹친 사막의 날머리로
지친 듯 쓰러질 듯 한 사람이 멀리서 왔다
딱 하루만 폈다 지는 꽃의 넋과 만나려고
선연하게 둘러앉는 두레의 그늘, 석양이 지고 있다
창밖으로 보면 오늘의 여행자는 홀로 서서 고즈넉하고
나무 또한 그가 버리고 갈 길에는 무심하지만
펼쳐든 여정이라면 누구라도
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행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어제가 포개놓은 그늘에 서게 하는 걸까?
아직 여행의 계절은 끝나지 않았다
어디로도 실어 보내지 못한 신생의 그리움 품고 나무의
늙은 가지에 앉아
몸통뿐인 새가 울고 있다

 

— 〈여행자 나무〉 《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사, 2013)

 

 

— 김윤 시인께서 낭독해 주셨습니다. 읽을 때도 그랬는데 귀로 듣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매우 인상적이네요. 감사합니다. 자, 그럼 김명인 선생님을 자리로 모시겠습니다.(박수) 선생님,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지극히 단조롭게 지냅니다. 2년 전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했으니까, 올해로 백수 3년째지요. 생활을 단순화시켜서 오전에는 동네 앞산 운동장에 가서 걷고, 오후에는 작은 집필실에서 내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렇게 보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심심하면 다시 집필실로 내려가 한두 시간 책을 읽곤 합니다. 그게 지금의 제 하루입니다. 잘 견디고 있습니다.(웃음)

— 잘 견딘다(?)는 말씀이 제 마음 한 편을 무겁게 하는데요, 퇴직하신 후에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 시간들이 허전하게 느껴지지는 않으시는지요?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강의를 계속하다 하지 않으니, 말주변이 좀 어눌해지고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지만, 무엇보다 가르치는 일 자체를 잊어버렸습니다. 퇴직한 동료들은 소일 삼아 강의도 하고 그러던데, 저는 즐겁게 백수의 일상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답답해지거나 심심해지면 가끔, 지칠 때까지 중노동에 가깝도록 낚시에 몰두하곤 합니다.

— 소소한 선생님의 일상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합니다.(웃음) 선생님께서는 1973년에 등단하셨으니까, 벌써 40년이 넘게 시를 쓰고 계십니다. 제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동두천》이라는 시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는지 모두 아실 텐데요. 사실 그 시집이 나왔을 때, 제가 한 살이었어요. 그래서 얼마나 선생님이 큰 시인이시고 어른이신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시(인)는 어떤 것인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 김지녀 시인의 말씀대로, 저는 1973년에 데뷔했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벌써 41년이나 되었네요.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시인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등단 후 지금까지, 시를 향한 저의 한결같은 물음은 ‘시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 질문은 등단 시절에도 절실했지만, 지금도 여전합니다. ‘시란 무엇인가?’ 이것이 제 평생의 화두입니다. 저의 시 쓰기는, 그러니까 질문에 대답을 마련하려고 노력해온 과정이겠지요. 물음으로 시를 받아들인 일생이 거쳐온 필연과 같은 것입니다. 물음이 주체의 진심에 사무치도록 절실하다면, 시적 각성 또한 그만큼 커지겠지요. 시로써 지니게 된 나름대로의 미학이 있다면, 불우와 부재를 견디려는 견인적인 세계에의 이끌림입니다. 저는 시를 마치 불가사의한 질문을 먹고 사는 불가사리(?)쯤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몰락을 견디는 시 쓰기, 그 끝에는 필경 죽음이 도사리고 있겠지요.

