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어떠한 환경이나 속박, 그리고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않는 것이다.
- 루키우스 세네카(로마의 철학자)
[출처- 구글 freedom of expression]
나는 포리송사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말했을 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프랑스에서 선생님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위험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진의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포리송 사건’은 꼬리표처럼 선생님을 끈덕지게 따라다닙니다. 어쨌든 1979년 프랑스 대학교수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하고
(1), 그때 쓰신 <표현의 자유를 위한 몇 가지 기본적인 제언>이란 글을 로베르 포리송이 1980년에 발간한 책의 서문으로 사용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2)
(1)
당시 리옹 2대학의 문학 교수이던 로베르 포리송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고, 모두가 독일의 일방적 악행으로 인정하던 쇼아Shoah를 상대적 반응으로 분석한 글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나눠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진실을 위하여>라는 복사물에서 “이른바 대량학살 기도와 가스실은 전쟁의 선전술이 만들어낸 조작물일 뿐이다. 이런 조작 뒤에는 유대 민족주의의 음모가 감춰져 있다. 히틀러는 종족과 종교를 이유로 단 한 사람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히틀러에게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다행스럽게도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 부분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촘스키에게 전달된 자료는 이처럼 명시적이지 않았다.
(2) <나를 역사의 왜곡자로 비난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글 – 가스실의 문제>라는 책에 촘스키의 글이 서문 형식으로 실렸다.
― 나는 그 글을 로베르 포리송이 발표한 책의 서문으로 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20여 년 전 프랑스에는 그렇게 알려졌지만 말입니다. 나는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선언이란 관점에서 그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포리송이 가스실의 존재에 대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이유로 쏟아진 비난을 벗어나려고 쓴 ‘변명의 글’에 포리송의 편집자가 일종의 ‘견해’ 형식으로 내 글을 실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는 포리송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습니다만, 제목만으로도 가스실의 존재에 대한 글이란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탄원서도 내가 끊임없이 서명해온 다른 탄원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베르 포리송에게도 신체적 안전을 보장해주고 공민권의 자유로운 행사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탄언서는 십중팔구 해당 국가에서 매우 극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만, 정작 서명자들은 그런 사실을 거의 모릅니다. 내가 포리송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탄원서가 내 이름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서명자가 있었는데요. 게다가 나는 그 탄원서의 발기인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 탄원서는 포리송의 글에 담긴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다만 포리송도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의례적인 탄원서였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데, 그 내용을 검토할 이유는 없습니다. 공격당한 사람의 신념을 두고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따름입니다.
― 선생님이 그 탄원서에 서명하자,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에르 비달 –나케(3)는 포리송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선생님에게 알렸다고 말하던데요.
(3) Pierre Vidal-Naquer(1930~2006). 프랑스 사회과학 분야의 고등연구기관 책임자이자 저명한 역사학자이다 -옮긴이
― 맞습니다. 피에르 비달-나케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포리송을 반유대주의라고 생각하는 이유와 그 근거까지 제시했습니다. 나는 비달-나케의 비난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내 선언에서 비달-나케의 편지를 인용하기도 했지만 그 출처까지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비달-나케는 자신의 충고가 무시되었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그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포리송이 실제로 반유대주의자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정말로 신나치주의자라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표현의 자유까지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 표현의 자유는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는 권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대한 비난이 빗발칠 것이란 사실까지도 내 글에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내게 쏟아진 비난들을 달갑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의 비난은 아니었습니다.
― 피에르 비달-나케의 편지를 받고서도 선생님은 원래의 입장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까?
― 솔직히 말해서 나는 포리송의 됨됨이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심지어 포리송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매일 숱한 사람들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모릅니다. 인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라 할까요?
비달-나케의 편지가 내 생각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향을 미쳤더라도 아주 미미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 편지를 받기 전까지 나는 포리송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편지를 받은 후에도 내 판단에는, 비달-나케의 집요한 비난과 완벽하다는 자료가 포리송을 반유대주의자라고 단정지을 만한 증거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 내가 썼던 글에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포리송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 특별히 알고 싶은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서명한 수많은 탄원서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요. 나는 이란과 모스크바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탄원서가 제출되었을 때도 서명했습니다. 정권의 분노를 산 정치인들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까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포리송 사건에서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표현의 자유였습니다. 포리송이 어떤 글을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하며 역사를 왜곡한 사람까지 옹호할 필요가 있냐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능욕당한 사람들이 글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널리 알리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생각이 철저하게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 포리송처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내가 당신에게 말해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심도 있게 분석해볼 만한 현상입니다. 나도 나 나름 포리송 사건을 조금이나마 추적해보았습니다. 포리송이 문제의 글을 발표한 후 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 말입니다. 만약 파리의 지식인들이 포리송을 떠들썩하게 비난하지 않았다면, 포리송이 잠시나마 교수직에서 정직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역사의 왜곡’이란 죄목으로 기소되지 않았다면 파리 사람들이 포리송이란 이름을 알 수 있었을까요?
