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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엘리엇을 기리며 

미송 2014. 9. 2. 08:05

 

 

T.S. 엘리엇을 기리며

- 창립 20주년 기념 한국 T.S. 엘리엇 학회

 

 

이스트 코커("East Coker")1  

 

 

저 넓은 들판에서

너무 가까이만 가지 않는다면,

여름날 한밤에, 가냘픈 피리와 작은 북소리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닥불 주변에서 춤추는 것도 보일 것이다

남녀가 한데 어울려

춤추는 그 모습은 결혼을 의미하는

장엄하고도 만족스러운 성례식

쌍쌍이 필연적으로 결합을 이루며

손을 맞잡고 팔을 끼고 있으니

그것은 화합의 징조를 나타낸다 모닥불의 둘레를 돌고 돌며

불길 속을 뛰며, 원과 원을 그리며

촌스럽게 엄숙한 표정을 짓거나 촌스런 웃음소리를 내며

볼품 없는 구두 신은 무거운 발을 쳐들고

소박한 기쁨 속에 흙발, 진흙발을 쳐든다

그것은 오랫동안 땅 밑에서 곡물을

살찌게 한 자들의 기쁨, 박자를 맞추고

리듬을 맞추어 춤을 춘다

마치 생동하는 계절을 맞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계절과 성좌의 시간이 

남녀의 교배와 짐승들의 교배의

시간이 그렇듯이, 발이 올라가고 또 내려오고

먹고 마시며, 똥과 죽음.

 

시인은 여기서 16세기 영국의 들판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요정의 나라처럼 묘사하고 있다. 마치 음악이 가미된 한 폭의 즐거운 영상 장면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여름밤 들판에서 처음에는 가냘픈 피리와 작은 북소리가 들리다가, 이윽고 수많은 남녀가 쌍쌍이 짝을 지어 서로 손과 팔을 맞잡고 박자를 맞추면서 모닥불의 주변을 원을 그리즛 빙빙 도는 난무의 장면을 연출하고, 때로는 기쁨에 넘쳐 볼품없는 구둣발을 쳐들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너무 가까이만 가지 않는다면" 이라는 경고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요정의 나라를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접근하면 요정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들의 진흙 발은 오랫동안 땅 밑에서 곡물을 살찌게 하다가 죽어간 조상들의 기쁨과 박자를 재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시구를 읽고 있는 우리가 마치 춤추는 현장에 가 있는 것 같은 환각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엘리엇의 시적 기교에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적절한 시각적 심상을 동원하여 박진감 있는 장면을 부각시키는 솜씨도 비범하거니와, 이에 못지않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육체적 움직임의 리듬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하여, 시의 원문에서 운율법의 고정과 일탈을 적절히 병용함으로써 각별한 효과를 내고 있는 시적 음악성도 깊이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겠다.   

 

(하략)

 

 

드라이 샐비지즈("The Dry Salvages") 

 

나는 신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러나 나는 강은 강력한

갈색의 신이라고 생각한다 -퉁명스럽고, 길들지 않고, 고집센,

참을성이 조금은 있는, 처음에는 미개척의 영역으로 생각되었고,

상업의 수송 수단으로서 쓸모는 있었으나,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다만 교량 건설자가 직면하는 골치걸이가 되었을 뿐이다

일단 그 문제가 해결되자, 그 갈색의 신은 도시의 주민들로부터는

거의 망각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달래기 어려운

철따라 분노를 드러내는 파괴자이며, 인간들의 잊고자 원하는 일의 

상기물(想起物)이 되고 있다 기계의 숭배자들로부터 존경도 받지 못

하고, 아첨도 받지 못하고, 다만 기다리며 지켜보며 기다린다

강의 리듬은 아기들의 침실에 있었고

4월의 앞마당 우거진 개가죽나무들 속에 있었고,

가을 식탁에 오른 포도 향기 속에 있었고

겨울 밤 가스 등불 아래 둘러앉은 저녁 모임에도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강은 엘리엇의 출생지인 세인트 루이스시의 가운데를 흐르는 미시시피강이며, 엘리엇이 어렸을때 이 강을 바라보면서 자랐다는 사실을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지적되고 있다. 실로 강이란 신비스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큰 강변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가며, 자기는 무엇하는 존재인가 하는 따위의 평소에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문제를 놓고 한 번쯤은 사색에 잠기는 법이다. 강은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신비스런 힘을 가졌으니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도 폭풍이 불고 홍수가 나면 강은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인간이 쌓아놓은 공든 탑을 단숨에 파괴하고 허무로 돌아가게 만든다. 따라서 강은 또한 강력한 갈색의 신이기도 하다.  

 

(하략)    

 

한국외국어 대학교, 최종수 <내가 좋아하는 엘리엇의 들판과 강의 시> 중에서.