저는 시인뿐 아니라 인간적인 덕목으로, 네 가지를 꼽고 싶습니다. 용기, 독립심, 상상력, 감수성. 시인을 두고 말할 때 ‘용기’는 창신(創新)에 투신하려는 무모함을 부추기고, ‘독립심’은 나와 남의 차별성, 곧 개성을 키우고, ‘상상력’으로 미래의 밭을 갈며, ‘감수성’으로 세상의 갈등을 끌어안습니다. 그리하여 시 쓰기는, 이 네 가지 집중된 힘들을 한데 모아 주어진 숙명과 마주 서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 염원의 전경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자신에게 되묻습니다. 창신에 투신하려는 무모한 용기를 지녔는가. 나와 남을 구별하는 독립심이 맹렬한가. 미래의 밭을 풍요롭게 가꿀 만큼 상상력이 넉넉한가. 세상과의 불화를 씻을 만큼 감수성이 예민한가. 이런 자문(自問)에서 고개가 끄덕거려질 만큼 납득되는 품성이나 경과가 제게는 살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김수영식으로 말한다면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생활의 극복〉 《김수영 전집》 2권, 93면)가 반성이라면, 저의 오랜 소망과 자성(自省)은 이제 낡아 버린 것인가요?

 

 

아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를 여전히 진지하게 묻는 선생님 말씀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특히 불우와 부재를 견디는 주체의 각성이 크게 드러나는 시를 추구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 동두천을 이야기 안 할 수 없을 듯합니다. 동두천이라는 시집이 준 감동 때문이겠지만, 선생님의 시적 출발을 김현은 더러운 그리움으로 명명하였고, 이후의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시를 그 표현 속에서 이해하곤 했습니다. 특히 그리움의 대상으로 어려웠던 유년 시절, 동두천과 월남전의 경험, 바다, 가족 등이 주목되어 왔지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시적 관심의 변화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년의 기억’ ‘바다’ ‘가족은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며 선생님의 시를 견인해 왔던 중요한 기제들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등단하신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더러운 그리움이라는 말이 어떻게 들리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영동의 한적한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 삼율리가 제 고향입니다. 옛 강원도 땅이지요. 태백산맥이 외줄기 해안선을 따라가며 동해와 경계를 맞댄, 7번 국도의 어름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입니다. 한낮이 기울면 어느새 산 그림자가 해안선을 덮어버려서, 사람도 땅도 척박한 생존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곳, 어릴 때 살던 집에서 보면 긴 해안선이 반짝이는 은모래밭을 끌고 십 리나 펼쳐져 있어서, 수평선의 눈금 안쪽으로는 언제나 출렁이는 파도와 가파른 산맥으로 아뜩했습니다. 자각되기 시작하면서 저의 시야에 펼쳐진 것은 온통 바다였습니다. 바다야말로 저에게는 추동의 공간이자 침강의 공간이었으며, 열린 공간이자 닫힌 공간이었습니다. 일망무제의 수평선은 제가 그곳에 갇혀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망망대해 너머 무엇이 있어 나를 기다리는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운명을 궁금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다는 경계 이편의 실존을 끊임없이 확인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가없는 그리움과 탈출에의 욕망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덧 저의 무의식으로 자리 잡았고, 뒷날에는 제 시의 지배적인 상상력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특히, 6·25 전란으로 가족의 절반이 총살당하거나 전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했고, 그 가세를 견디면서 성장기를 보냈던 저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심층심리가 더러운 그리움이라는 모순형용의 표현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릴 적 고향 바다는 저에게 경계인이라는 자각을 뼈저리게 했습니다. 자라면서 저는 늘 제가 선 자리에서도 비켜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둘러보면 언제나 궁핍한 둘레를 맴도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그리움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저의 성장기에 형성된 어떤 세계관, 곧 벗어남과 끌어당김이라는 서로 길항하는 의식을 구체화하는 어사(語辭)이기도 한 것입니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정한(情恨)의 의식 같은 것, 그 그리움을 일깨우는 어떤 명명이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겪은 시간을 들으니 숙연해지고, 그래서 그 더러움속에서 경건함이 느껴집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선생님은 시인이 꿈이 아니셨던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시인이 되신 계기랄까, 선생님의 습작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세

 

성장기에 저는 추호도 시인이나 문필가가 되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징어 배나 타서 뱃사람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했죠. 집안이 워낙 피폐했으니까. 이렇게 가난하게 살지는 말아야지, 그런 다짐을 줄곧 했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생업을 결정해 보려고 오징어 배를 탔다가 뱃멀미로 죽을 만큼 고생하고, 공부를 해보자고 결심했을 때, 제 꿈은 의사였지요. 그런데 집안 형편상 제가 공부를 한다 해도, 뒷바라지해줄 형편이 되지 못해서 갈등했습니다. 궁리 끝에 고등학교 3학년 늦가을, 동급생이었던 이종사촌 형을 꼬드겨 서울로 함께 도망을 쳤습니다. 집에 있어봐야 희망이 없었으니까. 이모님 댁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와서 보니 숭인동 절벽 위 판자촌에 사시는 거예요.