어쨌든 내가 포리송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근본적인 권리가 중대하게 침해당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나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탄원서나 선언에 주저없이 서명해 왔습니다. 포리송 사건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가 될 법한 사건들도 있었지만 나는 탄원서의 인물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문명의 근본원리를 지키고 공민권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하지만 선생님의 글 중 하나가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1980년에 발표한 <표현의 자유를 위한 몇 가지 기본적인 제언>에서 선생님은 “전해 들은 대로 포리송의 글을 판단하건대 포리송은 상대적으로 비정치적인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 전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내가 말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글에서, 나는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포리송이 진실로 나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더라도, 그 이유로 표현의 자유까지 침해당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괴벨스와 즈다노프(4)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드는 표현만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4)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즈다노프Andrei Alexandrovich Zhdanov(1896~1948)는 1947년 코민포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주장, 20세기 냉전 시대를 선포했다 –옮긴이
물론 포리송과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려고 내가 서명한 수많은 탄원서들의 주인공에게 쏟아진 비난들에 대해 조사해볼 생각도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기본적인 이치만을 주장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파리 지식인들이 이 문제를 지금까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당신 질문에 대답해볼까요? 그랬습니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썼습니다.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글을 썼을 때, 신나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옹호한다는 비난이 대단했습니다. 물론 그런 비난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난을 하려면 뚜렷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포리송의 비난에 앞장서고 그에 대해 완벽하게 조사했다는 비달-나케가 보내준 증거들을 나는 면밀하게 검토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증거들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내가 합리적으로 내릴 결론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포리송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포리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언론에 보낸 몇 장의 편지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포리송은 그 편지들에서 나치에 대항해 싸운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이 문제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까?
― 프랑스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내 입장 표명이 그런 신경질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모양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응을 프랑스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노동당 당보의 편집장이 포리송의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서 짤막한 글을 써 보냈습니다. 그들은 내 글을 당보에 커다랗게 실었습니다. 그 후 편집장은 내 글로 모든 논쟁이 끝났다며 앞으로도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그 이후로 이 사건은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끝없이 망치질해대는 광신자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밥벌이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파리와 파리의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겠습니까?
― 그렇게 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 시대부터 그들은 레지스탕스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아왔으니까요.(5) 프랑스인들은 이제부터라도 레지스탕스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종전 이후로 프랑스는 많은 점에서 폐쇠적이었습니다.
(5) 촘스키는 프랑스의 지도층이 나치의 협력자들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레지스탕스 운동만을 강조하기 위해 비시Vichy 정부를 꼭두각시로 전락시켰다고 말하는 듯했다.
― 예를 들면 어떤 분야에서 그랬습니까?
―1930년대부터 빈의 논리실증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논리실증주의를 모르는 나라가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1930년대의 글이 1980년대에야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 프랑스 학자 덕분에 말입니다.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닙니까?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독일 철학자들은 일찌감치 프랑스에 소개되었지만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코제브(6)와 같은 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소비에트 강제 노동 수용소를 예로 들어볼까요? 1950년에 전 세계, 적어도 서방세계는 굴라크guiag (사상, 정치범의 강제 노동 수용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솔제니친(7)의 책이 서방세계에 소개된 것은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그 때문에 과거에는 몰랐던 대단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솔제니친의 책들은 일종의 계시였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지식인들은 앞다퉈 그 공로를 차지하기에 바빴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30년이나 뒤처졌으면서 말입니다.
