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흑판
수업 중 판서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물컹하더니 손이 칠판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몸의 절반이 들어갔을 때 “선생님! 새가 유리에 부딪혀 떨어졌어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물에 빠지듯 흑판에 빨려 들어갔다. 칠판 속으로 들어가니 반대편 교실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짝과 떠들다가 생물 선생님에게 걸려서 철 필통으로 뺨을 맞았다. 맞을 때마다 샤프가 흔들려 덜그럭거렸다. 아이들이 웃었다. 뺨보다 그 쇳소리가 더 아파왔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교문 밖의 고양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칠판을 건너오자 교실에 아이들은 없고 유리창 여기저기 검붉은 핏자국만 가득하다.
2
죽음은 계속 피어나고
40년간 땅을 파다보니 이제 힘에 부치네. 그래도 사람 죽으면 나야 뭐 할 일이 있나. 적당하게 땅을 파주면 관이 들어오고 흙 좀 덮으면 유족들이 알아서 땅을 잘 밟아 준다네. 황천길 노자 돈을 좀 요구하기는 하지만 너무 책망 말게나. 내 벌이가 얼마 되나. 나도 노모와 처자식이 있다네.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죽어야 나는 산다네. 그래서 가끔 울적하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겨울이 지나면 들꽃과 잡초들이 올라오듯 죽음은 끝이 없으니까. 오늘 죽은 사람은 가족묘에 묻혔네. 젊은 나이에 죽었다더군. 물어볼 수 없었지만 가족들 눈빛을 보니 십중팔구 자살이라네. 죽기에 좀 이르지만 어쩌겠나. 벌레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무덤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걸세. 얘야, 꽃을 꺾었구나. 가지고 이리 와보렴. 꽃의 무덤을 만들어 줘야지.
-계간 『시와 세계』 2013년 봄호 발표
3
공모(共謀)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 나와 그림자들은 시체를 자루에 싸서 조심조심 옮겼다 그림자 하나가 울컥했다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 아닌데… 나머지 그림자들이 그를 달랬다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야 차 트렁크 열고 시동 좀 걸어놔 간신히 1층까지 왔는데 아파트 현관 앞에 순찰 중인 경찰이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필이면 자루가 찢어져 시체의 멍든 허벅지 살이 드러났다 하하 이건 고구마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트렁크에 실으려 했다 한번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림자 하나가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옆의 그림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는 자루를 펴 보였다 자루 안에는 지푸라기와 고구마가 가득했다 경찰관과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고구마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났다 방금 찐 고구마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네 고맙습니다 경찰관이 고구마를 한입 물자 썩은 피가 뿜어져나왔다.
-시집『모음들이 쏟아진다』(2014)
창비시선 376
출간일 2014년 07월 18일
4
카프카적인 퇴근
오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피곤한 하루였다 일이 많은 것보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더 힘이 든다 간신히 퇴근하여 버스에 오른다 뒤편에서 우리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잘 왔다 마침 수의사가 너를 수술하러 왔구나 가족들은 낯선 승객들과 섞여 있었지만 그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집이 계속 덜컹거렸다 승객들은 인형처럼 똑같이 흔들렸다 어제 그에게 명치 부분이 아프다고 얘기했지만 이렇게 연락도 없이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는 나를 뒷좌석에 눕히고 가슴을 절개한다 내 허파가 숨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집이 덜컹거린 탓인지 메스로 허파의 일부를 손상시켰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폐활량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수술을 하던 그는 전화를 받더니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다 나는 가슴이 열린 채로 따라 내렸다 길 옆 담벼락에 무수히 많은 주사기가 박혀 있었다 나는 개가 되어 짖으며 달렸다 땅바닥에 흘린 선명한 핏자국이 지나온 길을 증명했다 나는 파편이 되어 날리고 있었다
-세계의 문학
5
백 개의 태양이 죽은 터널
원형극장 한복판에 터널들이 세로로 세워졌다 내가 살고 있는 터널은 땅속처럼 어두웠다 터널의 꼭대기에는 연기도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촘촘하고 단단한 창살이 있다 굳어진 것은 뚫고 나가지 못한다 붕괴되면서 상승하는 연기처럼 나는 언제든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다 추방당한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밖으로 가기 위하여
밤인데 어딜 그렇게 급하게 나가니
술 한 잔 먹고 가거라
할머니, 여긴 터널이에요
이 어둠을 믿으면 안 돼요
지금은 한낮인걸요
목구멍에서 어제 마신 술 냄새가 올라와도
할머니 한 잔 나 한 잔
왜 우리 가족은 술 안 먹으면 대화가 없을까
아가, 옆집 사람들은 아기들이 울어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구나
저는 고양이들인 줄 알았어요
술을 마시면 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에요
어느 정도는 그래요
어쩌면 할머니는 치매가 아닌지도 몰라요
사실 할머니 말고는 모두 미쳤죠
제 말을 못 알아들어도 할머니를 사랑해요
바구니의 하얀 새
고양이들이 뛰어간다
터널의 창살과 함께 질주하는 달
침대에는 항상 독수리 발톱이 가득 태어나 있었다
썩은 나무토막이 흘리는 음(音) 사이로
입술들이 돋아 합창을 한다
어떤 노래도 거짓은 아니었지만 진실의 절반도 안 된다
바다로 흐르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할머니의 숨소리가 멀미로 밀려온다
저도 귀가 먹을까 봐 걱정이 돼요
전 단 한 번도 할머니 돈을 훔치지 않았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렇고요
다들 할머니보다 부자인걸요
그래서 할머니보다 술도 많이 마시는걸요
기차 소리 들린다
늘 소리만 들린다
경적이 울리면 나는 문 뒤에서
그림자놀이를 했다
이곳은 습도가 높아서
시간마저 미끄러지곤 한다
나는 숨을 마실 때 아이가 되고
숨을 내쉴 때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펜이 얼굴에 박히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
펜이 꽂혀 있는 얼굴은
아무 표정도 짓지 못한다
가슴뼈가 성장을 멈추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술 끊게 하려고
껌정소 오줌도 받아다 먹였다지요
저도 그 오줌이 필요한데
이제 검은 소는 보이지 않아요
두 살 된 아기에게도 술을 먹이는 아버지
그만 주세요
이미 많이 먹었다고요
층계마다 뜨는 해를 집어삼키며
거대한 터널로 무럭무럭 자라는 원형극장
점점 좁아지는 창살에
가시 돋아난 전갈의 눈이 겹쳐진다
전갈의 껍데기 안에는 부서진 얼음
백 개의 태양이 태어나고 죽어 가는 계단
그곳에서 나는 내 눈에 돋아난 가시를 자주 잘라 낸다
-시집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민음사, 2008)
정재학 1974년 서울에서 출생. 1996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200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시집으로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민음사, 2004)와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민음사, 2008) 가 있음.