갖은 고생 끝에 의과대학에 입학시험을 쳤습니다만 떨어졌지요. 이모부님이 시골로 내려가려는 저를 붙잡아 2차 시험을 보게 하셨는데, 그게 바로 제가 다닌 학교였습니다. 시험을 치고 저는 시골로 곧장 내려갔습니다. 며칠 뒤 신문 호외를 들고 담임선생님께서 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그 대학 국문학과에 합격하였다는 거예요.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서울에서 떠돌던 서러운 일들이 왈칵 떠올라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지요. 사흘 동안 밥도 안 먹고 울다 자다 그랬지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쟤가 학교에 못 가서 저런가 보다 생각하셨나 봐요. 어머니께서 등록금을 마련해주려고 백방으로 동분서주하셨지요. 그때 마련해주신 입학금을 보자기에 둘둘 말아 배에 차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으니, 제가 국문학 같은 그런 공부에 몰두하고 싶었겠습니까?(웃음)

교실 뒷자리에 앉아서 재수나 한답시고 딴청을 피우며 한 해를 보내다가 건강까지 해치고, 학교에 계속 다닐 형편이 못 되어 포기하려고 했지요. 1학년 말이었는데, 친구 집에 한 열흘 묵으면서 닥치는 대로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기를, 이게 나한테 주어진 숙명이라면 부딪쳐봐야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가까스로 2학년에 등록을 했는데, 그때 시와 우연히 마주친 것입니다. 조지훈 선생님이 시론을 담당하셨는데, 와병 중이시라 수업은 휴강이고, 대신 리포트를 과제로 부과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요약하는 것, 선생님 쓰신 시론 책을 노트 정리하는 것, 자작시 5편을 제출하는 것이었어요. 자작시를 쓰면서 저도 모르게 시에 몰입되었지요. 그러고 보니 비교적 늦게 시작한 습작기였습니다. 시를 모르니,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학기가 끝난 다음에도 계속 시를 쓴 것은, 아마도 시라는 양식이 저를 표현하는 데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까닭이겠지요. 습작을 누구에게든 평가받고 싶었으나, 아는 시인이라고는 조지훈 선생님밖에 안 계시니, 선생님 돌아가시던 그해 봄까지 2년여를 두고 댁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습작 시를 두고 오면 몇 군데 첨삭만 해주시는 기묘한 첨삭지도를 그때 받았지요. 그러고 보니 그 시절 습작기에 수많은 시들을 필사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마도 수백 편의 시편들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시를 연습했지요.

시인이 된 과정이 한 편의 소설을 읽어주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시집 얘기를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첫 시집인 동두천이 선생님께서 반시의 선언문에서 밝히신 대로 삶과 부합하는 시로서 뜨거운 열정과 고민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 후로 두 번째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가 나오기까지 꽤 오래 걸린 걸로 압니다. 자서에서 동두천이후의 9년이 새삼 참담하게 여겨진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했는데, 그 당시의 고민과 다시 시를 쓰시게 된 계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데뷔한 지 6년 만에 첫 시집인 동두천을 펴낼 수 있었습니다. 첫 시집 동두천은 제 고향 영동의 자연과 그 속에서 부유(浮游)했던 성장기의 쓰라림, 그리고 전란의 후유증,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나 시대의 굴곡 등을 각인시켰던 시집입니다. 그러니까 동두천연작과 영동행각등은 실존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이 내지른 저의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극복하고 싶었던 저의 열망이 반영된 시집이 동두천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첫 시집을 펴낸 뒤로 저는 몇 년간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펼치는 사랑과 접히는 마음사이의 갈등이 너무 커서 차라리 시 쓰기를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시기였습니다.