(6) Alexandre Kojeve(1902~1968). 1933년부터 파리 고등연구원에서 헤겔Hegel의 ‘정신현상학’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조르주 바타이유 Georges Bataille, 레몽 아롱Raymond Aron, 자크 라캉Jacques Lacan,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등이 이 세미나를 통해 독일 철학자 헤겔의 저작물을 알게 되었다. 코제브는 역사의 궁극적 목표는 이성과 자유의 도래라는 ‘역사적 종언’에 대한 헤겔의 이론을 프랑스에 확산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7) 솔제니친(1918~2008).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962)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으며,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당국의 탄압으로 <암병동Rokovy korpus)등의 대표작들이 국외 출판되고, <수용소군도Arkhipelag Gulag> 국외 출판을 계기로 1974년 강제 추방당했다. 미국에서 살다가 소련 붕괴 후 러시아로 돌아갔다 - 옮긴이.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생물학입니다. 서방 세계에서는 20년 전부터 수용 여부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모든 선진국에서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프랑스만은 예외였습니다. 이 연구가 한창이던 시대에 프랑스 생물학자의 상당수가 다윈 이전 시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 생물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노(8)의 공로였습니다. 프랑스 현대 생물학이 자크 모노의 조그만 실험실에서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프랑스를 엄청나게 공격하시네요.
프랑스는 에릭 홉스봄이 번역되어 소개되는 데에 엄청난 시간이 걸린 유일한 나라입니다.(9)
프랑스는 철학과 문학, 그리고 일부 과학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땅이었습니다. 지금도 상당히 폐쇠적인 나라입니다. 지식인들이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나라입니다. 물론 파리의 지식인 중 소수만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제3세계, 마오쩌둥주의 등 모든 것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하찮기 그지없는 것들을 신화처럼 꾸며댑니다.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독단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 선생님의 방금 예로 드신 에릭 홉스봄의 책은 결국 출간되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프랑스 국민도 일부는 다른 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 대중은 그렇습니다. 지식인들이 아주 교묘하게 끼어들어 방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경향이 다른 나라보다 전후 프랑스의 지식인 계급에서 유독 눈에 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8) Jacqus Lacien Monod(1910~1976). 프랑스의 생화학자. 세균의 유전 현상을 연구, 효소 합성을 제어하는 유전자 존재를 확인하고, 구조를 해명한 오페론설을 주장했다. 196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으며, 생명 발생의 우연성을 주장한 (우연과 필연;1970)은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옮긴이.
(9) Eric Hobsbawm(1917~2012). 영국에서 1994년 출간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 짧은 20세기, 1914~1991)는 출간 즉시 전 세계에 번역 출간되었지만 프랑스에서는 1999년에야 출간되었다. 홉스봄은 프랑스어 판 서문에서 대형 출판사의 소심증과 파리 지식인 계급의 고집스러운 반反마르크스주의를 꼬집으며, 그의 이전 저서들은 프랑스에서도 다른 곳과 거의 같은 시기에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이 뒤늦게야 번역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42~54쪽 中
노엄 좀스키(Avram Noam Chomsky)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 2세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진학한 뒤 언어학자 젤리그 해리스르 만나면서 언어학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의 특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MIT에서 1958년(30세) 부교수, 1961년(33세) 종신교수, 1966년(48세) ‘인스티튜트 프로세서Institute Professor(독립적인 학문기관으로 대우하는 교수)’가 된 그는 지금까지 논문 1,000여 편과 저서 100여 권을 발표했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 혁명의 주역으로서 명성을 누리는 데 머물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해왔다. 1967년 <지식인의 책무>를 발표하면서 세계 지식인들의 양심에 경종을 울린 그는, 여든 살을 넘긴 오늘날까지도 시대의 양심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또한 세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와 미국의 제국주의, 자본의 언론 장악과 프로파간다를 신랄하게 파헤친다.
주요 저서로는 <촘스키, 知의 향연> 외에도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비밀, 거짓말 그리고 민주주의>, <공공선을 위하여>,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전 3권), <촘스키 사상의 향연>, <촘스키, 고뇌의 땅 레바논에 서다>,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숙명의 트라이앵글>, <지식인의 책무>, <여론조작>, <통사 구조>,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 등이 있다.
“양식良識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
-노엄 촘스키-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노엄 좀스키, 그가 미국의 세계 지배 음모, 지배 권력의 속성, 지식인과 여론조작,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메커니즘 등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은행가들의 권력, 중앙은행의 비정상적인 자율성, 금융과 경제의 과점 현상, 경제적 이득 때문에 외교적 해법보다 전쟁을 앞세우는 현상, 미국의 테러리즘, 다국적기업의 감춰진 전략과 새로운 역할, 선전 도구로 전락한 언론, 민주주의에서 지식인의 역할, 눈을 크게 뜨고 정보를 수집해야 할 필요성. 언론 보도에 속지 않고 우리의 양식에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140204-20230817 타이핑 채란
타이핑 -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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