 

 

*

 

내게 주어진 질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T.S. 엘리엇 자세히 읽기를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왜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 엘리엇의 연구가 나의 시작(詩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일 것이다. 금번의 기회는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연구해오던 엘리엇과 나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질문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며, 궁리해낸 몇 가지의 대답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도 얻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에게도 다소 충격적인 대답이지만, 개발 독재의 상황 속에서 당황하고 있던 대학 초년생에게 T.S. 엘리엇이 '아버지가 없는 시대의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다는 주장에 대한 설명이 이처럼 짧은 글에서 충분하게 제시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본인의 시 한편, <울지 않았다>를 인용한다.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동생이 울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그런데 안 울었다고 동생이 울었다 울지 않았다 나는 울 수 없었다 나는 자기 연민을 싫어한다 나는 자신이 불쌍하지 않다 동생이 말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잤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울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동생이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울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이 불쌍하지 않았다 동생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울지 않는 자신이 불쌍하다고 울었다 나는 불쌍하지 않았다 동생이 불쌍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과 같이 울지 않았고 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아버지와 함께 울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불쌍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이 불행인지 행복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울 수 없었다 나는 결국 모를 것이다 우는 것이 불행인지 울지 않는 것이 불행인지 우는 것이 행복인지 울지 않는 것이 행복인지 나는 결국 모를 것이다 동생이 울었다 동생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처럼 그는 모를 것이다 헤어지면서 그가 웃었다 우는 눈물 사이로 웃었다 그가 불행한지 그가 행복한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 행복인지 불행한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동생은 울고 나는 울지 않는다. 동생이 아버지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기 전에 이미 아버지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기연민의 울음은 아닌지 질문하고 싶었다.

 

최근 조셉 콘래드의 <서구인의 눈으로>를 틈틈이 읽고 있다. 한국의 1970년-80년대의 상황을 반추하게 하는 작품이다. 피할 수 없는 폭력적 혁명의 선택 앞에서 라주모프는 자신의 삶의 가능성이 말살되는 것을 비겁하지만 온몸으로 반대하고 혁명의 영웅, 암살자 할딘을 밀고한다. 조국 근대화의 개발 독재 앞에서 '독재'는 반대하지만 '개발'은 반대할 수 없었던 우리 시대가 갖고 있던 딜레마의 러시아판이다. 

 

(중략)

 

나의 영문학의 '아버지'가 된 엘리엇을 처음으로 만나던 나의 대학생활 시절의 나이의 학생들이 어떤 내용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는가.

 

 그런 다음 한 시간 동안에 선생님의 작품의 핵심을 이 생도들에게 말해주는 것을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고 톰 엘리엇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선생님이 사람의 가면을 벗기는 것,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각자 다소간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허위의 겉치레를 찢어버리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우리가 진실에 직면하려는 용기를 갖게 될 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했지요. 만약 삶에 그대 자신의 조건을 강요할 힘을 그대가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러면 삶이 그대에게 자신의 조건을 강요하게 될 것이라고 선생님의 시 구절을 인용했지요. 내가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이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첫째, 서로 절연되어 있는 사이에서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이 자라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하느님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말을 걸 수 있지 가면을 쓴, 허위의 겉치레를 한 자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지요."  

 

엘리엇은 "글쎄, 윌리엄, 내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보다 자네가 나를 확실히 더 잘 대변했네 그려"라고 인정한다. 내가, 아니 청춘기에 엘리엇에 걸려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엘리엇의 시적 기교에 반했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긴 번역 인용의 요점이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에 걸려들었을 때, 현대 영시의 시적 기교에 매료된 것은 아니었다. 그건 나중에 한참 뒤의 이야기일 뿐이다. 모호하기 이를 때 없는 현대 사회의 첫 발을 내딛는 젊은이가 삶의 방향을 더듬거리며 찾을 때, 어렵게만 보이는 시 구절들의 배후에서 어쨌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라는 엘리엇의 진심어린 충고가 그 젊은이의 마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엘리엇을 엘리엇의 시를 사랑한다. 그래서 수만 명의 관중이 엘리엇의 문학비평 공개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던 것이리라.

 

반유태주의 비판은 엘리엇이 우리 시대의 '아버지'임을 확인하는 역설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 앤소니 줄리어스의 다음과 같은 논거는 아버지에게 때를 부리는, 아버지가 왜 완벽하지 못한 것인지 투정을 하면서 실망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작가들을 감상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으며 종종 그들에게 합당한 수준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도덕적이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의 상상력의 비도덕성에 눈감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위대한 엘리엇 '아버지'여, 어째서 몇 군데의 반유태주의적 구절에 대해 '아들'의 마음에 들게 반성하지 못하시는가. 그러나 후속세대인 똑똑한 '아들'의 눈에 비친 나름대로 똑똑했던 '아버지'의 무능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최근에 출간된 <하이데거와 나치즘>은 나치에 참여하였던 위대한 현대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대한 의미 있는 변명을 제공해준다. 나치즘에 동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하이데거가 "적어도 유태인의 박멸을 주장하는 극렬한 반유태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제국주의적 정복이나 전체주의적인 지배에 찬동하지도 않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 같다"는 박찬국 교수의 분석과 비교해볼 때 줄리어스의 태도가 얼마나 '감상적'인지 알 수 있다.

 

경원대학교, 이만식<아버지가 없는 시대의 아버지>중에서.

 

 

* 채란 타이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