초년의 교수로 대학에 자리 잡았던 1980년 이후, 저는 제대로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자로서나 현실을 견뎌보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십 년 가까이 담을 쌓고 지냈던 시를 다시 써보려고 결심했지요. 처음 습작할 때보다 몇 곱절 어려움을 겪으면서 회복기를 가졌고, 마침내 두 번째 시집 머나 먼 곳 스와니를 상자(上梓)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머나먼 곳 스와니10년 가까운 시차에도 불구하고, 동두천의 주제를 반복한 시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덧난 상처가 무엇인지, 그것들을 발견하고 다스려보려 발버둥 친 이 시집을 펴내자마자, 저는 교환교수로 일 년간 미국에서 체류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인이 공백기를 갖는다는 것, 슬럼프에 빠져서 몇 달 정도를 쉰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몇 년을 휴업한다는 건 용납이 안 됩니다. 제가 뼈저린 경험을 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는 쉬지 말고 꾸준히 써야 합니다.

,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뼈저린 경험 때문인지 머나먼 곳 스와니이후 선생님께선 꾸준히 시작 활동을 하셨습니다. 작년에 나온 여행자 나무가 열 번째 시집인데요,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지만, 특히 더 아픈 손가락(시집)이 있으신지요?

시집을 낼 때마다 제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불구의 자식이 한층 마음 저리게 하듯, 어딘가 부족함이 많아서 더 애틋하게 생각되는 시집이 두 번째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입니다. 못난 자식에게 관심이 더 가는 법이지요.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저는 제 삶의 고투가 오롯이 남아 있는 그 시집이 늘 새삼스럽지요.

한번 둔화된 시의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신 모습이 습작 시절의 선생님 모습과 겹쳐지는 듯합니다. 언제나 시인이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시를 읽을 때는 많은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얼핏 선생님의 시는 일상어로 쉽게 쓰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문장이나 행간의 운용이 매우 치밀하고 사용되는 단어들이 마치 사전에서 찾아 쓴 단어처럼 매우 정확하게 제 위치에서 빛나고 있어 시적 사유의 견고함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의 언어 운용에서 가장 중시하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시는 방언으로, 더 좁혀서 말한다면 개인의 방언으로 기록되는 세계입니다. 유종호 선생님의 어투로는 부족 방언의 순화에 기여하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시는 번역하기에 적합한 언어가 아닙니다. 시는 제 나라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언어체계를 갖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방언인 시가 대중에게 고루 전파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지요. 제 시가 유난스럽게 리듬이나 시어에 몰두하고 있다면, 아마도 언어를 믿고 거기에 집중해보려는, 곧 부족 방언을 체화하려는 저의 의욕이 큰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가 단숨에 써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수도 없이 제 시의 리듬을 혼자서 되뇌어봅니다. 제 나름의 리듬을 지켜내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시인이 낱말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것처럼, 시는 그렇게 자기의 언어로 저의 미학을 드러내는 세계라고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언어)에 대한 진지함과 관련해 유종호 평론가는 선생님의 시를 만연체의 견고한 어조라고 평했고, 황동규 시인께서는 선생님의 시가 무겁다고 평하면서, 그 이유를 경험의 구체성과 결부된 사유의 깊이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시가 무겁다는 평가를 받으실 때의 마음이 어떠셨는지 혹 발랄하고 기발한 시에 대해 써 보고 싶지는 않으셨는지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반성하는 것이지만, 저는 제 시가 좀 과격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가 과격하다는 것은 무모함이나 파격을 용납한다는 뜻이겠지요. 시의 비상한 창조성은 주어진 여건을 타파하며 전복을 꿈꾸는 시인의 불온한 태도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거기에서 신천지를 헤쳐나가려는 시인의 고투가 읽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무난하게만 시를 써온, 지나치게 온건한 시인이 아니었던가 반성이 됩니다. 생생한 존재감이 독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랐지만, 저는 그것을 심미적 현실로만 전달하려고 노력했지, 불온한 개혁으로까지 몰아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마주친 삶의 풍경 앞에서, 저는 주장하는 시가 아니라 보여주는 시를 줄곧 기다렸던 셈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젊은 시인들의 시가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데요, 저희는 선생님의 재기 넘치는 시들을 영영 볼 수 없는 것인가요?(웃음)

우선은 제가 달라져야겠지요. 시인은 누구나가 달라지려는 노력과 그 결과를 향한 그리움을 안고서 시를 쓰는 것이니까. 아마도 달라지려는 염원만큼 과격한 모험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겠지요. 제가 모험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충분히 모험이 가능하십니다.(웃음) 시를 읽다 보면요, 국내외를 비롯해 많은 곳을 다니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에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거나 관조하는 시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게 낚시 취미와도 관련되는 것도 같습니다. 시에 바다나 낚시 이야기도 자주 나오지만 특별히 낚시를 즐기시는 이유를 여쭤봅니다.

없습니다.(웃음) 바닷가에서 태어났으니까, 어릴 때부터 갯바위에 서서 낚시를 했던 기억이 그 추동력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데 낚시를 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합니다. 낚시는 매우 고된 노동입니다. 제 몸은 그야말로 견딜 수 있는 극한까지 떠밀려 갑니다. 그러고 나면 한 이틀 끙끙 앓게 되는데, 앓고 나면 낚시 생각이 당분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심신이 쇄신되지요. 제가 갱신된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2주쯤 지나면 낚시 생각이 또 간절해집니다. 살육에 관한 죄책감만 없다면, 저처럼 잡념이 많은 사람이 자기를 씻어내는 방법으로 선택할 만한 취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농담 삼아 드리는 말씀인데, 오징어는 잡지 않고 좋아하시지도 않으시겠어요?(웃음)

, 오징어를 한동안 먹지 않았습니다.(웃음)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와 함께 고생스럽게 오징어 건조를 했던 기억 탓입니다. 옛날 오징어는 다리가 여덟 개밖에 안 됩니다. 건조해서 파는 게 생계니까, 오징어를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지요. 덜 마른 오징어는 다리 양쪽에서 하나씩 떼 내도 흔적이 없어, 열 개였던 다리가 여덟 개만 남지요.(웃음) 오징어 건조에 쓰라리기만 했던 그때의 일들로 오징어에 신물이 납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이라는 공간 못지않게 을 떠나는 상황이 자주 등장합니다. 떠남과 돌아옴의 과정, 즉 여행이 시나 삶에 어떤 새로움(변화)을 주는지 혹은 주었는지 여쭤봅니다.

인간은 생존의 거처로 집을 세우고, 그 반경을 넓히면서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넓게 보면 인생이란 것도 한 거처를 떠나 다른 거처로 이동해 가는 긴 도정 위에 세워집니다. 따라서 사람살이의 근거인 집과 길, 곧 거소(居所)와 행려(行旅)야말로 서정시의 태반(胎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과 집을 이어주는 것이 길이라면, 집과 길이야말로 한 인간이 살아내는 시간과 경험의 집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출발에서 도착에 이르기까지의 자초지종과 순간순간 변전하는 풍정(風情)들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집과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져서, 헤아리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합니다. 그러나 집과 길 속에 출발과 도착이 있으므로, 그것을 헤아리는 것 또한 인간의 숙명입니다. 제 시는 바로 집과 길 위의 천변만화에 바쳐진 시편들입니다.

, 지금의 말씀으로 선생님의 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앞서 젊은이들의 시가 부럽기도 하다고 하셨는데, 시를 쓰는 젊은이에게 당부나 격려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인에게 시적 주장은 작품을 통해 제출되어야 합니다. 주장은 작품을 통해 미학적 근거를 확보하고, 세계관으로 전파되는 것입니다. 독자들도 미학적 주장으로, 또는 세계관으로 시를 읽습니다. 그렇게 해서 작품을 둘러싸고 시인과 독자는 서로의 간극을 메워가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실재(實在)하는 세상과 작품의 현실은 언제나 어긋나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폭넓은 소통이 필요하게 됩니다.

소통이라는 것은, 알리고 알려는 노력만큼 향상되는 까닭에 소통의 도구, 곧 언어를 질료로 삼는 시의 세계에서 쓰기의 주체인 시인들은 독자들과 소통이 되는 방언을 활용해 시를 지어야 합니다. 시인이 독자들을 숫제 외국인으로 취급한다거나, 독자들이 제 나라 방언이라면 무엇이든 다 알고 이해한다는 듯이 착각한다면, 그래서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젊은 시인들의 시가 숫제 이해되지 않거나 저희끼리만 소통된다면, 일차적으로는 시인과 독자들은 메울 수 없는 경험의 차이를 지니게 되고, 마침내는 서로 다른 방벽을 세워 서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세대 차, 방언의 차이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입장인가 하면, 시인과 독자는 어느 정도 서로의 이해를 돕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잘 새겨 앞으로 저를 비롯한 젊은 시인들이 소통의 문제에 더 마음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직도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다(여행자 나무)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생님의 시는 비루한 기억의 재생이든 사소한 현실과 밀착된 정서이든, 앞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로 구체화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어떤 시()를 모색 중이신지요?

생각해보면, 시의 감동이란 것이 자기만의 시간을 제대로 겪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열망 속에서 구체화되는 사건입니다. 한 사람의 고유성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간절한 희구 속에 펼쳐지겠지요. 때문에 시의 열망 또한 시인이 간절히 염원하고 소망하는 어떤 긴장이나 진정성과 관계합니다. 이 긴장과 진정성이 독자에게도 가식 없이 전달될 때, 우리의 시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완성을 꿈꾸지요. 그러나 완성되는 인간의 신화가 어디 있습니까? 끝끝내 그리워할 뿐 마침내 도달하지 못하는 완성을 간직하는 데서 인간의 비극이 잉태됩니다. 어떤 종착이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미지를 걷는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로새기는 시는 그 길 위에서 마주치는 가장 단순한 이야기, 말하자면 신화나 설화 같은 것, 어떤 원형질을 부조(浮彫)하고 싶습니다. 어떤 덩어리가 저를 더 생생하게 옥죄길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 발표하실 시와 시집, 기대하겠습니다. 자 그럼, 김명인 선생님께 궁금하신 점 있으신 분들 있으시면 편하게 질문해 주십시오.


청중과의 대화

정원도 시인: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는 정원도입니다. 제가 선생님의 동두천을 처음 접한 게 포항공단에 있을 때입니다. 제가 시인이 되고 얼마 전 두 번째 시집을 내게 된 계기가 동두천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은 제가 20대 초반에 동두천을 읽었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그 시집이 있기 전에 롤 모델이 될 만한 시인이나 시집이 마땅치 않았을 텐데요, 선배 시인들 중에서 어느 분이 동두천의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 《동두천의 롤 모델이 있었느냐는 질문 같은데, 글쎄요. 발표 당시에, 이야기가 생생한 시라면서 어떤 분이 제 시를 백석의 시와 관련지웠던 평가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실상은 제가 백석의 시를 읽은 것은 시집이 나온 뒤였던 1982년이었어요. 제가 좀 무식했거든요. 이야기 시라면 데뷔하기 전에 신경림 선생님의 을지로 6를 읽고서 아, 이런 식으로도 시를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저의 데뷔작 출항제는 바다를 펼친 시지만, 이야기 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덕분에 첫 시집에서 제외되었지요. 데뷔 몇 해 뒤 의기투합한 시인들과 반시라는 동인운동을 하면서, 시대의 요청에 호응하는 시를 써보려고 했지요. ‘반시는 그야말로 시대정신을 생생하게 표출한 동인운동이었습니다. 그때의 작품들이 모여서 첫 시집으로 상자된 것이지요. 동두천4에 제가 쓴 글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겪은 것만 쓰겠다라는 주장과 진정성(眞正性)’이란 표현을 거기에 썼지요. 시대가 시집에 표집(標集)되었다고 대답할까요?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말씀하셨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동두천이 얼마나 대단한 시집인가 또 김명인이란 시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긴 시간 뜻깊은 이야기 전해주신 김명인 선생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유심 토크 [73호] 2014년 05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